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타향살이

한민족의 노스탈쟈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치하, 저들의 징발·징용·강제·찬탈에 대한 우리민족의 하소연과 울화는 어떻게 분출되고 삭여졌을까. 이 노래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준다. 이 노래는 가사보다 나라는 망하고, 사나이 이름 없는 풀꽃도, 우리들의 눈동자도 빛을 잃고, 하늘에서 지저귀던 새들도 울음을 그쳤다로 시작하는 오프닝 대사가 더 절절한 곡이다.

 

일본이 만주를 무단으로 공략(만주사변, 1931.9.18. 류탸오후사건으로 시작된 일본의 만주침략전쟁)을 한 1년 뒤, 1932년 봄 콜롬비아레코드사가 개최한 전국남녀신인가수선발대회에서 두루마기를 입고 출연한 20세 고복수가 3등으로 입상을 한다. 이듬 해 고복수는 오케레코드에 전속가수로 발탁되어, 김능인이 작사하고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손목인의 처녀작곡, <타향살이>(원곡명, 타향)를 취입하였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꺾어 불던 그때가 옛날

 

구수한 목소리와 기교를 부리지 않은 순수한 창법의 이 노래는 이후 고복수의 대명사가 된다. 특히 시간을 더하면서 당시 피폐한 삶의 터전에서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서서 만주로 이주를 해 간 조선족의 애국가와 같은 망향의 노래가 되었다. 당시 만주에 개장사를 하러간다는 비속어(卑俗語)가 생겼을 정도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치하, 조국강산은 일본사람들의 말 말굽 아래 짓밟히고 그들의 학정이 날로 심하여지자, 동포들 중에는 북풍 휘몰아치는 만주(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또는 북간도(장춘·훈춘·용정 일대)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그 무렵 그들이 비분을 달래며 애절하게 목메어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 타향살이다.

 

당시 22세였던 고복수는 1911년 울산에서 출생하여 1933<타향살이>를 불러 인기가수가 되었고, 1년 연하인 작곡가 손목인을 평생 스승으로 깍듯이 예우하였다. 또한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아내 황금심과 같이 일본 만주 등으로 순회공연을 다녔으며, 19506.25전쟁 때 북한군에게 잡혀 강제 입대되었으나, 국군에게 구출되어 군예대로 복무했다.

 

그는 1957년 명동 시공관(, 서울예술극장)에서 가수생활 25년 은퇴식을 열었었다. 대중예술인으로써의 첫 시도였다. 이후 1959년 동화백화점(신세계백화점) 5층에 동화예술학원을 설립하여 이미자와 안정애를 가수로 배출하였다. 1960년에는 이 노래 <타향살이>를 극영화로 제작하여 발표하였으나, 발표 1주일 만에 4.19의거가 터져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이후 서적외판원 등을 하면서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다가 1972년 고혈압으로 향년 61세의 생을 마감했다.

 

작곡가 손목인은 1913년 진주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손득렬이다.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서울로 와서 재동초등학교와 경신고보를 졸업하였고, 학창시절 기독교청년연맹에서 서양음악을 접했다. 이후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돌아와 처음으로 작곡한 노래가 <타향살이>, 이듬해 2호로 작곡한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다. 이후 <짝사랑>, <아빠의 청춘> 등을 히트시켰고, 김정구·남인수·박단마 등의 가수들을 길러냈다.

 

<타향살이>가 발표된 후 우리민족은 해방광복을 맞이했고, 6.25전쟁과 4.19의거·5.16군사정변을 거치면서 근대화와 산업화의 기치를 내건다. 그 과정에서 우리들의 누이와 형님들은 독일로 돈벌이를 떠나, 타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삶을 이어간다. 1960년대 중반, 독일 베를린으로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 1세대들, 해외에서 살고 있는 교민들, 해외공단 및 중동건설 현장 파견근로자들, 이민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르면서 눈물바다를 이룬다.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지역과 인종을 막론하고 어머니와 고향이란다. 먼 옛날 같은 우리나라의 현대, 1963년 독일로 파병할 광부를 모집할 당시 500명 모집에 46천명이 몰려들었다. 당시 남한 인구 2400만 명에 실업자 숫자만도 250만 명이 넘었다. 이런 시절이니 매월 6백 마르크(160달러)의 직장에 지원자가 밀려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루르탄광 지하 1천 미터와 3천 미터 사이 막장에서 1미터를 파고 들어갈 때마다 4~5마르크를 받았다. 196612, 3년의 고용기간을 채우고 142명의 파독광부 제1진이 귀국했을 때 거의 전원이 1회 이상의 골절상 병력을 안고 있었다.

 

파견 간호사의 사정도 비슷했다. 같은 해 1128명이 독일로 떠날 때의 고용조건은 월 보수 440마르크(110달러)였다. 1970년대 중반에는 서베를린에만 한국 간호사가 2천명이 넘었다. 1966~76년 독일로 건너간 한국간호사는 130, 광부들은 1963~78년까지 7800여명이 건너갔다.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천만 달러로 당시 GNP2%대에 달했다. 이들은 단 하루도 <타향살이>를 읊조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w8hFrACQog




 

유차영 선임기자(솔깃감동스토리연구원장)

 


편집부 기자
작성 2019.01.25 09:16 수정 2019.01.25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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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