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기행] 중국 항주 영복사



중국 항주 영복사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나는 항주에서 문득 깨달음에 대해 자문했다. 한갓 어리석은 중생에 불과한 내가 깨달음의 본질에 의문을 품고 항주 영복사의 산문을 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먹고 잘사는데도 괴로운 이들이 도처에 넘쳐난다. 헛헛함이라는 정신적 고통은 이미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된지 오래인데 치유할 대상이 없다. 그 많던 깨달은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의 깨달음은 사회적 소통을 거부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까. 소통이라는 것은 자연 혹은 사회 그리고 사람을 통해 공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본질은 사랑이 아니던가. ‘사랑이처럼 흔하고 흔해빠진 단어를 깨달음에 대비 시키고 나니 한결 시원했다.

 

사랑은 나의 다른 모습이고 너의 다른 모습이며 우주의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깨달음과 같은 동의어로 소통이라는 양식의 표현이다. 이토록 쉽고 이토록 상투적인 말이 바로 깨달음이라니 우주를 한 바퀴 돌아와도 다 깨닫지 못한다면 그건 아마 물고기가 바다를 찾아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깨달은이가 없다고 한탄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지금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면서 저 우주 속을 헤매고 다니는 스님들이 넘쳐 나지만 이제는 사회가 깨달은이들을 원치 않고 있다. 깨달음은 그 자체의 본질과 관련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회의 지식이 불교의 깨달음에 못 미친 시대에는 깨달은이가 속출했다. 이는 불교가 사회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궁하게 발달한 사회와 눈부신 과학이 종교를 앞서서 대중들에게 쉽고 간결한 깨달음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하여 깨달음이라는 것을 바르게 설명할 언어는 없다. 어떤 이는 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사랑이라고 한다. 우리는 가장 쉬운 단어인 사랑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편하다. 누구도 질문하지 않고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영복사까지 올라가는 긴 거리를 한참이나 이런 생각에 빠져 들다보니 어느새 일주문 앞에 다다랐다.

 

대륙의 절들이 다 웅장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지만 영복사는 마치 수줍은 소녀처럼 소담하고 고요했다. 너른 정원엔 잘 정돈된 나무들이 이 절의 품위를 지켜주고 있었고 바지런한 절 사람들의 노고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항주의 자연이 품어낸 천축산 아래 마치 자연처럼 앉아 자연이 되어버린 영복사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 밖에서 시간을 기다리며 시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스님들은 모두 동안거에 들었는지 보이지 않고 사람들만 부산하게 오가며 고요를 흩트려 놓고 있는데 나는 향을 하나 꺼내들고 불을 붙였다. 잘 타들어가는 향을 허공에 올려 영복사 부처님께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내게도 사랑이라는 깨달음의 진리에 한발 다가설 수 있기를 기도했다.

 

 

앎이 아니라 실천

 

사랑이라는 기도를 하고 나니 염치없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사실은 사랑이 존재이고 그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인간인데 나는 이 얼토당토않은 사랑이라는 관념을 통해 존재를 전달하려고 수를 썼다. 내가 나를 모르니 사랑이라는 관념이 꼬이고 인식이라는 주체가 또 꼬인다. 나는 왜 오늘 이토록 이 진부한 질문에 매달리며 영복사를 왔던 것인가. 누군가 내게 뜰 앞의 잣나무라고 말해 주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에서 앎을 빼버리고 실천으로 행하라고 하면서 뜰 앞의 잣나무라고 누군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주어도 나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뜰 앞의 잣나무이건 사랑이건 상관없이 나는 이 지구에 소풍 온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내게 무정설법을 펼쳐줄 것이고 나는 내가 자연임을 알 날이 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지구로 소풍 온 의미는 있지 않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소풍이라고 부르고 사랑이라고 쓰면 이보다 더 좋은 깨달음은 없을 듯싶다.

 

세살 먹은 아이도 알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어렵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봉행하는 것입니다."

"세 살짜리 아이도 그런 것은 알겠습니다."

"세 살짜리 아이도 알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영복사에 도를 이룬 도림선사가 있었는데 항주의 태수로 온 시인 백거이가 도림선사를 찾아와 나눈 이야기다. 알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불법이라는 일침에 백거이는 크게 깨닫고 스승으로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앎에서 벗어나 행하는 것이야말로 불법이며 사랑이라고 그것이 바로 우주의 이치라고 도림선사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찾아보니 영복사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고 다만 도림선사와 백거이의 선문답이 영복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세 살짜리 아이도 알지만 팔십 노인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도림선가의 선문답이 들리든 듯 했다. 나는 사랑이 없으면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오지 않았는지 뒤돌아보며 영복사 정원을 걸어 나오는데 갑자기 시원한 막걸리가 생각났다. , 이 미칠 것 같은 관념을 어찌해야 좋을까. 하필 영복사에서 진리나 가치가 아닌 막걸리가 생각나다니 나의 대책 없는 관념은 못생긴 모과처럼 난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국 땅 항주에서 막걸리는 내게 못생긴 모과였고 난해한 관념이었으며 영복사 부처님이었는지 모른다. 그래, 나는 모를 뿐이다. 모르므로 영복사에서 더 없이 행복한 순례자였다.

 


전승선 기자
작성 2019.08.06 10:46 수정 2019.08.0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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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