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 임나는 일본 큐슈에 있었다

임나의 지명(2)

다다라, 수나라, 화다, 비지 4촌은 큐슈에 산재한 지명

한반도 남부 '임나일본부설' 정면으로 반박

529, 이사부가 초략한 임나 4(2/2)

    

신라의 이사부가 초략(抄掠)했다는 임나 4촌이 금관, 배벌, 안다, 위타라고 한 설에 대해서는 저번에 설명한 바 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설에 등장하는 다다라, 수나라, 화다, 비지’ 4개의 촌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다다라(多多羅)

다다라는 이사부가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석 달동안 주둔해 있었다는 다다라원(多多羅原)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펴낸 일본서기국역본의 주석에는 다다라(多多羅)를 부산 다대포의 고명 답달(沓達)’에 비정하고 있으나, 아예 논평할 가치가 없다 보아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다.


[다다라]는 원시어소 [/tar]이 중첩된 지명인데, 그러한 지명은 한두 개가 아니므로 함부로 비정해서는 안 된다. 야마구치(山口)현 호후(防府)시의 고명이 다다라하마(多多良浜)였으므로 그곳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커 보이는 곳은 후쿠오카시 동구에 있는 다다라(多多良)강 옆에 펼쳐진 벌판이다. 다음 지도에 보이는 다다라(多多良)가 바로 그곳이라 생각된다.


다다라



수나라(須那羅)

[수나라][소나라]라고도 하였다. 일본서기추고기 8년 봄에는 素奈羅(소나라)”라고 표기되어 있다이 지명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시어소 [/sur][/nor]이 합쳐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시어소 [/sur]은 거대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정도로만 설명해 두겠다.


그리고 원시어소 [/nor]은 현대한국어 너르다의 어원에 해당하는 말인데, ‘나라, 누리 나루, 나리(), 누리, , 넉넉하다, 너럭바위같은 말이 모두 같은 원시어소 [/nor]에서 분화된 말이다. ‘호수를 뜻하는 몽골어 [노르]평야를 뜻하는 일본어 [()] 역시 같은 원시어소 [/nor]에서 분화된 말이다.

 

영어 wide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넓다이고, [/nurb]을 한국인들은 경우에 따라 []이나 []처럼 발음한다. []이라고도 하고 []이라고도 하는 이것을 두고 필자는 음의 부전(浮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은 쉽게 부전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로도 소리내고 []이라고도 소리내는 말을 복자음 받침을 사용하여 이라고 표기한다. []을 연진발음하면 [너르]가 되고, []을 연진발음하면 [너브]가 되는데, 그 둘을 합친 []을 연진발음하면 어떻게 될까? [너르, 너브, 너르브, 널브, 너블] 등과 같이 된다.


[/nurb]

[/nur]

너르

[/nub]

너브

[너블/nu-br]

너브르

[널브/nur-b]

너르브

[너릅/nu-rb]

너르브

이러한 음의 부전과 연진발음 형태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광활한 땅을 가리키는 []이 있다. 현대한국어 누리, 나라, 나리, 이 모두 거기서 분화되어 나왔다. []이란 말 앞에 거대한 것을 강조하는 의미의 []을 덧붙이면 [+}이 된다. [슬넓]에서 앞말의 받침소리가 약해진 것이 [스넓]이다. 그리고 그 [스넓/snurb]을 연진발음하면 [스너르, 스너브, 스너릅] 등과 같이 된다.


[스널]省熱(성열)이라 음차해 적었다. 가야금의 명인 우륵의 출생지가 성열현(省熱縣)이다.

[스너르]須那羅(수나라) 혹은 素奈羅(소나라)라고 적었다. 둘 다 음차표기다.

[스너릅]을 한번 더 연진발음하면 [스너르브]가 된다. 한자를 빌려 이 [스너르브]라는 지명을 적고자 한다면 과연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일본 큐슈 북단에는 사세보(佐世保)라는 도시가 있다. 일본인들은 그곳을 사세보(させぼ)”라고 읽고 있지만 본래의 이름은 그게 아니었다. 본래는 한국어로 [스너르브]라고 하는 말을 그렇게 차자한 것이다. 한자 는 한국고유어로 누리이다. [누리/nuri][너르/nur]와 비슷하게 발음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러한 한자로 차자한 것이다. 그래서 [사누리보] 佐世保(사세보)란 표기가 나온 것이다. 이 때의 는 사음훈차(似音訓借)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아주 넓은 땅이라는 뜻의 이름 [sur-nurb]을 한글로 표기한다면 스넓이라 쓸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을 [스너르]라고도 하고 [스너르브]라고도 했던 바, 한자로 須那羅(수나라) 혹은 소나라(素奈羅)라고 표기하기도 하고, “佐世保라고 표기하기도 했던 것이다. 佐世保(좌세보)라는 한자표기는 본래 [사누리보]라는 부르는 지명을 차자한 표기인데, 후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되면서 그냥 한자음 그대로 읽어 사세보라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529년 이사부가 초략했다는 4촌 중의 하나인 수나라(須那羅) 또는 소나라(素奈羅)는 성열(省熱)이라고도 하였으며, 지금의 사세보(佐世保)에 비정된다는 말이다.


수나라



화다(和多)

아득한 옛날,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해온 말들 중에 넓은 벌판을 지칭하는 말이 있었다. [/bur] 정도로 재구할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을 필자는 원시지명어소라 하며 그냥 원시어소라고도 한다.


원시어소 [/bur][] 혹은 []로 발음되기도 했다. 그리고 [][]도 음이 쉽게 부전되었다. 넓은 벌판을 한국어로 []이라 하는데 일본어로는 하라(, はら)”라고 한다. 한국어에서 [/]로 부전되는 말이 [바라하라]로 변음된 것이다.


같은 원시어소에서 비롯된 한국어로 바다도 있는데, 이들 역시 일본어에 그대로 이어진다. 바다와타(. わた). 하타(, はた).

[/bat]을 제주 방언으로는 [/wat]이라 한다. [/wat]의 받침소리가 그대로 연진되면 [와타]가 되고, 약해져 없어지면 그냥 []가 된다. 그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 또는 ()”라는 국명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국명풀이 일본이라는 ebook이나 유튜브 동영상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wa]라는 국명은 아주 넓은 땅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것을 ()()라는 한자로 음차하여 적었는데, 뒤에다 땅을 뜻하는 [/]를 덧붙여 [와토] 혹은 [와타]라고도 하였다. [와토]倭人이란 한자로 적었고, [와타]和多란 한자로 적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왜국의 위치에 대하여 왜인재대방동남대해지중(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쓴 왜인(倭人)왜국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한다면 치밀함이 부족한 사람이다. 倭人[와이토]라는 국명을 음차+사음훈차한 표기로, people이란 뜻이 아니다. 倭人 자체가 국명이다. 을 일본어로 [히토(ひと)]라 하므로 그 점에 착안해 [와이토/waito]라 일컫는 국명을 그렇게 차자한 것이다.

 

다시 말해 []라 일컫는 국명을 혹은 라 적었고, 거기에 땅을 뜻하는 [/]를 덧붙여 [와토/와타]라고도 했던 바 [와토(와이토)]倭人이라 쓰고 [와타]和多라 썼던 것이다. 앞에서 일본 고어 [와타(わた)]는 한국어 [바다]에 대응되는 말이라고 한 바 있다. 한국어 바다()’를 음차하여 적으면 波多(파다)’라고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후쿠오카 서쪽 이토시마(糸島)시에 파다강(波多江; 하타에)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사부가 초략했다는 4촌 중의 하나인 화다(和多)는 바로 이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화다



비지(費智)

이 지명은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좀 무리한 끌어다 붙이기일 수도 있지만, 일단 다음과 같이 파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본래는 [비지]라 하는 말을 費智라고 음차하여 적었는데, 費智(비지)를 후대인들이 히치(ひち)”라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히치]라 하는 것을 더 후대의 2차표기자가 日置(일치)’라고 차자하여 적었고, 그것을 일본인들이 히오키(ひおき)”라고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자 ()를 일본어에서 음독하면 ()”이고 훈독하면 오쿠(おく)”이다.


어쩌면 그 반대일 가능성도 있다. 본래 [히오키/shi-oki]라 일컫는 지명을 현지인들이 日置(일치)”라 적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히치]費智(비지)”라 표기했을 가능성이다. 필자는 이 후자의 가능성에 좀더 무게를 둔다히오키(日置)시는 큐슈 남쪽 살마반도의 녹아도(鹿兒島; 가고시마)현 중앙부에 있다.


비지



이상으로, 일본서기계체기 23(529) 기록에 신라의 이질부례가 초략했다고 열거한 4개 촌의 이름을 2회에 걸쳐 모두 살펴보았다.


일본서기에는 4촌에 대하여 두 가지 설이 있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기실 이사부가 초략한 마을은 이들 8개 전부일 가능성이 크다. 4촌에 대한 두 가지 설 중 어느 쪽이 옳든 간에, 그리고 그것이 4개이든 8개이든 간에, 이사부가 초략했다는 마을은 금관(金官) 하나만 빼고는 모두 큐슈 일대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그 당시 큐슈 지역은 신라의 강역이었다는 말이나 다름없고, 그러한 사실을 일본서기라는 책이 웅변하고 있다 할 것이다.


최규성 작가

편집부 기자
작성 2018.11.06 15:27 수정 2018.11.0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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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