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그냥’의 미스터리(II)

이태상

 


천재지변(天災地變)이나 전쟁 같은 인재(人災) 때마다 늘 그래 왔듯이 요즘 코로나 사태로 또다시 지구 종말론이 회자(膾炙)되고 사람들이 모두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2008년에 출간된 미국의 심령술사 실비아 브라운 (Sylvia Celeste Browne 1936-2013)의 예언서 나날의 끝: 말세에 관한 예언(End of Day: Predictions and Prophecies About the End of the World)’이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하면서 아마존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논픽션 부문 2위로 그 값도 권당 수백 달러씩에 불티나듯 팔리고 있단다.

 

브라운은 몬텔 윌리엄스 쇼(The Montel Williams Show)와 래리 킹 라이브(Larry King Live) TV와 라디오에 자주 출연했고 한 시간짜리 온라인 쇼를 헤이 하우스 라디오(Hay House Radio)에서 진행하기도 했는데, 다섯 살 때부터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감(premonitions)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그녀의 예언이 틀린 것도 많았지만 12년 전에 나온 책 나날의 끝에 적힌 이런 한 문장이 새삼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2020년경, 심한 폐렴 같은 역병이 온 지구를 덮칠 것이다. 폐와 기관지를 공격하면서 기존의 어떤 치료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더욱 불가사의하게도 갑자기 이 질병이 출현했듯이 또한 갑자기 사라졌다가 10년 후 다시 나타났다가는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In around 2010, a severe pneumonia-like illness will spread throughout the glove, attacking the lungs and the bronchial tubes and resisting all known treatments,Almost more baffling than the illness itself will be the fact that it will suddenly vanish as quickly as it arrived, attack again ten years later, and then disappear completely)”

 

일부 전문가들은 그녀의 예언이 우연히 공교롭게 적중했을 뿐이지 어떤 계시와는 상관없이 먼저 발생했던 사스 (SAS: 급성호흡기증후군) 데이터에 허구를 보태 끼워 맞췄을 것이라며 실제로 그녀는 자신이 88세까지 산다고 예언했었지만 77세에 죽지 않았느냐고 회의적이다. 어떻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물은 문자 그대로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인명재천(人命在天)일 테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간 문제 아니랴. 좀 먼저 가고 뒤에 가는 게 뭐 그리 대수랴.

 

그렇다면 우리 모두 인도의 1913년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라빈드라나쓰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 )가 남긴 말 한두 마디 깊이 음미해보리라.

 

죽음의 사자(使者)가 그대를 찾아오면 그에게 그대는 무엇을 대접하시겠소?

, 나는 내 삶의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내놓으리다.

(On the day when death will knock at thy door what wilt thou offer to him?

Oh, I will set before my guest the full vessel of my life

I will never let him go with empty hands)”

 

죽음은 (생명의) 등불을 끄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날이 밝았으니 등잔을 치우는 것이라오.

Death is not extinguishing the light;

It is only putting out the lamp

Because the dawn has come

 

그러니 우리 모두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시구(詩句)에서처럼

 

모래 한 알에서 세상을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볼 수 있도록

네 손 안에 무한(無限)

한순간에 영원(永遠)

잡아야 하리라.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2015626일 미국 대법원이 동성결혼을 전면적으로 인정하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리자 곳곳에서 성소수자인 동성애자,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적 다양성을 구가하는 춤과 노래의 퍼레이드 행렬이 지나가는 보도에는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무지개색의 모자, 깃발, 머리띠, 넥타이, 의상을 입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 이후로 온갖 로고에 무지개가 들어가고 무지개가 산지사방에 뜨고 있었다. 가히 성적(性的)인 중세 암흑시대가 막을 내리고 개명천지가 열리는 듯했었다.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음악은 도덕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 말고는 모든 것이 도덕과 상관이 있는데 나는 도덕이나 윤리와 상관없는 것을 좋아한다. 누가 뭘 전도하거나 설교하는 것을 나는 언제나 못 견뎌했다. (I am fond of music I think because it is so amoral. Everything else is moral and I am after something that isn’t. I have always found moralizing intolerable)”

 

이렇게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1877-1962)가 말했듯이 영어로 도덕과 상관없다는 ‘amoral’에 상응하는 ‘asexual’이란 단어가 있는데 성적으로 무관하다는 뜻이다. ‘asexual’한 사람들은 사랑섹스(sex)’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 없는 섹스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다. 성매매가 그렇고 혼외정사와 바람피우는 것이 그러하며 플라토닉 사랑(platonic love)’이 그렇지 않은가. 톨스토이가 한때 주장했듯이 성욕(性慾)이 잔혹한 욕정(欲情)에 불과하다면 섹스행위는 우리 몸의 신체적인 일종의 배설작용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일까. 요즘 일본에서는 중년 동정(童貞)’이 사회현상화 되고 있다고 텔레그라프와 AFP통신, CNN 등 영, 미 언론들이 보도했다. 결혼과 출산율이 감소함에 따라 40대가 넘어서도 성관계를 경험하지 않은 동정남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체리보이(cherry boy, 숫총각을 의미하는 은어) 협회장 와타나베 신(渡部伸) 씨는 지난 2007년 출간한 저서 중년동정에서 연애자본(재력, 학벌, 외모 등)의 독점을 중년 동정의 원인으로 진단했다.

 

반면 여성은 다음에 더 좋은 남성이 나타날지도 몰라라고 기대하면서 연애 자본이 부족한 남성은 점점 선택지에서 밀려난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성적 욕구 충족 기구나 로봇은 물론 애니메이션, 만화, 각종 게임과 축제, 스포츠 등 여성과의 성관계를 대체할 만한 요소들이 중년 동정 현상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힌다.

 

총각학원을 운영하는 신고 사카츠메(眞吾坂) 씨는 연애를 하면 남녀관계에서 각종 고민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들은 그런 고민에 빠질 열려가 없다 보니 이성과의 관계에 점차 흥미를 잃게 되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말로 하자면 앓느니 죽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일본에서는 30대 이상 동정남이 늘면서 일본어로 하지 않은삼십 줄을 뜻하는 단어를 합쳐 야라미소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영육(靈肉)이 일치하듯 사랑과 섹스가 일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가 못하다면 사랑 따로 섹스 따로라도 해보는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프랑스 싱어 송라이터(singer-songwriter) 샹송 국민 가수 (France’s national chanteuse)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 1915-1968)가 부른 불후의 명곡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 의 가사와 같이 우리도 모두 사랑의 무지개 타고 장밋빛 인생을 노래라도 불러볼거나.

 

내 눈을 응시하는 눈동자

입술에서 사라지는 미소

이것이 나를 사로잡은

수정하지 않은 그의 초상화에요.

 

그가 나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속삭일 때,

나에게는 인생이 장밋빛으로 보이지요.

 

그가 내게 사랑의 말을 속삭일 때

언제나 같은 말이라도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지요.

 

내 마음속에 행복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 까닭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우린 평생토록

그는 나를 위해 나는 그를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그는 내게 말했고,

목숨을 걸고 맹세해 주었지요.

 

내 느낌만으로도

내 가슴이 그 때문에

뛰고 있음을 알지오.

 

끝없는 사랑의 밤은

더 할 수 없는 희열로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몰아내고

너무도 행복해 죽을 것 같지요.

 

사나이의 순정엔 미래 따윈 없는 거요. 그냥 순정만 반짝반짝 살아 있으면 그걸로 아름다운 거유. 그런 세계를 모르니까 세상이 이렇게 팍팍하고 험난한 게 아니겠슈.”

 

시골 마을에 세입자로 들어와 살게 된 낭만파 시인과 동화작가가 되고 싶은 순정파 집주인 아저씨의 좌충우돌 스토리에 왈츠풍의 삽화가 실린 스토리툰 싸나히 순정(공동 저자 류근 시인과 그림 작가 퍼엉)에 나오는 대화 한 토막이다. 동네 체육대회에 심판으로 파견 나온 여자 프로 축구 선수를 보고 반한 집주인 아저씨가 하는 말이다. (이후 여자 프로 축구 선수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순정(純情)’을 너도나도 우리모두가 다 다다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대규모 살육(殺戮)과 파괴로 이어진 근대 문명에 반기를 들고 기존 질서를 조롱하며 기존 예술, 도덕, 사상, 규범 등에 도전한 20세기 초 일군(一群)의 유럽 예술가들과 작가들의 스타일과 테크닉을 다다(Dada)’라고 부른다. 상상해 보자. 우리 모두가 다다 다다이스트(Dadaist)’가 된다고. 과거나 미래가 아니고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열중하는. 코로나바이러스든 뭐든 다 물렀거라. 우리 다다 각자는 각자 대로 행복한 순간순간을 살기 위해서 말이어라.

 

패럴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의 네오 모타운(neo-Motown) 힛트 행복한 24시간이란 비디오에 백발이 성성하고 안경을 쓴 여인이 꽃무늬 옷차림에다 웃는 얼굴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고층 빌딩 주차장에서 춤추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느슨하게 목에 스카프를 걸치고, 온몸을 흔들면서 재즈 춤을 추는 이 여인은 두 손바닥을 활짝 펴서 마주치면서 좌우로 앞뒤로 또 저 하늘로 펄쩍펄쩍 뛴다. 달밤도 아닌 아침, 정확히는 94, 희열에 찬 황홀지경의 유난 체조. 그러면서 이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르는 노래는 행복이 진리요 진실(Happiness is the truth)’이란 내용이다.

 

남가주(southern California)에 사는 400여 명의 주민이 각자 4분씩 각자가 느끼는 행복감과 흥취를 춤과 노래로 24시간짜리 비디오에 담은 것이다. 이는 마치 저 유명한 빗속의 노래 (Singing in the Rain)’가 한 편의 영화로 하룻밤과 낮 24시간 동안 상영되는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행복의 시대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요즘 많이 쏟아져 나오는 책 {지난 225일 출간된 우생의 졸저 유쾌한 행복론(Jolly Well-being Theory)’를 포함해 제목들만 보더라도 행복 해법(Happiness Solution)’이니 행복 프로젝트(Happiness Project)’지금 당장 행복하기 (Happiness Now)’‘10% 더 행복하기(10% Happier)’ 등이 발간되고 있다.

 

이 윌리엄스의 비디오 행복하자(Happy)’에 열광적으로 호응하는 비디오만도 전 세계적으로 수천 개나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란을 비롯해 필리핀,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지역 등 분쟁 지역들을 총망라해서 열광하고 있다.

 

지난 20153월엔 유엔의 국제 행복의 날(The United Nations’ International Day of Happiness)’을 기념하기 위해 초청된 윌리암스 씨가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맨 꼭대기 층을 밝은 노란 색의 웃는 얼굴들로 불을 밝히는 점화식을 가졌고, 유엔 총회 회의장 홀에서 어린이들에게 지구라는 하나의 행복 유성(a happy planet)’의 소중함에 대해 연설했다. 유엔 건물 밖에서는 행복론자들(haptivists)’이 길가와 길목마다 모든 것이 경이롭고, 특히 당신과 당신의 행복은 그 이상이다. (EVERYTHING IS AWESOME. ESPECIALLY YOU AND YOUR HAPPINESS IS PART OF SOMETHING BIGGER.’이란 싸인 팻말/푯말을 들고 행복 복음 (Happiness Gospel)’을 전파했다. 이것은 당시 우리 반기문 사무총장이 수장으로 있든 유엔이 지속 불가능한 개발정책과 날로 심해지는 빈부격차 및 기후변화에 맞서 싸우는 대응책의 기본이 되었어라.

 

201579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에 당시 연재 중이던 미 대륙횡단 마라톤 일기 21회분 칼럼 아미시 마을의 풍경에서 강명구 씨는 말 다섯 마리가 농부와 함께 호흡을 맞춰 먼지를 일으키며 쟁기를 끌고, 여인은 아이들과 함께 잡초를 뽑는 모습은 아련한 그림 속의 한 장면이다. 길에는 마차의 말발굽과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페달이 없는 자전거를 탄 여인들이 거리를 지나다닌다. 백일이 넘도록 달리면서 젊어진 나의 가슴은 순박하고 꾸미지 않았지만 맑고 정갈한 여인의 모습에 여지없이 반응한다. 이들은 지적(知的)인 삶보다는 미적(美的)인 삶을 택했고,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필수적인 기본 지식과 기술, 개별적 경쟁보다는 공동체 삶에 필요한 교육을 삶을 통해서 구현(具現)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강 씨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려오는 21세기 첨단 정보기술의 파도 앞에서도 함께 모여 즐겁게 살아가면서 느리게, 단순하게, 소박하게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몸을 움직여 땀 흘려 일하며 살아가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첨단 기술이 삶의 무게를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오히려 부지런하고 경건한 생활을 통해서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그의 칼럼 끝을 맺었다.

 

시간이 강물처럼 굽이쳐 유유히, 봄바람처럼 아롱아롱 흐르는 아미시(Amish) 마을을 지나며 과연 이 사람들이 대단한 삶을 살고 있구나 생각했다. 지배력으로 따지자면 전쟁보다도 강한 미국문화가 이들의 삶을 지배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선시(禪詩)가 생각난다.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올 때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갈 때는 어느 곳을 향하여 가는가?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태어남은 한 조각의 뜬구름이 생겨나는 것과 같고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죽는 것은 한 조각의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으니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은 그 자체가 진실함이 전혀 없어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나고 죽고 가고 옴도 구름처럼 그렇다네.

 

, 실로 그렇거늘,

그냥 순정을 갖고

이 순간에 행복하리라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4.03 11:43 수정 2020.04.0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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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