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 역사칼럼] 녹도만호 송여종의 전공과 신상

윤헌식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에서 활약한 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들 가운데 가장 많이 전투에 참전한 인물를 꼽으라면, 아마도 녹도만호를 지낸 송여종(宋汝悰)일 것이다.

 

​송여종의 이름이 나타나는 가장 시기가 이른 기록은 『임진장초』의 「부산파왜병장」이다. 아래는 「부산파왜병장」의 송여종 관련 기록을 옮겨놓은 것이다.

 

​이순신, 『임진장초』, 「부산파왜병장」(1592년 9월 17일)

 

태인(泰仁)에 거주하면서 무예를 익힌 교생 송여종은 낙안군수 신호의 대변군관으로서 4차례에 걸쳐 적을 무찌를 때(四度討賊時) 충정이 치솟아 앞장서서 돌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워 거듭 왜군의 머리를 베었으며...

 

* 대변군관(待變軍官): 변란에 대비하여 각 지방의 군정(軍丁) 가운데에서 선발하여 임명한 군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 조선 수군은 4차례에 걸쳐 출전을 감행하였다. 위 기록에 따르면 송여종은 낙안군수 신호의 휘하에 있으면서 임진왜란 초기 해전인 4차례 출전에 모두 참전하였다. 강항(姜沆, 1567~1618년)의 『수은집』 권4의 「증우윤송공비명」은 송여종의 비명(碑銘)을 적은 글인데, 이에 따르면 송여종은 부산포해전 이후 남평현감으로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녹도만호 정운의 후임으로 발탁되었다. 단, 『난중일기』의 1593년 2월 2일/18일에는 녹도의 장수가 가장(假將:임시로 부임한 장수)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송여종이 녹도만호로 도임 시기를 정확히 판단하기가 조금 어렵다.

 

이후 송여종의 이름은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의 기록에서 여러 차례 확인되는데, 그가 녹도만호로서 처음 공을 세운 전투는 제2차 당항포해전이다. 이 해전은 『임진장초』의 「당항포파왜병장」(1594년 3월 10일)에 그 전투 진행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녹도만호 송여종은 칠천량해전이 벌어진 시기인 1597년 7월 전후의 『난중일기』 기록에도 그 이름이 보이므로 칠천량해전에도 참전했음이 분명하다. 명량해전의 전투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난중일기』의 1597년 9월 16일 기록에도 그의 이름이 나타나는데, 아래는 그 해당 기록을 옮겨놓은 것이다.

 

이순신,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

 

안위(거제현령)와 배 위의 사람들이 각기 죽을 힘을 다해서 혹 능장을 가지고, 혹 장창을 쥐고, 혹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마구 공격하다가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힘이 다하였다. 내 배가 뱃머리를 돌려서 곧장 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럽게 쏘아대니 3배의 적들이 거의 다 쓰러졌다.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따라와서 힘을 합쳐 쏘아 죽이니 하나의 적도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 능장(稜杖): 각이 진 곤방(棍棒)류를 가리키는 통칭이다. 조선 중기의 문헌에 종종 삼릉장(三稜杖)이라는 명칭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 이 시기의 능장은 주로 삼각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장창(長槍): 『무예제보』의 「장창제(長鎗製)」에 의하면 장창은 1장 5자 길이의 나무나 대나무로 된 자루에 4냥 이하의 창날을 붙여서 만들어졌다. 『무예제보』가 1598년 훈련도감의 낭관(郎官) 한교(韓嶠)에 의해 편찬된 점으로 보아, 명량해전 때 사용된 장창도 『무예제보』에 기록된 장창 규격과 동일하거나 비슷했을 것이다.

 

* 수마석(水磨石): 『융원필비』의 「단석(團石)」에 의하면 수마석은 완구(碗口)에 사용되던 포탄이다. 『중종실록』의 기사에는 수마석을 배에 싣고 다니면서 변란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순천부읍지』와 『장흥부읍지』의 「군기(軍器)」에도 수마석이 군기의 종류에 포함되어 있다.

 

* 단병기인 능장과 장창으로 싸우면서 수마석을 사람이 직접던졌다는 『난중일기』의 기록은 명량해전의 전투 상황이 매우 위급했음을 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임진왜란 시기 송여종의 가장 큰 전공은 절이도 해전에서 세운 전공이다. 절이도는 지금의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를 말한다. 1598년 7월경 녹도만호 송여종은 전선 8척으로 일본군 수급 71급을 베고 여러 적선을 불태웠다. 아쉽게도 절이도 해전에 참전한 왜선의 규모에 대한 기록이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이 전투의 진행 상황과 규모를 정확히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거금도 고라금 해수욕장에서 바라본 거금도와 금당도 사이의 절이도 해전 추정지

 

녹도만호 송여종은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의 노량해전에도 참전하였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강항의 「증우윤송공비명」에 기록되어 있다. 즉, 송여종은 임진왜란 초기 해전부터 마지막 해전까지 조선 수군의 주요 해전에 거의 다 참전한 셈이다.

 

​강항의 「증우윤송공비명」은 송여종이 임인년(1609년)에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그의 생몰년은 1553~1609년이 된다. 그러나 전남 유형문화제 제147호로 지정된 '주사선연도 등 신여량 장군 유품' 가운데 「주사선연지도」에 기록된 송여종의 생년은 갑인년(1554년)으로 되어 있다. 「증우윤송공비명」과 「주사선연지도」는 모두 송여종의 본관을 여산(礪山)/여량(礪良:여산의 옛이름), 자(字)는 언온(彥蘊)으로 기록하였다. 『여산송씨족보』에 따르면 그는 여산송씨 지신공파(知申公派) 파조 송인(宋璘)의 8대손이다.

 

[참고자료] 

한국고전종합DB, 강항(姜沆)의 『수은집(睡隱集)』 권4 「묘갈(墓碣)」-「증우윤송공비명(贈右尹宋公碑銘)」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순천부읍지(順天府邑誌)』, 한국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장흥부읍지(長興府邑誌)』, 한국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장명, 「절이도해전 관련 몇 가지 문제들」, 『이순신연구논총』 제28호, 2017,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원

이수경, 「신여량의 <舟師宣宴之圖> 제작배경 재검토」,  『미술자료』 제93호,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

『여산송씨족보(礪山宋氏族譜)』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4.04.26 10:42 수정 2024.04.2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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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