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택의 사랑방 이야기] “이 지구에서 나 좀 내려줘, 제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정홍택

 

   

마구마구 소리 지르고 싶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좋은 일들은 저 밤하늘 보름달 뒤로 숨어 버린 것 같고, 청천 하늘 세계 각처에선 무섭고 더러운 사건(事件)들이 쉴새 없이 터지고 있지 않은가. 만일에 내가 외계인이라면 지구를 들여다보며 영화 구경하듯 재미가 쏠쏠할 테지만 나도 지구에 사는 점() 하나의 인생(人生)인지라 짓느니 한숨 뿐이다.

 

그런데 한여름 빙수보다 더 시원한 책을 읽었다. 그 책 제목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땐, '백 살까지 살았으면 양로원에서 곱게 살다 가실 것이지, 무얼 더 볼 게 있다고 창문까지 넘어서 도망을 치나'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내 마음속에서는 호기심이 모락모락 일어나는 것이었다. 백 세 노인이 소설의 주인공이란다. 나는 나름대로 쉬지 않고 책을 읽으며 살아왔지만 이런 파파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은 아직 본 적이 없다.

 

200552일 낮, 스웨덴의 작은 마을 양로원이 아주 떠들썩하다. 시장(市長)이 몸소 왕림하셨고 양로원 로비는 지방 신문사 기자(記者)들로 법석이다. 오늘이 <알란>이라는 노인의 <100세 생신 날>이다. 워낙 작은 촌이어서 뉴스거리 흉년에 신문사가 문 닫을 지경인데 백 세까지 산 노인의 이야기는 건강에 목숨 건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토픽임에 틀림없으렷다. 시장은 차기 선거운동용으로, 양로원 원장은 연임의 빌미로 얼마나 좋은 행사인가? 대형 케이크에 촛불 100개가 전혀 아깝지 않다.

 

그러나 정작 <알란>이라는 당사자는 기분이 영 빵점이다. 저 깐깐하고 미운 원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대중 앞에서 해야 한다는 것도 싫고, 떠들썩한 분위기에 억지로 웃으며 사진 찍을 생각 하면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도망가야겠다."

 

문밖에는 사람들로 붐빌 테니 안 되겠고, 유일한 방법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수밖에는 없다. 이제 조금 후면 생일파티가 시작된다. 드디어 알란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에라하면서 뛰어내렸다. 이어서 <> 소리!

 

무르팍이 조금 흔들렸을 뿐 아직도 걸을 수가 있다. 비록 슬리퍼를 신고 있었지만 동네 공원을 비척비척 지나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텅 빈 실내, 서너 개의 벤치는 하나같이 비어 있다. 매표구로 가서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몽땅 꺼내 역무원에게 밀어 넣었다.

 

아무 버스나 제일 먼저 오는 놈으로, 그 돈으로 갈 수 있는 데까지의 표를 주소.”

      

표를 건네받고 다시 중앙 벤치로 가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사납게 '' 친다. ‘아이쿠, 벌써 잡혔구나생각하며 올려다보니 험상궂은 젊은이가 째려 내려다보고 있다. 긴 금발머리는 기름기로 쩔어 있고, 하관은 성긴 턱수염으로 덮여 있으며, 등짝에 <네버 어게인 Never Again>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재킷을 걸친 차림새가 갱단 멤버임에 틀림없다.

 

잠깐 이 가방 좀 봐 주슈. 갖고 튈 생각은 마쇼. 대갈통이 박살 나고 싶지 않으면.”

 

그리곤 배를 잡고 화장실로 급히 뛰어간다. 깡패라도 설사에는 장사가 없는가 보다. 화장실이 너무 좁아 사람과 가방이 같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화장실 문이 닫히고 2-3분 후 버스가 스르르 도착했다. 노인은 버스에 올라탔다. 친절하게도 버스 운전사가 내려와 덩그러니 서 있는 여행가방을 번쩍 들어 버스에 실었다. 그리고 버스는 떠났다. 알란은 모른 체 잠자코 앉아 창밖 먼 산만 쳐다본다.

 

<뷔링>이라는 곳에서 버스가 섰고 알란은 내렸다. 여기가 버스표 행선지였다. 운전수는 여행가방을 내려 주고는 휑하니 가버렸다.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니 동네는커녕 집도 사람도 없는 무인지경이다. 어느덧 오후도 늦자락, 해는 높은 전나무 숲 뒤로 넘어갈 기세다. 저 멀리 장난감 같은 간이 기차 정거장 숙소가 쓰러질 듯 서 있는 게 보인다. 알란은 슬리퍼 바람에 여행용 가방을 무겁게 끌고 그리로 지척지척 걸어갔다.

 

문을 두드리니 늙수그레한 노인이 머리를 내밀더니 들어오란다. 며칠이고 사람 구경 못 하던 차에 잘 왔다고 무조건 환영이다. 자기 이름은 율리우스, 75세이고 혼자 산단다. 젊어서 사업이라고 하긴 했지만 다 날려 먹고 노숙자 신세는 싫어서 폐가가 된 이 집에 살면서 날품도 팔고 가끔 편의점에 가서 눈치 보며 슬쩍하기도 해서 먹고 산다면서 저녁 반주로 독한 술을 내온다. 독주라면 언제라도 사양하지 않는 알란이 마다할 리가 없다. 두 사람은 금세 친해진다. 알란도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런데 저 가방은 뭐요? 꽤 큰데.” 가방을 얻게 된 자초지종을 들은 율리우스는 껄껄 웃으며 그러면 당신도 도둑이네” , “아직은 아마추어 단계지알란이 응수하자 두 개의 축배의 잔이 공중에서 쨍 부딪혔다. 율리우스는 그동안 익힌 특기를 발휘해 가방 자물쇠를 쉽게 열었다. 가방이 열리자, ! 이게 웬 떡? 스웨덴 고액지폐가 다발로 차곡차곡 쌓여 가득히 들어있지 않은가. 자그마치 5000만 크로나(한국돈 84억원)였다. 둘은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기로 합의하고 또 한 번 축배!

 

한편 급한 설사를 후딱 해결하고 뛰어나온 조폭은 사방을 둘러봐도 노인과 여행 가방이 안 보인다. 현금 5000만 크로나가 설사똥 누는 동안 사라진 것이다. 내 돈도 아니고 조직의 돈인데..... 이렇게 해서 국제 조폭조직이 발칵 뒤집히고 부하들이 급히 현장으로 출동했다.

 

또 한편 무단이탈 100세 노인을 찾고 있던 동네 경찰에 난데없이 국제 조폭이 들이닥친다는 정보가 들어 왔다. 그런데 이들이 총력을 기울여 찾는 사람이 바로 슬리퍼를 신고 걸어 다니는 노인이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경찰서도 순경들과 사복형사를 보강해 본격적 노인 수색작전을 강화했다.

 

이제 알란은 단지 집 나간 노인이 아니고 거액의 현금을 가지고 튄 도둑이 된 것이다. 얼마 후 경찰서에 들어 온 제보는, 처음에 돈을 운반하던 갱이 살해되었고 노인 둘이 어디로인지 끌고 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아니, 100세와 75세 노인이 총 들고 다니는 팔팔한 국제갱을 살해해서 끌고 다닌단 말인가 이게 무슨 귀신 곡할 소린가?

 

당국은 수사의 도를 높여 전담 검사를 지명하고 경찰과 형사들을 총지휘하게 했다. 이제 알란은 잠깐 사이에 <집 나간 노인>에서 <도둑>이 되었고 곧이어 <현상 붙은 살인강도>가 되어 방방곡곡에 사진 포스터가 붙여졌고, 전국 TV에 지명수배 사진이 방송되어 나갔다. 이 뉴스를 보며 조폭 두목은 생각했다. 경찰보다 먼저 이 늙은이들을 잡아야 돈도 찾고 범죄도 카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나서야겠다. 최신 고성능 권총과 팽팽 돌아가는 두뇌를 가지고 말이다.

 

저 멀리 알란과 율리우스는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집을 나와 번갈아 돈가방을 끌고 정처 없는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정작 재미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계속 읽어 나가면서 나는 혼자 웃기도 하고, 소리 높여 박장대소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밥도 귀찮고 잠도 자기 싫다. 다음 얘기가 너무나 궁금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알란의 100세 이전의 이야기와 100세 생일 이후의 이야기로 서로 번갈아 나오게 하며 이어진다. 알란은 1905년생이다. 100세까지의 알란의 역사는 바로 20세기의 세계 역사와 그 궤도를 같이 한다. 스웨덴 작가인 요나슨은 20세기에 일어난 세계적 대 사건에 <알란>이라는 인물로 하여금 일일이 참여하게 만든다. 알란은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 장군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고 (일본 패망 후) 중국의 국공 내전 때는 모택동의 아내를 구해주기도 한다. 스탈린에게 밉보여 시베리아에 유형 생활을 하던 중 아인슈타인의 이복동생과 친우가 되었고 마침 한국전쟁이 터지자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뺨 맞으며 교육받는 김정일을 속이기도 한다. 송미령 여사, 처칠, 드골, 트루먼 대통령, 린든 B죤슨 대통령도 모두 알란의 도움을 받은 명단에 들어간다. 그런데 정작 알란은 초등학교 3학년 중퇴의 노동자 계급 출신인데 말이다.

 

알란이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잘난 사람들이다. 한 나라를 이끌기도 하고 세계의 역사를 뒤흔든 최고의 학력과 실력을 가진 승자들이다. 이 승자들이 거의 무학에 가깝지만 사람 좋은 알란에게 신세를 지기도 하고, 도움을 받아 세기적 결단을 내리게도 된다. 이 모든 이야기가 매끄럽게 무리 없이 시냇물처럼 흘러간다.

 

이렇게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에 우리가 끌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작품의 문학성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문학평론가 강유정 교수의 평론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자.

 

<알란의 행적은 전쟁으로 얼룩진 지난 백년,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20세기가 남긴 흉터의 형상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무학의 알란이 지난 한 세기 정치와 역사를 그림자처럼 움직였다는 것 자체를 우리는 뼈 있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의 허황한 삶이 진짜 역사와 부딪힐수록 우리가 지나온 역사는 농담이자 희극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허황되지만 작가는 정색하며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이래서 우리는 과장된 거짓말인 줄 알지만 책을 놓지 못하고 계속 읽으며 마음속 응어리진 현실의 불만을 카타르시스적으로 해소한다.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실력이고 역량이다.>

 

작가 요한슨도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진실만 얘기하는 엄숙한 사람은 내 얘기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폭력적 역사의 현장들을 누빈 알란은 어떻게 백 세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는 한 가지 원칙은 꼭 지키며 살았는데 그것은 15세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물려준 인생 교훈이다.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다.”

 

그는 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절대로 불평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거나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까 미리 걱정하지 말자. 지금 가진 것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그래, 그냥 나아가는 거야. 가다 보면 길이 보여. 그 길을 가노라면 횡재도 만나고 길 동무도 생기게 되지. 모험의 인생길 좌우편에는 이런 행운의 보따리들이 줄줄이 숨어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어.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게 마련이니 그때 후회 없이 죽으려면 지금 뛰쳐나가야 해. 문이 닫혀 있으면 창문을 넘어서라도




[정홍택]

서울대학교 졸업

KOCHAM(Korea Chamber of Commerce in U.S.A.) 회장

MoreBank 초대 이사장

Philadelphia 한인문인협회 창설 및 회장

 

정홍택 hongtaek.chung@gmail.com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4.02 12:40 수정 2020.04.0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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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