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9년, 이사부가 초략한 임나 4촌 (2/2)
신라의 이사부가 초략(抄掠)했다는 임나 4촌이 ‘금관, 배벌, 안다, 위타’라고 한 설에 대해서는 저번에 설명한 바 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설에 등장하는 ‘다다라, 수나라, 화다, 비지’ 4개의 촌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다다라(多多羅)
다다라는 이사부가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석 달동안 주둔해 있었다는 다다라원(多多羅原)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펴낸 『일본서기』국역본의 주석에는 다다라(多多羅)를 부산 다대포의 고명 ‘답달(沓達)’에 비정하고 있으나, 아예 논평할 가치가 없다 보아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다.
[다다라]는 원시어소 [달/tar]이 중첩된 지명인데, 그러한 지명은 한두 개가 아니므로 함부로 비정해서는 안 된다. 야마구치(山口)현 호후(防府)시의 고명이 다다라하마(多多良浜)였으므로 그곳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커 보이는 곳은 후쿠오카시 동구에 있는 다다라(多多良)강 옆에 펼쳐진 벌판이다. 다음 지도에 보이는 다다라(多多良)가 바로 그곳이라 생각된다.
▶수나라(須那羅)
[수나라]는 [소나라]라고도 하였다. 『일본서기』추고기 8년 봄에는 “素奈羅(소나라)”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지명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시어소 [슬/sur]과 [놀/nor]이 합쳐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시어소 [슬/sur]은 거대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정도로만 설명해 두겠다.
그리고 원시어소 [놀/nor]은 현대한국어 ‘너르다’의 어원에 해당하는 말인데, ‘나라, 누리 나루, 나리(내), 누리, 논, 넉넉하다, 너럭바위’ 같은 말이 모두 같은 원시어소 [놀/nor]에서 분화된 말이다. ‘호수’를 뜻하는 몽골어 [노르]와 ‘평야’를 뜻하는 일본어 [노(の)] 역시 같은 원시어소 [놀/nor]에서 분화된 말이다.
영어 wide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넓다’이고, 그 [넓/nurb]을 한국인들은 경우에 따라 [널]이나 [넙]처럼 발음한다. [널]이라고도 하고 [넙]이라고도 하는 이것을 두고 필자는 ‘음의 부전(浮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널/넙]은 쉽게 부전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널]로도 소리내고 [넙]이라고도 소리내는 말을 복자음 받침을 사용하여 “넓”이라고 표기한다. [널]을 연진발음하면 [너르]가 되고, [넙]을 연진발음하면 [너브]가 되는데, 그 둘을 합친 [넓]을 연진발음하면 어떻게 될까? [너르, 너브, 너르브, 널브, 너블] 등과 같이 된다.
[넓/nurb]→ | [널/nur]→ | 너르 |
[넙/nub]→ | 너브 | |
[너블/nu-br]→ | 너브르 | |
[널브/nur-b]→ | 너르브 | |
[너릅/nu-rb]→ | 너르브 |
이러한 음의 부전과 연진발음 형태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광활한 땅을 가리키는 [넓]이 있다. 현대한국어 ‘누리, 나라, 나리, 늪’이 모두 거기서 분화되어 나왔다. 그 [넓]이란 말 앞에 거대한 것을 강조하는 의미의 [슬]을 덧붙이면 [슬+넓}이 된다. [슬넓]에서 앞말의 받침소리가 약해진 것이 [스넓]이다. 그리고 그 [스넓/snurb]을 연진발음하면 [스너르, 스너브, 스너릅] 등과 같이 된다.
[스널]을 省熱(성열)이라 음차해 적었다. 가야금의 명인 우륵의 출생지가 성열현(省熱縣)이다.
[스너르]를 須那羅(수나라) 혹은 素奈羅(소나라)라고 적었다. 둘 다 음차표기다.
[스너릅]을 한번 더 연진발음하면 [스너르브]가 된다. 한자를 빌려 이 [스너르브]라는 지명을 적고자 한다면 과연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일본 큐슈 북단에는 사세보(佐世保)라는 도시가 있다. 일본인들은 그곳을 “사세보(させぼ)”라고 읽고 있지만 본래의 이름은 그게 아니었다. 본래는 한국어로 [스너르브]라고 하는 말을 그렇게 차자한 것이다. 한자 世는 한국고유어로 ‘누리’이다. [누리/nuri]가 [너르/nur]와 비슷하게 발음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러한 한자로 차자한 것이다. 그래서 [사누리보] 즉 佐世保(사세보)란 표기가 나온 것이다. 이 때의 世는 사음훈차(似音訓借)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아주 넓은 땅이라는 뜻의 이름 [sur-nurb]을 한글로 표기한다면 “스넓”이라 쓸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을 [스너르]라고도 하고 [스너르브]라고도 했던 바, 한자로 須那羅(수나라) 혹은 소나라(素奈羅)라고 표기하기도 하고, “佐世保”라고 표기하기도 했던 것이다. 佐世保(좌세보)라는 한자표기는 본래 [사누리보]라는 부르는 지명을 차자한 표기인데, 후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되면서 그냥 한자음 그대로 읽어 “사세보”라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529년 이사부가 초략했다는 4촌 중의 하나인 수나라(須那羅) 또는 소나라(素奈羅)는 성열(省熱)이라고도 하였으며, 지금의 사세보(佐世保)에 비정된다는 말이다.
▶화다(和多)
아득한 옛날,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해온 말들 중에 넓은 벌판을 지칭하는 말이 있었다. [불/bur] 정도로 재구할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을 필자는 원시지명어소라 하며 그냥 원시어소라고도 한다.
원시어소 [불/bur]은 [블] 혹은 [벌]로 발음되기도 했다. 그리고 [벌]과 [발]도 음이 쉽게 부전되었다. 넓은 벌판을 한국어로 [벌]이라 하는데 일본어로는 “하라(原, はら)”라고 한다. 한국어에서 [벌/발]로 부전되는 말이 [발→바라→하라]로 변음된 것이다.
같은 원시어소에서 비롯된 한국어로 ‘바다’와 ‘밭’도 있는데, 이들 역시 일본어에 그대로 이어진다. 바다→와타(海. わた). 밭→하타(畑, はた).
[밭/bat]을 제주 방언으로는 [왙/wat]이라 한다. [왙/wat]의 받침소리가 그대로 연진되면 [와타]가 되고, 약해져 없어지면 그냥 [와]가 된다. 그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倭(왜)” 또는 “和(와)”라는 국명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국명풀이 일본』이라는 ebook이나 유튜브 동영상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와/wa]라는 국명은 아주 넓은 땅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것을 倭(왜)나 和(화)라는 한자로 음차하여 적었는데, 뒤에다 땅을 뜻하는 [타/토]를 덧붙여 [와토] 혹은 [와타]라고도 하였다. [와토]를 “倭人”이란 한자로 적었고, [와타]를 “和多”란 한자로 적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왜국의 위치에 대하여 “왜인재대방동남대해지중(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쓴 왜인(倭人)을 ‘왜국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한다면 치밀함이 부족한 사람이다. 이 倭人은 [와이토]라는 국명을 ‘음차+사음훈차’한 표기로, 人은 people이란 뜻이 아니다. 倭人 자체가 국명이다. 人을 일본어로 [히토(ひと)]라 하므로 그 점에 착안해 [와이토/waito]라 일컫는 국명을 그렇게 차자한 것이다.
다시 말해 [와]라 일컫는 국명을 ‘倭’ 혹은 ‘和’라 적었고, 거기에 땅을 뜻하는 [토/타]를 덧붙여 [와토/와타]라고도 했던 바 [와토(와이토)]를 ‘倭人’이라 쓰고 [와타]를 ‘和多’라 썼던 것이다. 앞에서 일본 고어 [와타(わた)]는 한국어 [바다]에 대응되는 말이라고 한 바 있다. 한국어 ‘바다(海)’를 음차하여 적으면 ‘波多(파다)’라고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후쿠오카 서쪽 이토시마(糸島)시에 파다강(波多江; 하타에)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사부가 초략했다는 4촌 중의 하나인 화다(和多)는 바로 이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비지(費智)
이 지명은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좀 무리한 끌어다 붙이기일 수도 있지만, 일단 다음과 같이 파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본래는 [비지]라 하는 말을 費智라고 음차하여 적었는데, 그 費智(비지)를 후대인들이 “히치(ひち)”라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히치]라 하는 것을 더 후대의 2차표기자가 ‘日置(일치)’라고 차자하여 적었고, 그것을 일본인들이 “히오키(ひおき)”라고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자 置(치)를 일본어에서 음독하면 “치(ち)”이고 훈독하면 “오쿠(おく)”이다.
어쩌면 그 반대일 가능성도 있다. 본래 [히오키/shi-oki]라 일컫는 지명을 현지인들이 “日置(일치)”라 적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히치]를 “費智(비지)”라 표기했을 가능성이다. 필자는 이 후자의 가능성에 좀더 무게를 둔다. 히오키(日置)시는 큐슈 남쪽 살마반도의 녹아도(鹿兒島; 가고시마)현 중앙부에 있다.
이상으로, 『일본서기』계체기 23년(529) 기록에 신라의 이질부례가 초략했다고 열거한 4개 촌의 이름을 2회에 걸쳐 모두 살펴보았다.
『일본서기』에는 4촌에 대하여 두 가지 설이 있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기실 이사부가 초략한 마을은 이들 8개 전부일 가능성이 크다. 4촌에 대한 두 가지 설 중 어느 쪽이 옳든 간에, 그리고 그것이 4개이든 8개이든 간에, 이사부가 초략했다는 마을은 금관(金官) 하나만 빼고는 모두 큐슈 일대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그 당시 큐슈 지역은 신라의 강역이었다는 말이나 다름없고, 그러한 사실을 『일본서기』라는 책이 웅변하고 있다 할 것이다.
최규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