[49프로젝트] 스치는 눈빛 하나에도

김회권


우리 삶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면 내내 잊지 못할 아픈 상처, 혹은 가슴 떨리는 벅찬 감동의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살면서 나눔과 베풂, 혹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되는 관계는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일까.


그러나 때때로 나도 모를 말 한마디가 상대에겐 내내 씻지 못할 마음의 상처가 되기도 한다. 또 자기 속에 있는 불덩어리를 던지면 그것을 받은 사람은 화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가끔 잊고 산다. 우리가 서로를 공감한다는 것은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거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침묵의 언어조차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소통 불감과 만족할 줄 모르는 비판으로 먼 길을 돌아 진실에 닿을 때까진 우린 너무나 많은 것을 잃고 만다.

만약 지금 당신의 가슴이, 그 속내가 들끓고 있다면 어찌하겠는가. 가능한 한 빨리 비 갠 하늘처럼 청순했으면 할 거다. 일단 속이 화평해야 더는 밖으로 나올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린 서로들 숯검정처럼 타들어 가는 속내를 드러내기보다 서로 쌓인 감정을 말끔히 풀어내야 한다. 감정은 움직이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기 이전, 흐르는 에너지인 거다. 에너지이기에 흘려보내야 한다. 한시도 묶여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흔히 비릿한 감정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고 나서야 마음의 통증을 느낀다. 결국 밀려드는 후회로 부스러기만 남긴다. 만약 당신의 심사가 편치 않다면, 그런 뒤틀린 심사로 얼마를 걷다가 우산도 없이 비 맞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당신의 마음은 어떡하겠는가. 비 맞는 청승에 또다시 화가 치밀 것이고, 갈라진 마음 바닥엔 흙탕물이 흥건히 젖어 들 것이다. 그러니 누구와 온전히 이해하거나 설령 이해받지 못할지라도 대화를 멈춰선 아니 된다.


어떤 기준과 판단이던 서로에게 귀 기울이고 경청하며 공감해야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 그 신뢰는 친밀감이고, 그 친밀감은 그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누구든 그 한 사람의 현실 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만 진짜 공감이고 경청이며 소통인 거다. 하지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린 때때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겪는 고통도 모르고 지나가는 때가 많다. 아마도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접촉이 불가능한 사람일 게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에 우리의 가슴은 때늦은 후회로 가슴을 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유한한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때문에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다. 누가 내게 인생에서 가장 귀한 가치로 무엇을 선택하겠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누굴 꼽는가에 대한 비중보다 어떻게 선택을 받고 뽑히느냐에 더 무게가 실리는 까닭이다.

지금은 흔히 경쟁사회라고 한다. 또 개인이 집단을 선택하는 것보다 집단이 개인을 선택하는 편이 더 많다. 개개인의 능력과 창의성, 전문성이 우선시되는 이 사회에선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닌 선택을 받는 쪽이니 말이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선택을 받고자 땀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니 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모두가 나와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순간 밀리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싸여있는 거다.


요즘 신경정신과를 찾는 중년층이 많다고 한다. 날로 급변하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려 하는데, 힘과 능력에 한계를 느껴 이로써 찾아드는 심리적 압박과 언제 밀려날지 모를 불안, 그리고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신경쇠약으로 병원을 찾는단다. 이 모든 것이 어떤 양상이든 상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는 열망과 열의에서 오는 증상 아닌가.

 

일상생활에서의 개개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남들을 평가, 혹은 비판하고픈 이상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고 저울질하는 게 몸에 밴 습성처럼 스스럼없고, 능수능란하기까지 하다. 섣부른 판단과 오해가 불신과 상처를 낳는다고 해도 불면증에 걸린 사람처럼 잠재우지 못한다. 굳이 상대를 평가하고 따지고 싶다면 먼저 자신부터 다스리고 살펴봄이 어떨까. 자칫 숲을 보고 나무를 보지 못할 우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는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법. 섣부른 저울질과 평가는 자칫 상대방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된다. 불신은 서로를 불안케 하고, 많은 고통을 안긴다. 하지만 믿음은 그렇지 않다. 서로의 마음을 덧없이 평화롭고 안정되게 해준다.

우린 이제 알게 모르게 쓰고 있을 자신의 색안경을 벗어던져야 한다. 맑은 눈에는 모든 것이 거울이다. 솔직하고 진지한 눈길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한다. 그보다 먼저 자신 안에서 부정하고 거부하고 싶어 하는 싹을 싹둑 잘라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믿음과 함께 신뢰가 싹트는 거다. 자기 안에 부정적인 싹이 계속 자라고 있는 한, 믿음이나 신뢰의 뿌리는 생명력이 없다. 오래갈 수도 없다. 평가에 앞서 먼저 자기 자신에 충실하고 엄격하자는 거다. 혹여 부끄러운 나 자신의 내면을 발견했다면, 그건 또 하나의 진솔한 나의 양심을 새롭게 얻은 것과 같다.


남에게 생긴 불행이 나에게도 생길 수 있다는 이치. 그게 자신에게 닥쳐올 때까지 우린 얼마나 멀리 느껴지는가. 아픔은 곧 살아있음의 증거인데 말이다. 가 보지 않은 길은 안내할 수 없듯, 누군가는 이미 내가 아파하는 자리를 지나갔고, 그리고 당당히 살아남았다는 거다. 인간은 누구나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겠으나, 그릇된 평가 그 이면엔 휴짓조각보다 더 알량한 교만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는 걸 간파해선 안 된다. 교만은 우리를 얼마나 추하게 하던가. 반면에 겸손은 우리를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던가.


인간을 인간답게 귀하고 향기 나게 해주는 겸손. 풍성한 삶으로 여물게 하는 이 겸손이야말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자,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문() 아닐까. 우리네 인생은 어디로 도망치더라도 엄격한 현실에 부딪히고 만다. 인생은 회오(悔悟)라 했다. 이미 해버린 일에 대한 뉘우침. 그것으로 차 있는 게 바로 인생이리라. 그러니 서로를 판단하려 들지 말자. 서로가 서로에게 비추어주는 따뜻한 불빛만 되어주자.


고통이 있는 현실에도, 알 수 없는 미래의 먼 훗날에도, 서로의 추위를 감싸고 스치는 눈빛 하나에도 웃음 한 번 머금는 그런 여유로움을 이제라도 가져보자. [글=김회권]



이정민 기자
작성 2021.05.04 02:49 수정 2021.05.0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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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