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진달래의 애심곡

진달래꽃, 그 봄을 기다리면서

유도순·유일·김선초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경칩(驚蟄)이 지나갔다. 선들선들 알싸한 꽃샘바람이 귀밑을 간지럽힌다. 먼 곳 님의 향취가 실려 온다. 야트막한 뒷산 자락 소나무 아래 진달래가 꽃 몽우리를 아물고 있다. 기다려진다. 환하게 마주할 몇 날 뒤의 그대 모습. 이런 날 입술에 아물리는 노래가 진달래 꽃노래다. 일본 제국주위 식민지 24년 차, 1934년에 불려 진 김선초의 <진달래 애심곡>.

 

<진달래의 애심곡>은 콜럼비아레코드 음반 앨범번호 40483에 임헌익의 <나무꾼>과 같이 실린 곡조다. 애심곡(哀心曲)은 슬픈 마음을 읊은 노래. 1931<아내의 무덤>, <애달픈 밤>을 강석연(1914~2001)과 같이 취입하며 데뷔한 김선초가 불렀다. 그녀는 1931~1935년까지 콜럼비아레코드와 시에론레코드에서 50여 곡을 남겼으며, 기간 중 발표한 노래가 <진달래의 애심곡>이다.

 

진달래꽃 필 때에 오신다던 임/ 진달래 떨어져도 아니 오시네/ 기다림에 새 봄은 어느덧 가고/ 진달래 필 때마다 슬퍼 웁니다/ 진달래꽃 해마다 피는 걸 보면/ 봄마다 기다림도 맘에 새롭네/ 진달래꽃 그 봄을 헤어가면서/ 쓸쓸한 꿈을 안고 살까 합니다.(가사 전문)

     

노래 속 화자는 님과 이별을 하면서 진달래꽃 필 때에 다시 만나기로 언약을 했다. 하지만 님은 진달래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해도 오지 않는다. 그래도 화자의 마음은 희망적이다. 봄마다 맘을 다진다. 진달래꽃은 대체 어쩌자고 봄마다 다시 피는가. 대책도 없고 마련도 없는 저 연인을 어이할꼬. 이 꽃은 이름도 종류도 많다. 백색꽃이 피는 것을 흰진달래, 작은 가지와 잎에 털이 있는 것을 털진달래, 털진달래 중에서 백색 꽃이 피는 것을 흰털진달래로 부른다. 잎이 넓은 타원형 또는 원형에 가까운 것을 왕진달래, 잎에 윤기가 있고 양면에 사마귀 같은 돌기가 있는 것을 반들진달래, 열매가 가늘고 긴 것을 한라산진달래, 키가 작고 꽃도 작으며 5개의 수술이 있는 것은 제주진달래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꽃으로 삼월 삼짇날 무렵에 화전(花煎)을 만들어 먹거나 진달래술(杜鵑酒)을 담그기도 한다. 한방에서는 꽃잎이 조경(調經활혈(活血진해(鎭咳)의 약재로도 쓴다. 조선시대 중기의 관료이자 화가였던 신윤복(1758~1814)은 혜원풍속도첩(蕙園風俗圖帖)에 봄의 정경을 많이 담았는데, 특히 진달래를 자주 그렸다.

 

이 꽃은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한다. 이 꽃에 깃들어 노래하는 새를 두견새. 두견(杜鵑), 두견이 또는 두견새라고도 하는 뻐꾸기과의 새이다. 이 새가 슬피 울면서 목구멍이 터지고, 그 피가 뚝뚝 꽃잎에 떨어져서 꽃 이파리가 발갛게 되었다고 진달래꽃을 두견화라고 하는 것. 이 새는 뻐꾸기처럼 휘파람새·굴뚝새·산솔새·검은지빠귀·촉새 등의 둥지에 알을 낳은 뒤 탁란(託卵, 다른 새의 둥지에서 부화를 시킴)으로 번식을 한다. 천연기념물 제447호이고, 두우·촉우·자규·접동새 등의 이름과 혼용하는데, 학술적으로 정확한 용어는 아닌 듯하다. 이 자규(子規) 새를 소재로 충심시(忠心詩)를 읊은 선비가 고려 충혜왕(1315~1344) 때 이조년(1269~1343)이다. 그는 고려의 서울 개성에서 추방되어 임진강을 건너서 고봉현(, 일산)으로 귀양을 왔었다. 이곳에서 충혜왕을 생각하며 다정가(多情歌)를 지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11~1)인데/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김선초(金仙草)1931년 데뷔 후 1932년 고가마사오 곡 <달빛 여힌 물가>, <봄각씨>, <사의 찬미>를 출반하였다. 1934년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김안서 작시 <무심>, <봉자의 노래<, <가을색씨>를 방송했다. 주로 무대 배우로 활약했으며, <삼천리>(1933) 510호의 6대회사(콜롬비아·빅터·포리돌·시에론·오케·태평) 레코드 전에 소개되었다. 1936년 최독견(崔獨鵑, 1901~1970. 황해도 신천. 서울신문 편집국장. 본명, 최상덕. 필명, 독고성)이 각색한 <춘향전> 공연 때, 차홍녀(1919~1940, 동두천 출생이동백(1866~1949, 서천 출생) 등과 출연했으며, 콜럼비아 음반에 유행가 <강남을 가자>와 민요·영화 노래·유행만곡·유행소곡 등을 취입했다. 그녀가 취입한 희극 <팔자 없는 출세>, <월급날>은 일본 빅타 음반에 전한단다.

 

이 노래는 김소월의 시와 관련이 있다. 진달래꽃 시는 1925년 김소월 시집에 실렸으며, 19227월 개벽 25호에 발표되었다. 당시 20세였다. 스무 살이던 소월은 도대체 어떤 님과 이별을 하였을까.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릴 그를 남겨두고 떠나가신 그 님에 대한 탐구는 그 누가 대답할 이성(理性)인가. 그의 아버지는 소월이 2세이던 1904년 정주와 곽산을 잇는 철도를 부설하던 공사장에서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하여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유교정신의 이상자(理想者)이던 할아버지와 일자무식이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던 소월은 오산학교 2학년이던 191614세에 할아버지의 친구 홍명희의 딸 홍단실과 결혼하였다. 오산학교 재학 중이었다. 이때 그는 오순이라는 3세 연상 누이와 마음속의 연정을 나누고 지내던 터였단다. 3.1운동 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제고보로 편입하여 졸업하고, 1923년 일본 도쿄상대로 유학을 갔으나, 그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한다. 이후 김동인 등과 영대 문학동인 활동을 하지만, 조부의 광산사업이 실패하고 자신이 경영하던 동아일보지국도 실패하여 곤궁에 빠지자 삶에 의욕을 잃고 술만 마시다가 19341224, 32세로 요절하였다. 진달래 꽃 몽우리가 탱글거리는 산자락을 거닐면서 붉게 피어날 꽃떨기를 기다린다. 33세로 요절한 소월을 추념한다. 먼 곳에 사시는 옛님을 생각한다. 볼살에 산들바람이 상큼하다.




[유차영]

문화예술교육사

솔깃감동스토리연구원장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3.18 11:47 수정 2020.09.14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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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