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삼각산 삼천사




삼각산 삼천사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기가 괴롭다.

죽지를 말지어다.

태어나기 괴롭다.

 

현실에 집착하지 않지만 내세도 관심 없다. 죽기가 괴롭다는 가설도 변태좌파들의 언변만큼이나 감언이설이다. 인류가 죽어서 다시 살아온 사람의 증언을 들어본 적이 없으므로 죽기가 괴롭다는 것은 가설에 불과하다. 하지만 살기가 괴로운 건 정설이다. 살기가 괴로우면서 죽자 사자 살려고 하는 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 살고 죽는 게 고통이라고 한 원효의 오도송을 좋아하는 건 그 문장이 가지고 있는 힘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의 의미는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이처럼 쉽고 명료한 문장 속에 숨은 단순함을 나는 집착할 만큼 좋아한다.

 

단순함이 좋다. 단순함은 명쾌함을 지니고 있다. 진리도 단순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진리가 눈에 보여도 불안하다. 진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경외하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환상이다. 진리는 멍때리는 인간의 뒤통수를 느닷없이 내리친다. 못된 깡패처럼 말이다. 화들짝 놀라 깨어보면 진리는 없고 진리의 탈을 쓴 복잡함이 눈만 껌뻑 거리며 멋쩍게 웃고 있다. 이쯤 되면 슬며시 화나나게 된다. 진리라는 놈의 멱살이라도 잡아 내팽겨 치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깨닫게 된다. 애초에 진리라는 것은 없었음을,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세월이 많이 흘러야 알게 된다. 그렇다 해도 서운해 할 일은 아니다.

 

단순함이 답이다. 단순함이 진리다. 애초에 우주는 단순함이다. 나는 이런 단순함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명쾌하기 때문이다. 단순함은 차별이 없다.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단순함은 외부의 위기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준다. 거치적거림이 없이 온전하게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단순함을 좇아 스님들은 출가를 하고 신부님들은 사제가 되는가 보다. 앎이라는 지식보따리를 껴안고 한평생 놓질 못하는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지리멸렬하던가. 비움 없이 채움만 있는 욕망덩어리는 한여름의 대책 없는 태양과 같이 뜨거울 뿐이다.

 

 

사실 나는 단순함을 경배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불쑥 불쑥 솟아나는 욕망덩어리에 지배당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무턱대고 산을 찾아 떠나는 버릇이 있다. 삼천사로 발걸음을 옮긴 건 그 무턱댐 때문이었다. 북한산 바위를 머리에 이고 뜨거운 여름태양아래 면벽하듯 앉아 있는 삼천사를 오르는 길은 내 복잡하고 다단한 욕망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울은 서울다워서 좋지만 삼천사는 서울을 내려다보면서도 왠지 서울냄새가 나지 않아서 좋다. 북한산 자락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오면서 히말라야에 오를 것 같은 차림의 중년남녀들을 스쳐지나갔다. 허허로운 인생을 숨긴 비싼 등산복에는 복잡함으로 치장하고 인생에게 데인 상처를 산에게서 치유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산에게 아부하는 것과 다름없어 보였다.

 

그들의 뒤를 따라 삼천사에 다다랐을 때는 관음제일기도가 한창일 때였다. 신도들이라야 연세가 지긋한 보살님들이 주를 이루기 마련인데 삼천사도 그렇긴 마찬가지였다. 저 산 아래 서울은 온갖 구설수가 난무하고 관심종자병에 걸린 사람들이 판을 치며 죽고 사는 문제나 살고 죽는 문제에 올인 하는데 북한산 삼천사에서 나는 문득 서울사람들이 가여워졌다. 저 서울 안에 있는 내가 가여워졌다. 이 어찌할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난 내가 가여우니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기가 괴롭다라고 노래한 원효의 말은 사실 맞는 말이다. 삼천사에서 나는 부처님을 뵙기도 전에 서울을 걱정했다. 아니다 나를 걱정했다. 저들 속의 나를, 내 속의 저들을 걱정하며 웃고 말았다.

 

예불 보는 사람들로 꽉 찬 대웅전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 앞에서 건성으로 부처님께 두 손을 모우고 예를 드렸는데 그런 나를 바라보는 부처님의 미소는 참 편안하고 잔잔했다. 부처님이 내게 속삭였다. 배고프지? 공양간에서 밥 한술 뜨고 가거라하며 내 뱃속을 걱정해 주었다. 정말 그런 느낌이었다. 건성으로 예를 올린 두 손을 슬며시 내리며 나는 부처님 눈에서 멀어지는 뒤통수를 긁고는 공양간으로 내려왔다. 부처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이 순간 밥이라고 대답할 뻔 했다. 생각해보면 부처가 밥인 건 틀린 말이 아니다. 밥은 삶이고 삶은 사랑이고 사랑은 생명이며 생명은 우주이니 부처가 밥인 건 옳은 생각이 아니던가.

 

뱃속을 채우고 삼천사를 둘러보니 신라의 원효가 세운 절이다. 그러니 우연은 없는 법이다. 생사고라고 외쳤던 원효가 이곳에 있었다. 삼천사는 내가 하루에 두어 번 들락거리는 조계사의 말사라는데 고려 현종 때 승려들이 쌀 360석으로 술을 빚은 것이 발각되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엄청난 세를 자랑하던 사찰이었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수레바퀴에서 영원한 것은 없는 것처럼 흥했다가 망했다가를 반복하며 오늘의 삼천사는 의연하게 북한산을 지키고 있었다.

 

삼천사를 휘돌아 흐르는 북한산 계곡물에 잠시 발을 담그고 명상에 들었다. 사방은 고요하고 이따금 삼천사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전승선 기자
작성 2019.09.30 11:03 수정 2019.09.3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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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