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경자년(庚子年) 새해 등태백산(登太白山)



한반도 등줄기 역할을 하는 백두대간의 머리가 되는 산이 백두산이라면, 대간의 13정맥을 비롯한 많은 기맥과 지맥들, 그리고 열 개의 큰 강을 비롯한 수많은 강줄기들을 품어 생명의 터전이 되어준 곳이 바로 태백산이다.


이런 의미를 담아 2020년 경자년 새해의 첫 산행지는 태백산이다. 하늘의 뜻과 자연의 가르침에 맞는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마음을 다짐하는 산행이다.



태백산 장군봉에서 영봉 가는 백두대간




햇살이 푸른 1, 태백산에 눈이 오기를 20여일이나 학수고대하다가 구정 이틀 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태백산을 향해 출발한다. 눈이 별로 없는데도 태백산 눈꽃축제에 수십만 인파로 번잡했던 당골광장에는 인기척은 사라지고 눈과 얼음 조각들만이 광장을 메우고 있다.

 

겨울 산에 들어서자 수목과 잡초, 산짐승과 미물조차 삼매의 경지에 든 듯 조용하다. 봉우리는 아득하고 눈길을 한 발 한 발 무심하게 걷는다. 계곡 왼쪽 응달에는 껑충 큰 이깔나무들이 눈꽃을 피운 채 서있다. 바람이 지나가자 나무에 달린 눈꽃들이 우수수 흩날린다.

 

반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신작로처럼 넓어지고 경사가 조금씩 급해진다. 크고 작은 온갖 산들의 어머니인 태백산은 굵은 뼈는 살집에 숨긴 두툼한 육산(肉山)이다. 마치 부잣집 맏며느리처럼 후덕하다.

 

시야가 탁 트이고 햇살 투명한 양명한 곳이니 어찌 암자가 깃들이지 않을까. 정상 바로 아래 해발 1,470m에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망경사가 있다. 절 입구에 있는 '용정(龍井)'은 고지대에서 솟아나는 샘으로, 국내 100대 명수 중 가장 차고 물맛이 좋다.

 

용정의 샘물은 옛날부터 천제에 올리는 제수(祭水)로 사용되고 있다.
망경사의 문수보살은 바로 앞에 있는 문수봉을 바라보고 있다.

 

 

망경사 위에 태백산 산신 단종대왕을 모신 단종비각이 있다. 비에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비(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碑)'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 단종은 죽어서 태백산 산신, 조카인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쿠데타를 모의한 금성대군은 소백산 산신이 된다.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고 산신령으로 모시는 제를 음력 9월 3일에 지내고 있다.




이윽고 민족의 영산(靈山)’ 태백산 정상에 오른다. 잔설만 남았지만 하늘은 청자처럼 푸르고 탱탱하다. 대간 능선에 올라서니 함백산, 금대봉, 은대봉, 두타산, 매봉산, 구룡산, 면산, 백병산, 응봉산 등 굵직한 봉우리들이 태백산을 빙 에둘러 서 있고, 바로 앞 함백산과 매봉산의 풍력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태백산은 정상인 영봉(1,560m)을 중심으로 북쪽은 장군봉, 남쪽은 문수봉, 영봉과 문수봉 사이에 부쇠봉으로 이어져있다. 정상 주위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천제단이 3곳이나 있다. 가운데 영봉에는 하늘에 제를 올리는 천왕단, 북쪽에는 사람에 제를 올리는 장군단, 남쪽에는 땅에 제를 올리는 하단이 있다. 따라서 태백산은 하늘과 땅, 사람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우리 민족의 세계관을 그대로 담고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로운 삶이란 바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인 삼재(三才)사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태백산은 높되 험하지 않고, 웅장하면서도 그 품이 아늑하다.

 


태백산은 대체로 '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의 '한밝뫼' 또는 '한밝달'을 소리 옮김과 뜻 옮김하여 혼용 표기한 것으로 해석한다. '한밝달''한백달‘, ’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이름이 된다.

 

동국여지승람"태백산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 지내는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 하였는데, 밝은 산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太白山)인 것이다. 그리하여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왔다. 20평가량의 천제단(天祭壇)인 천왕단(天王壇)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앞뒤 폭 8.26m3곳의 제단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천왕단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다.

 


 

석축 제단 위 중앙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한글 필체로 '한배검'이라 써서 새기고 붉게 칠한 자연석 위패가 세워져 있다. 준비한 제물을 제단에 올리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며 일행들과 함께 큰 절을 올린다.


위패로 모셔진 한배검은 대종교의 국조 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이 산에서 발원하는 물은 영남평야의 젖줄인 낙동강,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한강, 강원 삼척의 오십천 등으로 흘러들어 한반도 아래 모든 산의 모태가 된다.




 

태백산 최고봉 장군봉(1,567m).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문수봉이다.

 



백두대간을 따라 문수봉을 향해 간다. 백두대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을 품어 키운 자비심과 지혜가 깃든 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신성하고 거룩한 땅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백두대간의 머리가 되는 산의 이름이 백두산이어야만 하고, 남쪽 끝인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인 산의 이름은 지리산이어야만 했던 이유다. 백두산(白頭山)'지혜의 머리가 되는 산', 지리산(智異山)'머물면 사람 사는 세속과는 다른 종류의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이라는 의미다.



정상인 영봉에서 대간 길은 문수봉을 버리고 부쇠봉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하단(下壇)은 땅에게 제를 올리는 천제단이다.

 


 

하단을 지나서 산죽이 부드러운 눈 이불을 덮고 있는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주목들을 만난다. 태백산에서 군데군데 자라고 있는 주목은 가히 압권이다. 그 기묘한 자태는 천 년의 세월을 이겨낸 모습이다.



이 산길의 임자는 긴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주목이다.

 


 

백두대간은 발로 걷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걷는 길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제각기 신심으로 걷는 마음 길이다. 그런 마음을 품고 걷는 자만이 백두대간의 속살을 보면서 대간과 사랑을 속삭이게 되고 결국 백두대간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몸이 길을 가지만 정작 앞서가는 건 마음이다. 마음을 움직여 무소의 뿔처럼 산길을 걷다보면 부쇠봉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백두대간과 작별하고 문수봉을 향해 발길을 계속한다.

 

백두대간은 부쇠봉을 지나 깃대기봉-구룡산-도래기재로 이어진다.

 


멀리서 보면 솥뚜껑처럼 생긴 문수봉(1,517m)은 산봉우리 전체가 돌무더기로 덮여있다. 옛날 이 산봉우리의 바위로 문수보살상을 다듬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수만 개의 자갈 돌무더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눈이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상의 돌탑 너머로 망경사와 마루금을 잇는 능선의 멋진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문수봉에서 당골로 내려서는 하산 길은 가파른 경사길이다. 벌거벗은 숲 사이로 난 가파르게 이어진 한줄기 산길을 타고 내려오는데 발걸음이 무겁다. 야릇하도록 쓸쓸한 정취 속에서 몸이 고단하니 오히려 영혼은 맑아진다.

 

겨울 산은 텅 비어있다. 계곡에 쌓인 눈이 한 점 새소리마저 흡입한 탓인가. 산속은 적막이 가득하다. 계곡의 물길은 꽁꽁 언 얼음장으로 변한 채 흐르는 소리조차 기척하지 않는다. 산자락은 이미 산그늘이 접혀 먹물이 번진 듯 사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언제 내린 눈일까. 촛농처럼 엉긴 잔설이 산을 포근히 껴안는다.

 

당골광장 석탄박물관 앞에 있는 근재 안축(謹齋 安軸)'登太白山(등태백산)' 시비에서 발길을 잠시 멈춘다.

오늘 태백산 신년 산행의 감흥을 잊지 않기 위해 고려 말기에 문명을 드날린 안축의 칠언율시를 따라 읽어 본다.

 

一丸白日低頭上 둥그렇고 밝은 해가 머리 위에 나직하고

四面群山落眼前 사면의 뭇 산들이 눈앞에 내려앉았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1.24 12:38 수정 2020.01.2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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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