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설악산 신흥사




설악산 신흥사

 

 

어쩔 수 있이, 싫밍아웃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마음이다. 마음은 유전되지 않는다. 마음은 오로지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에너지뿐이다. 마음은 완벽한 자기원본이다. 마음은 하나의 우주다. 그 하나의 우주를 경영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제 막 삼십 줄에 들어선 딸의 싫밍아웃을 듣고 몹시도 놀랐지만 내색할 수 없어 혼자 끙끙 앓았다.

 

싫음이 당당한 시대다. 싫음은 극복할 있지만 극복하기 싫은 것이 싫밍아웃이다. 숙명도 싫음으로 극복하는 요즘 세대의 발상을 이해하고 나니 싫밍아웃이란 신조어가 이해됐다. 결혼과 자유 사이에서 방황하던 딸의 싫밍아웃선언을 나는 핸드폰 너머로 들으며 딸이 선택한 싫존주의를 존중하기로 했다. 싫밍아웃은 딸이 했는데 좌절은 내가 했다.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세대 간 간극이다.

 

우리는 덧없는 인생이라고 말버릇처럼 입에 달고 사는데 요즘 세대는 제멋에 겨운 덧있는 인생을 산다. 부럽다. 그런 젊은 세대에게 영혼이 없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안달복달하는 우리가 영혼이 없다. 존재의 자유, 인생의 자유,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그들의 눈부신 젊음이 부러울 뿐이다. 지리멸렬함 따위에게 함락당하지 않는 당당한 생각의 창조가 놀랍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확행을 나도 배우고 싶다. 맞다. 소설은 은유지만 인생은 직유다. 망설이면 지는 것이다. 후회하면 의미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의미 없는 삶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는 쓸데없는 인생 자부심을 부렸나보다. 태어났으니 살았고 살았으니 끝까지 가보는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다람쥐 쳇바퀴를 지금도 돌리고 있지 않나 반성한다.

 

이월에 딸과 나는 동해로 떠났다. 서먹한 감정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을 하고 정동진으로 강릉으로 설악산으로 돌아다녔다. 살갑지 못한 나는 딸의 싫밍아웃을 받아들였지만 실은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떠나온 여행에서 알았다. 이월의 우리여행은 참 서먹했고 떨떠름했다. 바다가 산이 그런 우리를 맘껏 품어주지 않았다면 서로에서 우리는 더 서운했을 것이다.

 

바다와 나란히 있는 정동진의 기차레일 앞에서 어색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일도 하고 강릉호수를 배경으로 겨울풍경을 사진 속에 밀어 넣는 일도 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갔다. 아니다. 우린 애초에 열 마음의 문 같은 건 없었는지 모른다. 없는 문을 만들어 낸 이기적인 나를 반성해야 했다. 그렇게 나를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바다가 보이고 산이 보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딸과 아름답게 눈부신 설악산에서 우리는 무심하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마루에 올랐다. 우리보다 더 무심하게 흐르는 산맥이 시간이라는 바람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 세상은 넓은데 생각은 이토록 좁디좁은 마음 안에다 가둬 놓았던가. 스스로 들여다보는 마음 안의 나는 옹졸하고 상투적이었다. 그래서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론 웃음이 났다. 한바탕 웃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올라갈 때 못 본 풍경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설악산 산마루에서 내려와 나는 신흥사로 발길을 돌렸다. 쭈뼛쭈뼛 따라오던 딸은 입구에 앉아 누군가에게 열심히 카톡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대웅전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합장했다. 불현 듯 나도 부처님 앞에서 싫밍아웃을 하고 싶었다. 주어 없는 싫밍아웃을 생각하는 동안 부처님은 홀로 웃고 있는데 나도 부처님을 따라 웃고 말았다. 웃음은 바이러스처럼 전염이 되는 모양이다. 부처님이 웃고 나도 웃고 설악산도 웃는 것 같았다.

 

빼어난 설악산 초입에 앉아있는 신라의 절 신흥사의 이월은 따뜻했다. 바람도 따뜻하고 마음도 따뜻했다. 모든 현상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말을 나는 믿은 지 오래다. 그렇다. 다 마음의 작용이다. ‘싫밍아웃이라는 신조어를 안 것도, 신흥사에 온 것도 마음작용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랑의 다른 말을 빌려 딸에게 주고 싶은 것도 신흥사에 와서 겨우 알았다. 사랑의 다른 말을 찾는 나는 아직도 촌스러운 세대의 어머니이만 그래도 좋다. 신흥사 대웅전 부처님도 나처럼 촌스러운 것 같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꾹꾹 눌러 담고 대웅전을 나와 경내를 돌았다.

 

봄에는 봄처럼 아름답고 여름에는 여름처럼 시원하고 가을에는 가을처럼 고독하고 겨울에는 겨울처럼 고요한 설악산에 참 많이도 왔었지만 신흥사 부처님께 인사드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천 년 전 자장과 의상의 숨결이 신흥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터이지만 어리석은 나는 아직 그 숨결을 느끼지 못하고 이월의 따스한 햇살과 바람만이 부드럽게 나를 휘감아 주었을 뿐이다. 아니다 햇살과 바람이 그들이었을 것이다. 설악산이 그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사랑이여 멈추지 마라.

 


전승선 기자 poet1961@hanmail.net






전승선 기자
작성 2020.03.02 11:04 수정 2020.09.1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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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