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기행] 소백산 비로사

 


소백산 비로사

 

친구는 내가 놀고먹는 줄 안다. 출판사 사무실에 앉아 커피나 홀짝거리거나 출판할 원고를 몇 줄 읽다가 인사동 술집에 앉아 술잔이나 기우리며 신선놀음 할 거라고 의심하곤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출판사 일이란 것이 표가 나지 않는 고도의 정신노동인데 그 정신노동의 강도가 오후 4시경이면 스트레스의 정점을 찍는다. 쌓여있는 원고들이 벌떼처럼 일제히 들고 일어나 나를 공격하기 시작하면 피할 곳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인사동 생기원으로 피신해 술잔을 기우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술을 끊은 지 벌써 여러 달째다. 술벗들도 술 끊어 재미없어진 나를 차츰 멀리하고 있는데 유독 B선생만은 술 끊은 나를 끌고 인사동을 순례하며 술고문을 시키곤 했다. 말은 바른 말이지만 술고문은 고문 중에 제일 무서운 고문이다. 술 끊은 사람과 술 안 끊은 사람과의 술자리에서 패자는 늘 술 끊은 사람이다. 그러나 B선생의 술주정이 유독 귀엽고 천진하다. 술기운에 쏟아내는 언어가 별처럼 반짝거린다는 것을 안 것도 술 끊은 덕분이다. 나는 B선생의 술주정을 지겨워 하다가 재밌어 하다가를 반복하며 지랄 같은 찬란한 봄날의 오후를 통째로 날려 버리곤 했다. 물론 나의 스트레스도 함께 말이다.

 

근래에 몸이 좀 가벼워졌다. 술을 끊은 덕분이다. 스마트폰에서 만보기 앱을 다운받아서 매일 만보를 한다. 조계사에 들러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동아일보 앞을 지나 청계천을 걷다가 삼일교에서 나와 인사동을 걷는다. 인사동을 지나 안국동 헌법재판소 길을 걸어 왼쪽으로 꺾는다. 작은 언덕에 있는 정독도서관을 앞을 지나 현대사옥 쪽으로 나와서 현대사옥 앞에 있는 현대원서공원을 열 바퀴 정도 걷는다. 그리고 사무실로 오면 팔천보정도 된다. 나머지는 일상에서 걷는 것으로 만보를 채운다. 요즘 나는 이렇게 가벼워진 몸으로 여느 때보다 활기찬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가벼워진 몸으로 금요일 오후에 자인헌으로 떠날 때면 나는 마치 피안으로 가는 것처럼 즐겁고 행복하다. 겨울동안 추위를 핑계로 백팔산사순례를 못해 마음의 짐을 벗지 못하고 있다가 봄꽃이 몸을 풀던 사월의 어느 토요일 나는 몇 번이고 가보려다가 실패한 소백산 비로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작년 가을에 갔다가 입구에서 매표소 직원과의 언쟁으로 되돌아온 불쾌한 기억이 있었지만 다 잊고 부처님을 만나는 일에 속 좁은 나의 마음을 참회하고 또 참회하며 다시 비로사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비로사로 올라갔다.

   

물이 오른 나무들이 일제히 서서 연둣빛 손을 흔들고 있다. 나무들은 찰랑찰랑 바람의 등을 타고 흔들거리다가 봄 햇살과 눈을 마주치며 속살거렸다. 길섶엔 꿩의 다리 꽃이 여린 생명을 초연하게 피우고 갈퀴 현오색의 꿀을 따는 벌은 누가 쳐다봐도 모르는 체 정신이 없었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그래서 아름답다. 스스로 부르는 생명의 무정설법 노래다. 나는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작은 꽃들과 인사를 나누며 아는 체를 했다.

 

안녕

 

안녕이라는 인사를 나누자 작은 꽃들이 꽃잎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꽃길이 마음길이고 마음길이 수행길이 아니던가. 이 길을 수없이 오갔을 스님들의 발걸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비로사로 올라가는 길의 봄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도 구름도 꽃들도 나와 인연이 닿지 않은 것은 없으리라. 그러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마치 도통한 스님 같은 표정으로 내 흥에 취해 자아도취 하며 혼자 웃었다. 아무렴 어떠랴. 봄은 빛나고 꽃도 빛나고 나도 빛나는데 이 세상 빛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이 빛나는 봄이 부처고 부처가 봄일 테니 말이다.

 


 

비로사 뒤로 머리만 보이는 비로봉를 바라보며 계단을 오르자 당간지주가 먼저 나를 반겼다. 통일신라 때 세운 당간지주는 푸른 봄 하늘을 바치고 서서 의연한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당간지주를 지나 계단을 더 오르자 적광전이 나왔다. 세상의 번뇌를 끊고 고요하게 빛나는 마음을 들여 놓는 곳이라는 적광전에서 삼배를 마치고 나오니 금강경을 독송하는 산승의 목소리가 봄 햇살과 엉키고 있었다. 때론 누군가 묻곤 했다. 절엔 왜 가냐고. 그때마다 난 그냥 웃기만 했다. 맞다. 그냥이다. 그냥 나는 절에 온다. 설명할 수 없는 그냥이 좋아서, 한없이 좋아서…….

 

고운사의 말사인 비로사엔 전해오는 애틋한 이야기가 있다. 가난하여 장가도 들지 못한 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진정이라는 총각은 의상대사가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가하여 의상대사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삼년간이나 열심히 공부를 어느 날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칠일동안 선정에 들었다가 그 소식을 의상대사에게 전했다. 의상은 진정의 효심에 감동해 진정의 어머니를 위해 소백산 추동으로 가서 초가집을 짓고 제자 삼천 명을 모아 구십일동안 화엄경을 강의했다.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서 환생하였다.’고 했다. 의상대사가 효성 지극한 진정의 어머니를 위해 강의한 추동의 초가집이 지금의 비로사다. 긴 세월은 몇 번이고 변하고 변해 전란에 사라졌다가 다시 중창을 하고 또 어느 시절에 없어졌다가 시절인연이 닿으면 세워지고를 반복했을 것이다.

 

비로사의 부처님이 작은 봄꽃이듯 봄꽃이 부처가 되어 나의 봄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있었다. 봄꽃 같은 부처를 만나고 내려오는 길, 봄꽃들이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내 뒤로 부처의 미소 같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잘 가시오




 


전승선 기자
작성 2019.06.25 09:39 수정 2019.06.2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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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