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숙 칼럼] 헌 신이 되는 길목을 가로막는

민은숙

독박과 시나브로 언니 동생 하며 살고 있었다. 가랑비로 몸이 젖는 줄도 모른 채. 성인이 된 후 경제적 독립을 했다. 정신적 독립은 사실 그 이전부터 했을 것이다. 나는 독립적인 인간임으로 남과 여로 만난 지기 또한 독립적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댁 식구와 불편한 관계로 '시' 자가 들어가는 시금치도 싫어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릴 땐 채소가 맛있는 줄 미처 몰랐는데 어느덧 나물류를 꽤 잘 먹는다. 나물 요리를 완성하기까지는 다듬기, 씻기, 데치기, 삶기, 물 쏙 빼기, 무치기, 양념과 조물조물하기 등 참으로 공정이 많이 간다. 씹을수록 단물이 나오는 나물을 저렴하게 실컷 먹을 수 있는 비빔밥은 질리지 않아 보리밥, 꽁보리밥, 본죽을 자주 드나든다.

 

매일 손에 물 묻히는 주부이지만 부끄럽게도 요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다. 돈 벌기 힘들다고 하늘 선물은 손에 물 묻히게 하지 않았다. 결혼하면 평생 해야 하는 일이라 했다. 요리는 못해도 책임과 의무는 잊은 적 없어 비록 난 굶고 출근하더라도 짝지의 아침을 굶긴 적이 없다. 일 가정 양립하는 과정이 출산 전까지는 그렇게 힘들지 않아 할만했다. 그러다 아이가 생겼다.

 

첫째는 하늘 선물의 무한한 사랑의 힘으로 일가정양립의 불만은 다소 있었지만 금세 떨치고 집중하며 병행할 수 있었다. 둘째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계획 임신인 첫째와는 달리 급한 성정에 스스로 찾아온 아이를 시댁에서도 환호했다. 아들이 많은 집안이 또 이렇게 아들을 좋아했다. 양가가 대만족,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므로 우리는 이쯤에서 둘만 키우기로 약속 아닌 약정을 맺었다. 그도 나도 한 사람의 인간을 키워내는 일에 서툴고 미숙하여 시행착오를 겪었다. 부모로서 부족함을 깨달아 아이들에게 미안했고 서로보다는 그들에게 집중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날이 왔다. 조부님 기일은 동장군이 늘 꽁꽁 얼리는지 모르겠다. 퇴근 후 시댁에 갔다. 큰형님이 얼추 준비해 놓았다. 설거지 하나만큼은 혀를 내두르게 잘할 수 있다. 요리는 썩 못해도 목기에 담는 건 잘한다. 지방을 태우고 탕국을 퍼 담았다. 식사하고 뒷정리하면 각자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둘째 아주버님이 말씀을 꺼내신다. 신랑이 마른 것 같다나. 큰형님은 가만히 있다가 보태는 말을 투척한다. 신랑 밥은 하는지를 너무 말랐다는 게다. 가만히 생각하니 뭔가 억울하다. 만일 내가 살이라도 붙었으면 이 사람들, 혼자만 밥 먹었냐 할 태세다.

 

큰아주버님이 조용히 분위기를 가른다. 왜 밥을 제수씨만 해 줘야 하나고. 네 밥 네가 해 먹으면 된다. 요리할 수 없으면 사 먹고 들어가면 된다. 고마운 아주버님이다.

 

“제수씨, 내일부로 얘 밥해주지 마세요. 입이 짧아서 그동안 제수씨가 힘들었죠? 애썼어요. 이제 얘 밥에서 해방되세요."

 

이런, 갑분싸! 분위기가 이상야릇해졌다. 앞서 말한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하게 웃겨서 사진에 저장해 가끔 보면 힐링 되겠다 싶었다. 가만히 듣고 계셨던 작은아버지까지 조용히 합세하신다. 당신도 몇 년 전부터 밥하고 국을 끓여 드신다나.

 

시금치로 대변되는 시댁 식구들로 자유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나는 그를 위한 주방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실천 휴머니즘으로 스스로 챙겨 먹고 있다. 가끔 짠해 보여 없는 솜씨를 부린 끼니를 제공하면 눈이 글썽글썽하는 듯하다. 시, 시, 시 자로 시작하는 말은 시금치, 시선, 시인, 시간 등이 있다. ‘시’ 자로 시작하는 시댁도 좋아한다. 

 

눈치 없게 핵폭탄을 터트리는 전쟁과도 같은 생활 속에서도 포탄을 막아주는 눈치 빠른 이가 있기 때문이다. 뒤에서 얻어맞고 앞에서 치료받는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 와중에 나는 운이 좋은 것 같다. 얻어맞기만 하고 치료받지 못하는 이가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시난고난한 일상에서 누구나 작고 큰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다. 과거 그 십자가에 얽매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적이 있다. 내려놓기까지는 정서의 높은 파고를 온몸으로 맞아야만 했다. 그 수련에도 불구하고 여태 내려놓지 못한 최후의 보루가 있다. 시댁에서 조금도 힘을 보태주지 않았다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전우애로 나의 정서를 돌봄 하지 않았나 싶다. 

 

때론 채찍질로 다 그렇게 산다고 질책하고, 때론 힘들지 않냐고 따뜻한 손으로 등을 쓸어주었다. 그니 보다 어쩌면 시금치와 더 돈독한 관계로 성장하지 않았나 술회해 본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코스미안상 수상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당선

환경문학대상
직지 콘텐츠 수상 등

시산맥 웹진 운영위원
한국수필가협회원
예술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sylvie70@naver.com

 

작성 2024.05.01 10:17 수정 2024.05.0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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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