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간세설]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이태상

 


연암 박지원(1737-1805)은 그의 열하일기에서 깊은 밤 강 건너며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초월하는 경험을 적었다. 이를 고전평론가 고미숙 박사(고려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래와 같다.

 

열하로 들어서기 직전,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 절대 절명의 순간을 맞이한다. 나 이제야 도()를 알았도다. 명심(冥心)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무디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여기서 명심이란 분별망상의 허황한 불빛이 꺼진 평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물과 땅, 물과 몸, 물과 마음, 외물과 주체 사이에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의 그것이다. 그러자 생과 사의 경계도 홀연 사라지고 말았다.”

 

몇 년 전 영국에서 실험을 했다. 수중 분만 말고도 갓 태어난 영아를 목욕물에 넣으니 가라앉지 않고 뜨더란다. 전적으로 몸을 물에 맡긴 결과이리라. 7년 전 83세로 타계하신 누님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LA에 사시던 나보다 일곱 살 위의 누님께서 편찮으시다고 해 병문안 갔다가 그날 밤 꿈에 새 한 마리가 방밖으로 날아가는 것을 봤는데 그 다음 날 세상을 떠나셨다. 강한 진통제 모르핀 주사를 맞으며 간신히 숨을 쉬시다가 숨이 멈추는 순간 더할 수 없이 평화롭게 잠든 애기의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20여 년 전 94세로 돌아가신 어머님의 얼굴과 꼭 같아지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 모두 어린애로 태어났다가 어린애로 돌아가는 우리의 참모습 아닐까.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네 살짜리 외손녀가 외할머니와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사랑해. 참말이야. (I love you. True story.)’ 이 아이처럼 우리 모두 사랑하리라. 참말로.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삶도 죽음도, 하늘도 땅도, 빛도 그림자도.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하리라.’ 퇴계 이황(1501-70)의 시구처럼 말이다.

 

인생예술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이 물음에 ()를 닦는 것이라고 나는 답하고 싶다. 그 실례 하나 들어보리라.

 

나에게는 괴짜 형님이 한 분 있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위인 이 형님은 일정시대 평안북도 신의주고보를 다니다 말고 스스로 도 닦는 길에 나서 팔도강산 방방곡곡으로 여러 스승을 찾아다녔다. 깊은 산 굴속에 들어가 단식 아니면 생식을 하면서 여러 날 여러 밤 묵상에 잠기기도 하고 방랑하는 김삿갓처럼 떠돌아다니면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기도 했다. 그가 처방하는 약이래야 별 것도 아니었다. 폐병이나 해수병 환자에게는 솔잎을 뜯어다 꿀물에 담가 항아리에 보름쯤 뒀다가 그 쩌르르 사이다 같은 물을 공복에 마시게 했다.

 

이런 약을 써서 병이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그가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고 환자 자신이 고치는 것이라 했다. 그가 처방해주는 약재의 효험을 믿는 사람에게는 약효가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효력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 몸은 자연치유가 가능한 자구력(自救力)을 갖고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손가락을 베이면 피가 좀 나다 저절로 아물지 않느냐며 그 어떤 의사도 어느 누구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고 환자 스스로 고치도록 좀 도와줄 수 있을 뿐이라 했다.

 

다른 사람들한테서는 도사님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홀어머니와 우리 형제들 눈에는 집안 망신이나 시키는 미친놈일 뿐이었다. 장발에다 거지처럼 누더기 옷을 걸치고 가끔 집에 들르면 동네가 창피하다고 어머니는 야단이셨다. 정신 좀 차라고 농사나 지으면서 제발 사람답게 살아보라고 논밭전지 다 주고 장가까지 보냈으나 농사일은 새색시에게 맡기고 여전히 떠돌이 신세였다. 그야말로 예수가 말한 것 같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형이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서 도만 닦는다는 핑계로 그렇게 산다는 것이었다. 하기는 신부 목사 중들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남들은 다 애써 일하며 땀 흘려 벌어먹고 사는데 저들은 쉽게 입으로 하나님 예수 석가모니 이름이나 부르면서 기도나 염불 팔아먹고 사는 셈이니까.

 

어머님 말씀에 세뇌되어서였는지 나도 이 형님을 사람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간혹 만나는 기회에 그의 도깨비 같은 소리에 흥미를 조금은 갖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하루는 이 도깨비 같은 형님보고 축지법(縮地法)이란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형님은 나를 조그만 시냇가로 데리고 갔다. 냇물 폭이 2미터도 넘어 보였다.

 

태상아, 너 이 냇물 건너 뛸 수 있겠니형님이 물으셨다. 못 한다고 대답하자 형님이 나를 데리고 같이 냇가로부터 뒷걸음하다 보니 냇물 폭이 점점 좁혀졌다. 그러다 그 폭이 아주 없어진 듯 물줄기가 하나의 은빛선처럼 보이는 지점까지 가서 또 형님이 물으셨다. ‘너 저 선은 뛰어 넘을 수 있지.’ 물론이라고 내가 대답하자 그럼 됐다. 네 머릿속에 저 하얀 선을 고정시키고 그 선만 보면서 물가로 달려가다 뛰어 넘겨라. 물가에 가까이 갈 때 네 눈에 냇물 폭이 점점 다시 넓어지는 것을 보지 말고 네 머릿속에 박힌 그 선만 보거라.’ 그 당시에는 형님의 말씀이 터무니없이 엉터리 같아 나는 시키는 대로 해보지도 않았다. 훗날에 와서 생각해보니 형님이 하신 말씀에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도 한 가지 정말 이상한 것은 한국전쟁이 나기 꼭 일 년 전에 형님이 집에 들러 일 년 후에 큰 난리가 날 터이니 양식을 좀 미리 땅속에 묻어두라고 했다. 어머니는 미친 놈 미친 소리 한다고 형을 나무라신 끝에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양식을 준비했다가 전쟁 때 양식 걱정을 안 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불가사의한 것은 우리 가족이 1972년 한국을 떠나 영국에 가 살다가 어느 날 밤 꿈에 형님을 보았다. 꿈에서도 생시처럼 온다 간다 말없이 형님은 왔다 가셨다. 그런 꿈을 꾼 다음 날 형님의 부고를 받았다. 꿈에 작별인사 하러 형님이 나타나셨지 않았을까.

 

죽음의 사자(使者)가 찾아오면 그에게 무엇을 대접할까?’ 이와 같은 물음에 인도의 시인 라반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는 대답한다. ‘내 삶의 진수성찬을 내놓으리라.’

 






편집부 기자
작성 2019.10.31 13:08 수정 2019.10.31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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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