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두륜산 대흥사




두륜산 대흥사

 

며칠을 떠돌았다. 길 위에 여정을 부려놓고 퍼질러 앉아 막걸릿잔을 기울이고 싶은 진도에서 바다를 보았다. 바다, 막막하다. 여름바다는 공허하고 막막해서 눈 둘 곳이 없다. 지상의 문들이 모두 닫히면 바다의 문이 열릴까. 여름바다에는 모래알갱이와 한패가 되어 격렬하게 부서지는 파도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지만 나는 멀뚱하게 바다만 바라보다가 해남으로 다시 길을 잡았다. 바다와 나 사이처럼 일과 여행 사이의 간극을 실패하지 않기 위해 진도에서의 출장을 후딱 해치우고 다시 떠돌았다.

 

여행, 고질적인 병이다. 고독의 뒷문으로 슬며시 빠져나가서 세상 밖을 엿보다가 휑하니 파인 눈을 감추고 들어오는 아주 몹쓸 병이다. 그 고질적이고 몹쓸 병을 사랑한 나는 떠나면서 고독했고 돌아오면서 쓸쓸했다. 고독이라는 따뜻한 유목의 숨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나는 그래서 떠나고 돌아오고를 반복하면서도 행복해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매일 떠나고 매일 돌아온다. 그렇게 내 안 어딘가를 유목하는 방랑자인지 모른다. 마르고 시든 감정의 사막을 지나 푸른 초원의 심장을 찾아 떠나듯이 나는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삶이라는 대지를 건너고 있는지 모른다.

 

진도에서의 출장을 마치고 습관처럼 이리저리 떠돌았다. 이름도 모를 어촌 마을의 바다를 지겹도록 보다가 어느 허름한 식당에 앉아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삶의 언저리를 갉아먹은 기억의 잔해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여행에서 기억의 잔해들은 때론 성가신 긴 머리카락처럼 인생의 구석에 핀 곰팡이를 덮어 주기도 한다. 시큼한 김치 한 조각에 막걸리 한잔을 울컥 울컥 넘기면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미련한지 깨닫게 된다. 그래, 나는 안다. 바다는 나를 품지 않는다. 내가 바다가 될 때 비로소 바다는 나를 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바다로 떠나왔고 돌아갈 때도 바다를 가져와 책상 서랍에 넣어두곤 했다.

 

나는 바다와 바다를 달려 해남으로 들어왔다. 누가 해남을 땅끝마을이라고 했던가. 해남은 땅시작마을이다. 한반도가 시작되는 희망의 땅 해남에서 생명의 기운으로 둘러싸인 두륜산에 닿았다. 소백산맥 끝자락에서 다시 남해 해안산맥으로 달려와 해남반도에 머물러 우뚝 솟아오른 두륜산은 사계절이 다 좋지만 나는 특히 푸름이 아름다운 여름 두륜산을 사랑한다. 여름비에 촉촉이 젖은 두륜산의 녹음은 바다를 뛰쳐나가려는 파도처럼 폭발하는 에너지가 있어서 좋다. 그 녹음 속에서 천년을 앉아 있는 대흥사로 자연히 발걸음이 옮겨졌다.

 

여러 번 왔던 대흥사지만 칠월의 대흥사는 처음이다. 지구를 디자인한 설계자가 있다면 아마 대흥사의 두륜산을 특별히 사랑했을 것이다. 마치 엄마의 자궁 속 같은 편안함이 두륜산에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꾸 끌리는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다. 서산대사도 말하지 않았던가. 두륜산은 병란이나 삼재가 미치지 않는 유일한 땅이며, 만년을 지나도록 일그러지지 않을 곳이라고 했다.

 

그런 두륜산에 기대앉은 대흥사는 정조 때 강진으로 유배 온 정약용을 스승으로 모신 초의선사가 머물며 수행했던 곳이다. 차를 사랑했던 초의선사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펼치며 다도의 이론을 정립했는데 추사 김정희가 유배되었던 제주도로 달려가 추사와 애틋한 정을 나누기도 했다. 대흥사를 오가던 선비화가 허련이 초의선사를 위해 남긴 시는 두륜산과 대흥사의 아름다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가 머무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 아래다.

소나무 숲이 깊고 대나무 무성한 곳에

몇 칸의 초실을 얽었다.

늘어진 버들이 처마에 닿았고

풀꽃이 섬돌에 가득 차서 그늘이 뒤엉켜 있다

뜰 가운데는 아래위로 못을 파고

처마 아래에는 크고 작은 물통을 두었는데

대쪽을 연결해 멀리서 구름 비친 샘물을 끌어온다.

눈에 걸리는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멋있는 산봉우리가 석양 하늘에 더 잘 보인다.

 

칠월의 녹음에 취하고 초의선사의 다도에 취해 대흥사 경내를 하염없이 걷는데 하늘에서 오락가락 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대흥사는 두륜산에 갇히고 나는 대흥사에 갇혀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렴 어떠랴. 여름은 길고 인생은 짧은데 갇힌 대흥사에서 눌러살까보다. 그러다 보면 성불이라도 하지 않을까. 심심하고 지루한 세상, 떠나온 길도 돌아갈 길도 다 내 마음 안에 있지 않던가. 나는 받쳐 든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세며 어린아이처럼 경내를 싸돌아다녔다.

 

맑게 씻긴 대흥사를 두고 떠나오기 섭섭해 절 밑에 있는 주막에 들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시원하게 흐르는 금당천 다리 아래 상을 펴주며 파전에 막걸리 한 병을 내왔다. 나는 두륜산을 휘감고 내려오는 금당천의 물과 한 몸이 된 것처럼 들떠서 아롱아롱 막걸리를 마셔댔다. 저잣거리의 탕자인 나는 붓다극락 불신지옥이라 해도 나를 유혹하는 막걸리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막걸리는 두륜산을 사랑하는 방법이며 내 나약한 여행의 끝을 장식하는 전리품인 것이다. 그날, 차 안에서 밤새 끙끙 앓으며 들어갔던 막걸리는 다시 토해냈다. 그런 내게 대흥사 부처님이 가만히 말한다.

 

너 혼자 먹으니까 그렇지…….

 








전승선 기자
작성 2020.01.27 10:30 수정 2020.01.2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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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