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열전 靑年 列傳] 삶의 의미를 둘러싼 방황, 송윤아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장 그르니에는 카뮈의 스승으로 유명한 철학자다. 그는 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그냥 살아간다기보다는 왜 사는가에 의문을 품도록 마련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¹ 카뮈는 이런 의문이 단 하나의 진지한 철학적 문제라며 거창하게 말했으나 사실 살다 보면 한 번쯤 품게 되는 사소한 질문이기도 하다.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란 의문이 대표적이다.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고는 쓸데없는 고상한 질문이라며 미뤄두는 게 대부분이다. 난 그게 잘 안 됐다.

 

삶의 의미를 둘러싼 질문은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무언가를 하려 할 때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란 의문이 떠올랐다. 불그스름한 석양을 볼 때도, 수평선의 경계를 흐릴 정도로 청량한 바다와 하늘을 볼 때도 삶의 의미를 둘러싼 의문이 피어올랐다. 실로 삶은 무와 같은데 산다는 것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걸까. 거대한 세계 앞에 선 이 자그마한 개체의 존재 의미를 알고 싶었다. 뒤늦게 철학 복수전공을 했던 이유였다.

 

철학은 난해했으나 지적 희열을 안겨줬다. 철학이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란 질문, 그 질문이 몰고 오는 무기력과 공허함을 해결해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설렜다. 그런데, 철학사의 맥락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 때 내가 받아든 답안은 예상과 달랐다.

 

답이, 없었다.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

 

19세기 말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다. 카뮈가 말하듯 삶의 의미에 관한 해명이 중요한 철학적 문제가 된 것은 그즈음부터였다. 신의 죽음은 하 수상한 19, 20세기 유럽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마주했던 절박한 문제였다. “종교, 도덕도, 그 모두가 이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맞지 않아.”²라는 데미안의 말은 당시 오랜 기간 유럽을 통합하던 기독교적 가치의 균열이 가져온 당혹감을 드러낸다. 낡은 가치가 무너진 폐허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길러낼 것인가,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서구 지성인들이 의미를 찾기 위해 발싸심했던 이유였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이 없다는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등장했다.

    

기독교적 가치의 균열 이후 사람들은 이 세계가 신이 창조한 필연의 세계가 아니라 우연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도 우연의 결과일 뿐 어떤 목적이나 의미를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인간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 허무감에 빠졌다. 하지만 계속 그러고 있던 건 아니었다. 서구의 지식인들은 허무감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대표적 인물이 니체였다. 니체는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갈 것을 주장했다.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며 순간을 살되 자기 삶을 긍정하는 인간. 그게 바로 초인이었다. 이렇게 인간을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로 규정하며 허무주의를 극복하려 했던 지식인들은 니체 말고도 많았다. 니체의 영향을 받은 헤세나 카잔자키스가 있었고 실존(현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가 있었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삶이 고유한 목적이나 의미가 부재한 무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선택을 통해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존재가 곧 인간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매력적이었다. 사회가 강요하는 정형화한 삶의 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은 외모, 성적, 재산 등이 내 삶을 규정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데서 시작된다. 정형화한, 획일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자기 개별성을 찾고, 주체적으로 사는 태도인 셈이다.

 

의문이 없던 건 아니었다. 삶의 의미는 어떻게 만드는 건가.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 건가. 사람을 괴롭히는 게 내 삶의 의미라 주장하는 주관주의자를 어떻게 봐야 하나.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런 의문을 해결하는 데 한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미국 철학자 앤드루 커노한의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란 책이었다.

 

 

의미의 원천인 머리와 가슴

 

커노한은 직관적으로 설득력 있는 의미의 원천을 이야기한다. 바로 정서emotion. 정서란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을 일컫는다. 우리가 무엇을 의미 있다 이야기할 때는 늘 감정과 연관된다. 특정 대상을 중요하다 여기거나, 사랑하거나, 좋아하거나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의미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자신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중요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말은 아무거나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찾아 나간다는 뜻이다. 가슴이 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할 수 있다. A를 자랑스럽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자랑스러워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해보자. 이때 처음 느낀 정서는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무언가 의미 있으려면 일단 우리에게 의미 있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이 실제로도 의미 있어야 한다. 커노한은 이를 합리적 정서라는 말로 표현한다. 합리적 정서라는 개념은 주관주의의 문제를 해결한다. 누군가 사람을 괴롭히는 게 삶의 의미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실제로 의미 있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반박할 수 있다. 의미를 찾기 위해 머리와 가슴이 모두 필요한 이유다.

 

정서가 우리에게 안내하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 다원적개별적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대상에 대해 끌림을 느끼고, 같은 대상을 두고도 다른 감정을 느끼는 존재다. 삶의 의미와 관련해 한 가지 정서나 느낌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정서가 다양한 만큼, 감정을 느끼는 방식이 다양한 만큼, 삶의 의미도 다양하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의미와 관련해 통일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애초에 삶의 의미는 무엇이다.’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커노한은 거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한다. ‘삶의 의미는 뭘까.’와 같은 질문 말이다.

 

커노한은 대신 자그마한 질문들을 던지자고 제안한다. 의미의 원천이 정서라면, 우리는 정서와 관련한 질문을 던지면서 삶에서 의미를 찾아 나갈 수 있다. ‘나는 어떤 일을 좋아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가?’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자기 삶에 대한 의미도 마찬가지다. 자기 삶을 두고 적절한 정서를 느껴야 우리는 자기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랑받을만한 사람인가?’ ‘자신감을 가진 사람인가?’ ‘행복한 사람인가?’ ‘자랑스러운가?’ 이런 질문과 관련해 긍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사는 게 중요한 셈이다.

 

결국, 나에게 중요한 것을 찾고, 그것이 중요시될 만한 것인지 판단한 후, 그것을 과감하게 선택해 그에 헌신하며 사는 게 의미 있는 삶을 구축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개별성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알아야 하고, 세상을 알아야 한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기

 

의미의 원천을 등한시하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 내가 마주한 공허함과 무기력의 원인이 있었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찾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사람은 자기 삶에 감정적 끌림을 느끼지 못한다. 원하는 방식대로 살지 못하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자기 삶을 두고 자랑스럽다, 행복하다 느끼기란 쉽지 않다. 자기 정서를 등한시한 만큼 삶에서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 대가가 곧 공허함과 무기력이다. 공허함과 무기력은 자기 욕망과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지 못한 결과다.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란 질문도 마찬가지다. 의미의 원천을 등한시하는 것과 관련된다. 자기 삶을 두고 마땅한 감정적 끌림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람은 자기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자존감이 있고, 행복하다 느끼고, 자기 삶이 소중하다는 자각이 있다면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테다. 그런 점에서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느냔 내면의 목소리는 자기가 무가치하다는 자각을 세상에 투사하는 것이다.

 

공허함과 무기력을 물리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감정적 끌림을 느끼는 선택을 반복하고, 자신에 대해 긍정적 정서를 느끼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쉽진 않다. 획일적 기준과 삶의 방식으로 한 인간의 고유한 개별성을 묻어버리는 게 우리가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외모, 성적, 스펙, , 젠더같은 속물적 기준의 위계가 삶의 의미를 규정한다고 믿는 곳이다. 위계의 낮은 곳에 서면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는 곳에서, 나의 모습을 오롯이 존중하며 사랑하는 게 얼마나 가능할까.

 

선택이 필요하다. 나를 규정하려는 사회적 시선에 맞서 내면의 목소리를 좇아 자신에게 진실된 삶을 살 것인가, 획일화한 삶의 방식을 따라 살 것인가. 힘겹지만 더 만족스러운 삶은 분명 전자다. ‘자기 삶, 자기 꿈을 좇으며 살지 못한 것이 사람들이 죽기 전 가장 많이 하는 후회라고 하지 않나정형화한, 획일적 기준에서 벗어나 개별성을 좇으려는 태도는 공감이 자라나는 데 도움 되기도 한다. 내가 하나의 개별적 인간이듯, 다른 사람도 하나의 개별적 인간이라는 자각에서 공감은 싹트니 말이다. 공감이 오고 가는 삶은 더 만족스러울 테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나의 내면을 따라가는 삶은 분명 힘겹고 두려운 일이겠지만, 오랫동안 공허함과 무기력의 실체를 두고 고민했던 나로서는, 정형화한 삶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을 듯하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후회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러니 나만의 길을 걷다가 찾아올 실존적 부담에 맞설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길치라 걱정되긴 하다. 그러나 어쩌겠나. 인생이란 백지 위에 나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게 내가 바라는 일인 것을.

 

 

 

 


전명희 기자
작성 2018.11.14 15:24 수정 2018.11.1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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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