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광기가 불러주는 것을 이성이 받아 적은 것

 

알베르 까뮈의 속삭임은 오독된 내 운명 속에 웅크린 불온한 문학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내 문학은 언제나 불온했고 내 가난은 문학의 노예가 되어 유목민처럼 운명의 바깥을 떠돌았다. 나는 불꽃에 매혹되어 뛰어드는 나방처럼 광기를 찬양하지도 못했고 영혼의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샘물 같은 이성에 도발하지도 못했다. 나의 언어는 내안에서 방관자로 남아 수난을 겪으며 싸리꽃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시정잡배가 되어가고 있었다. 밥벌이의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길들여지며 결핍이라는 유령과 공존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있었다.

 

삼월, 봄은 무디게 찾아왔다. 봄인지 겨울인지 모를 모호한 삼월은 벗어버린 두터운 외투를 다시 걸치게 했다. 나는 다시 걸친 외투에 손을 찔러 넣고 을지로 3만선에 앉아 술을 마셔대며 광기가 불러주는 것을 이성으로 받아 적으려고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술의 힘은 광기와 이성 사이에서 팽팽하게 줄을 잡아당기다가 한순간에 툭 끊어트리고는 허공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뿐이었다. 나의 술은 광기의 도취 없이 분리되고 나의 봄은 속절없이 무뎠다. 나는 봄의 전령이 내 영혼에 당도하기 전에 떠나고 싶었다. 아직도 내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겨울의 한기를 털어내며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떠나고 싶어 안달할 때마다 앙코르와트를 떠올렸었다. 나는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 여행가가 되었을 것이다. 나약한 낭만주의의 옷을 걸치고 집시처럼 떠돌면서 어딘가의 피안을 찾아 욕망의 통로를 만들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여행이 수행임을, 수행이 곧 여행임을 안다. 나는 여행의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다. 내게 여행은 자연탐구이며 영혼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감옥에 갇힌 나를 해방시키는 비밀번호다. 그 비밀번호의 첫 자리는 언제나 앙코르와트였다. 마치 알 수 없는 그리움의 너머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위로이며 격려인지 모른다.

 

자정을 지나 캄보디아 시엠립에 도착했다. 온몸으로 기어들어오는 더운 열기를 털어내며 호텔에 여정을 풀고 낯선 나라의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순전히 더위 때문이라고 아침까지 혼자 우겨댔지만 큰 눈을 깜빡이며 원달러를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서야 나는 내 선험적 검증의 오류를 부끄러워해야 했다. 이 순연하고 순진한 캄보디아인들의 땅은 나 같은 시장잡배들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생존을 짓누르고 있는 그들의 시련은 지독한 허무주의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들의 고요한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아있음의 눈빛은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역사의 퇴적층이 되어버린 크메르인들처럼 말이다.

 


 

해가 익기 전에 앙코르와트에 도착했다. 멈춘 시간의 초침에 누워 있는 것 같은 사원으로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고 있었다. 밀림의 아침 햇살은 갓 구운 빵처럼 따끈따끈하고 어찌나 말랑말랑한지 나는 입 안 가득 햇살을 넣고 오물오물 거렸다. 아마 천 년 전 크메르인들도 이 밀림에서 나처럼 아침햇살을 맛있게 먹으며 산스크리트어와 크메르어로 수준 높은 그들만의 문명을 창조했을 것이다. 나는 사원을 거닐며 우주 속으로 사라져간 크메르인들을 만나러 시간 밖을 서성였다. 저 웅장한 돌의 영혼이 그들이었을까. 한 땀 한 땀 새겨 넣은 부처의 조각이 그들이었을까. 시간만이 영원한 순례자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햇살은 나직이 내리고 있었다.

 

캄보디아의 얼굴인 앙코르와트는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미얀마의 바간과 세계 3대 불교유적지로 꼽히는데 왕의 도시를 뜻하는 앙코르와 사원을 뜻하는 와트가 합쳐진 말이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을 상징하는 중앙 탑과 주변의 봉우리를 상징하는 4개의 탑, 그리고 세상의 끝자락을 상징하는 외곽벽이 있고 바다를 상징하는 해자가 앙코르와트를 사면으로 둘러싸고 있다. 12세기 초 수리야바르만 2세가 세울 당시에는 바라문교 사원이었지만 자야바르만 4세 때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여지면서 소승불교 사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15세기에 크메르왕조는 완전한 멸망을 하게 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밀림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천년의 꿈속에 잠들어 있던 앙코르와트는 1860년에 서양인에 의해 발견되면서 천년의 잠에서 깨어나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게 된다.

 

공산혁명을 꿈꾸었던 폴 포트에 의해 킬링필드의 대학살이 자행되었던 불운한 캄보디아인들에게 앙코르와트는 자존심의 회복이며 정신적 치유의 장이다. 허무주의에 깔린 고통의 축제를 받아들이는 그들에게서 나는 부처를 보았다.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하루하루 살아내는 남루한 캄보디아인은 정작 담담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건네는데 나는 우주를 품어 안고 관능으로 흐르는 앙코르와트의 파란 하늘만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내 마음 속에서 요동치는 알 수 없는 생각들이 서로 뒤엉키며 나오는 출구를 잃어버리고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고요히 누워 있는 부처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삼월, 여행으로 완성된 수행이다. 앙코르와트 부처의 미소가 내게 그렇게 속삭였다. 봄의 전령이 여기까지 따라와 내 몸속 곳곳에 스며들며 따뜻한 기운을 북돋아 주는데 나는 내 치졸한 삼월의 광기를 변명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만두길 잘했다. 여기 앙코르와트에서는 부처 같은 미소 하나로 족하다. 정말 그렇다. 나는 돌아가 다시 언어의 집을 지을 수 있을지 모른다. 지리멸렬한 문학 안에서 시의 탑을 쌓으며 오랫동안 행복해할지 모른다. 여행이 수행인 것처럼 말이다.









전승선 기자
작성 2020.01.06 09:28 수정 2020.01.06 09:29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전승선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