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양양 낙산사





양양 낙산사

 

그때, 사월이었다. 춤추는 불을 보았다. 불은 아름다웠다. 활활, 훨훨 타오르는 불은 천상의 여인이 온몸에 붉은 생리혈을 두르고 황홀경에 빠져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사월, 불의 춤을 볼 수밖에 없었던 잔인한 사월이었다. 불의 제전은 사월의 낙산사를 삼키고 있었다. 그날 이천오 년 사월 육일의 낙산사는 그렇게 춤추는 불의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잔인한 사월과 아름다운 불 사이의 낙산사를 나는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필 나는 그날 춤추는 불의 아름다움을 기억해야 했을까. 인간과 문명은 서로를 의지해서 붙들고 일어난다. 나는 그것의 증명을 낙산사를 태웠던 사월의 불에게서 알 것 같았다. 춤추는 불과 인간의 문명 사이는 그래서 참혹한 아름다움이다. 낙산사에서 아름다웠던 불은 나와 세상, 세상과 우주를 잇는 인드라망이었다. 그랬다. 사월이, 사람이, 동물이, 산이, 낙산사가 촘촘한 그물처럼 서로 얽혀 있어서 우리는 모두 마음이 아팠다. 아파서 춤추는 불이 아름다웠다. 불은 플러스다. 처음부터 완전한 플러스다. 불의 그 완전한 에너지는 마침내 낙산사에서 아름다움의 소실점을 찾아 스스로 진보했다. 엘리엇이 말한 잔인한 사월에 말이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알뿌리로 작은 생명을 키웠으니

 

다시, 낙엽이 지고 있었다. 그해 잔인한 사월로부터 열한번의 사월이 지났고 나는 낙엽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낙산사를 찾아왔다. 엘리엇이 말한 것처럼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듯 낙산사는 죽은 소나무에서 살아난 푸른 잎들이 가을을 담고 있었다. 생명은 질기고 질긴 플러스다. 불완전을 극복하고 완전으로 향하는 진리다. 소멸을 통해 다시 태어난 낙산사의 생명들은 그래서 찬란했다. 나는 유독 가을을 사랑해서 낙산사를 찾아왔는지 모른다. 나처럼 사랑에 대해 조금 아는 것은 위험한 것임을 반성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말하려는 간지러운 입을 닫고 그냥 낙산사 부처님을 한없이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천십육 년 가을에 낙산사에서 생각했다. 아름다움에 덴 상처를 안고 가을은 낙산사에서 더 깊어가고 동쪽바다는 낙산사를 향해 끝없이 파도를 밀어내고 있었다. 의상대 난간에 기대 먼 바다 끝 태평양을 바라보았다. 깊어가는 가을에 나는 강원도를 떠돌다가 양양 낙산사까지 찾아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또 바빠서 이렇게 저렇게 정신머리 없이 보낸 가을이 못내 아쉬웠다. 서울에 몸 붙이고 사는 내게 낙산사는 늘 동쪽의 끝이었다. 동쪽의 끝은 언제나 피안과 닿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동쪽을 향해 무작정 떠났던 스무 살 무렵의 나는 아직도 낙산사에 있었다. 스무 살 무렵의 나와 오십 살 후반의 나는 낙산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생의 가을은 낙산사를 닮고 싶었다. 어스름이 지는 바다 빛을 안고 무심한 마당을 건너 원통보전으로 걸어가던 노스님의 뒷모습 같이 그렇게 낙산사를 닮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유달리 낙산사를 사모했다. 무작정 떠나왔던 스무 살 무렵, 낙산사의 저녁은 잊을 수 없는 풍경으로 각인되었다. 그 각인된 공허의 틈을 비집고 자라난 그리움은 지천명의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 고맙다. 고마운 기억이다. 가을에게 점령당한 낙산사에서 이제 나는 봄을 재촉하지 않아도 될 나이에 접어들었다. 서울에 묶인 몸을 탓하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은 시절에 당도했다. 그래서 고맙다.

 

날은 흐렸고 바람은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았다. 낙산사에 옮겨 심은 소나무들은 뿌리를 다 내렸는지 불어대는 바람에게 몸을 맡기고 흔들흔들 거렸다. 생각해보니 바람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설악산에서 불어오는 것 같았다. 잃은 방향을 어찌 알수 있겠는가마는 나는 바람의 방향이 설악산일거라고 믿었다. 내 믿음의 근거는 단순했다. 바람 속에선 은비령에서 산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을 이치를 알고 싶어 하는 어느 아름다운이의 향기가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순전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천사백 여 년 전 의상도 아마 나처럼 설악을 사모하여 낙산사를 지었는지 모른다. 관음보살을 부르며 가을도 사모했을 것이다. 나처럼 말이다.

 

나는 서울의 근심 따위는 다 잊고 낙산사의 가을과 대적했다. 가을 낙산사는 바람, 바다, 흐린 하늘,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나무들, 새로 지은 건물들, 새로 만들 길, 관광 온 무리들, 절실함을 부려 놓고 기도하는 아낙네, 시끄럽게 떠드는 아저씨들, 표정 없는 관리인, 잿빛 장삼 자락을 날리며 바삐 걸어가는 스님이 풍경 속에서 풍경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도 풍경이 되었다.

 

설명해 무엇 하랴, 천년의 시간을 말해 또 무엇 하랴. 애틋하고 그리운 소실점 끝에 서 있는 노승의 그림자처럼 그렇게 있는 낙산사에서 나는 가을이 되어 있었다. 아니다. 내가 되어 있었다.

 






전승선 기자
작성 2019.12.16 10:16 수정 2019.12.16 10:18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전승선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