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곰배령 겨울숲은 빈 나뭇가지를 훑는 바람 소리뿐

당신도 봄을 기다리고 있는가



흑백의 풍경이 내게 묻는다. “그대 올라가지 않겠는가? 하늘 향해 열려있는 곰배령에!”

 

사실 눈이 시리도록 하얀 눈 세상이 보고 싶었다. 눈꽃조차 스러져 헐벗고 적막한 이때, 나무도 잎을 모두 떨구어 허허로운 겨울 숲의 또 다른 매력을 오롯하게 누릴 기회다.

 

서울 양양 고속도로 개통으로 곰배령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서양양 IC로 나와 조침령 터널을 지나 418번 지방도로를 들어서자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한다. 곰배령으로 들어가는 진동계곡 골짜기는 끝없이 깊다. 그 골짜기 끝에 곰배령 주차장이 있다.


곰배령 가는 진동계곡은 아침 햇살에 빛나는 설경 때문에 모든 것이 싱그럽다.



강원도 인제군 점봉산과 가칠봉 사이의 고갯마루인 곰배령은 국내에서 생태 보존이 가장 뛰어난 숲이다. 겨우내 쌓인 눈이 녹는 5월부터 서리가 내리는 9월까지는 온갖 야생화들이 피고 지는 천상의 화원이다. 한겨울에는 탐스런 눈꽃과 상고대, 빽빽이 들어선 활엽수림에서 펼쳐지는 멋진 설경을 연출한다.

 

들머리인 진동리는 점봉산에서 단목령, 북암령, 조침령, 구룡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산자락 밑에 터를 잡은 오지마을이다. 대간을 넘나드는 바람이 거세 비와 안개가 잦고 설피밭이라는 지명이 생길 정도로 눈도 많이 내린다.


곰배령 들머리인 설피마을은 겨울에 눈이 하도 많이 쌓여 설피(雪皮) 없이는 다닐 수 없다.

 

 

코가 뻥 뚫릴 정도로 맑은 공기를 느끼고, 얼음이 녹으면서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에 잡념을 씻어낸다. 속세의 티끌마저 털어내니 발걸음조차 가볍다. 하얀 눈이 쌓인 산길을 집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다.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다보니 겨울 산길은 정겨움이 넘쳐난다.

 

곰배령을 포함한 점봉산 일대는 국내 희귀 동식물이 자라는 식물의 보고로 유명하다. 지난 1982년 설악산이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에 포함될 때 천연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하루 입장객이 300명으로 제한되고 있다. 그 덕분일까. 곰배령 일대의 숲과 계곡은 청정자연이 숨 쉬는 원시림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점봉산 곰배령 생태 관리 센터. 이곳에서 인터넷 예약자를 신분증으로 일일이 확인한 후 출입증을 교부한다.

 

운 좋게 오늘 입산 허가받은 300인 중 '001'번 명찰을 받는다. 점봉산 일대는 1987년부터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다 22년 만인 2009년 7월에 개방된다.


 

공원관리소에서 강선마을까지는 널찍하고 유순한 숲길이다. 산책하듯 30분쯤 오르면 산골마을 강선리에 이른다. 이곳부터 본격적인 산행이다. 진동계곡을 끼고 가는 이 길은 고갯마루에 오르기 직전만 가파를 뿐 전체적으로 완만하다. 그저 주위의 설경을 감상하며 산책하듯 오르면 된다.


들머리의 주차장 부근 식당 집 강아지가 우리와 함께 길을 나선다. 공원관리사무소와 강선마을을 지나 초소까지 동행했다가 이곳에서 우리 일행이 하산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시림 아래의 들꽃과 들풀은 설원에 묻혀있고, 시원한 물줄기를 토해내는 계곡도 동면에 빠져있다. 등로 주위에는 군락을 이룬 산죽이 눈을 뒤집어선 채 산객을 향해 고개를 내밀어 반긴다.


눈길을 걷다가 가끔 미끄러진다. 눈 속에 파묻힌 산죽이 잠시 고개를 내밀고 한마디 건넨다.

 

살다가 가끔씩 넘어지는 게 인생이라네.”

 

삶의 문턱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넘어진 그 자리서 툭툭 털고 일어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숲에서 듣는다. 쉬엄쉬엄 따라가는 이 눈길이 바로 치유의 길이 아닌가.

 


 

흑백의 풍경이 내게 묻는다. “그대 올라가지 않겠는가? 하늘 향해 열려있는 곰배령에!”

 

 

진동리와 강선마을을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4륜 오토바이.

 

 

숲에 안기듯 자리한 강선마을은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포행(布行)에 나선 구도자의 심정이 이와 같을까? 곧게 뻗은 낙엽송과 잣나무도 줄기 가지 할 것 없이 주위가 온통 하얗다.


맑은 잣나무 향내에 마음을 뺏긴다.



강선마을 초입의 잣나무 숲. 상쾌한 초록에서 기운찬 대지의 용트림을 느끼며 곧 시작될 새 생명의 기운을 감지한다.
산간오지 강선마을. 설량이 풍부한 마을은 눈물 나게 희다.

 

 

마을을 벗어나자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산새소리가 겨울 숲의 정적을 가른다. 겨울 숲은 지나간 추억을 쓰다듬어주고 마음의 상처에 진정한 위안의 손길을 내민다. 세상살이 시름을 딛고 다시 저잣거리로 나아갈 수 있는 힘도 안겨준다.

 

곰배령 가는 길은 들머리에서 2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는 짧고 완만한 길이라 "밋밋하다"는 볼멘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이곳은 땀을 흘리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봄과 여름날에는 작은 꽃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걷다보면 시나브로 '()이 키우는 정원'에 닿게 되는 그런 곳이다.


산간오지에 있는 이런 호젓한 숲길이 얼마나 사람들의 가슴 속을 아릿하게 만드는지는 걸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벌거벗은 나뭇가지가 보드라운 질감으로 산의 두께를 느끼게 하고, 산길의 파란 산죽들이 눈 속에서 싱싱함을 보여줄 때, 나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자각한다.

 

숲은 여전히 하늘을 가리고 있다. 강선마을을 지나면 임도가 끝나고 좁은 등산로가 이어진다. 발밑에서 뽀득거리던 임도의 눈길과 달리 이제 발목까지 빠진다. 여기서부터는 눈밭을 헤치고 걸어야 하는 행복한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숲이 끝나는 곳에 파란 하늘이 열린다. 그 하늘 아래가 바로 곰배령이다.

 

곰이 배를 하늘을 향해 드러내놓고 누워있는 모양에서 이름 붙여진 곰배령(1,164)은 점봉산(1,427)과 가칠봉 사이의 고갯마루다.

 

곰배령은 봄과 여름에는 초록색 풀과 야생화가 지천에 피어 천상의 화원이라 불린다.

하지만 겨울에는 넓게 펼쳐진 소박한 설원의 멋이 곰배령 만의 매력이다.

곰배령은 겨울이 진짜다. 깊고 외로워서 더 눈물나게 아름답다.

 

곰배령 옆으로 작은 점봉산이 어머니 젖가슴처럼 누워 있고 점봉산으로 유순한 능선이 이어진다.

 

 

곰배령에서 설악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구름 너머로 대청, 중청, 끝청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너스로 얻은 설악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는다.


점봉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2.5쯤 떨어진 곰배령은 오래전에 인위적으로 형성된 초원이다. 고갯마루에 깔아놓은 나무데크를 따라가면 헬기장을 나오고 산림대장군·산림여장군 앞에서 길은 끊긴다.


곰배령에서 점봉산 넘어가는 백두대간 길은 막혀있다.

 

 

곰배령의 평원이 온통 들꽃으로 치장하는 때는 8월부터다.8월의 곰배령 주인은 녹음으로 짙푸른 들꽃이다. 산바람 사이로 끼어든 꽃향기가 싱그럽고, 푸른 산색에 기죽지 않는 야생화들의 자태가 당당하고 탐스럽다.


기린초, 꿀풀, 당귀, 동자꽃, 둥근이질풀, 범꼬리, 붓꽃, 애기앉은부채, 하늘나리....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들꽃들이 천상의 화원을 이루는 곰배령의 꽃 잔치는 가을까지 이어진다.

이 들꽃의 향연에 다시 초대받아 어지러운 꽃밭에서 노닐고 싶은 생각이 벌써부터 간절하다.


점봉산 반대편에 우뚝 솟은 호랑이코빼기(1,105m)와 가칠봉(1,240m)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산 너울이 끝없이 넘실거린다. 그 겹겹의 능선이 살아 움직인다.


평원에는 키 작은 나무와 풀들이 거센 바람에 울고 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에 닿으면 살을 에는 통증이 뒤따른다. 버텨보지만 매서운 삭풍은 능선에 선 산객을 결국 아래로 밀어낸다.

 

하산 길은 한결 수월하다. 오를 때 보지 못했던 숲과 계곡의 아름다운 설경을 즐기며 천천히 내려서면 된다. 완만한 구릉에는 온통 눈꽃이 만발해 장관이다. 낙엽 떨군 가지들은 하얗게 짧은 머리털을 이고 있다.


겨울산은 속살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식과 숨김이 없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이제 봄을 기다린다.

온몸으로 견뎌낸 동토도, 땅속 어둠도 다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봄 생명들의 순정한 합창은 부활의 송가가 아니던가.

여리고 순한 것들이 온전히 피어나는 세상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어떤가? 당신도 봄을 기다리고 있는가?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9.02.19 21:06 수정 2019.02.2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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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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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래먼산님 (2019.02.20 16:06) 
곰배령
산악회회원들과 같이 다녀왔네. 국립공원측에서 곰배령 대간길을 막아놓아 대간종주꾼들이 블법으로 산행하는 모양새가 되었다네. 꽃피는 봄에 천상의 화원에 한번 더 다녀올 예정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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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님 (2019.02.20 08:45) 
archila
점봉산은 다녀온듯 한데 곰배령은 항상 희망사항이라 여대장 언제? 혼자 갔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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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