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장미인애 님에게 드리는 공개편지

이태상

 


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재 미국 뉴저지주 테너플라이라는 동네에 사는 83세의 전직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20187월 창간한 글로벌 신문 코스미안뉴스 회장 이태상입니다.

 

1972년 한국을 떠나 영국과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유감스럽게 도 배우 장미인애 님의 출연작을 본 것이 하나도 없지만 오늘 (202044일자) 한국일보 뉴욕판 연예스포츠지에 실린 윤성열 기자의 <’정부 비판장미인애, 돌연 은퇴 선언 바보 같이 느껴져”>를 읽고 장미인애 님을 멀리서나마 적극 성원 격려해 드리고 싶어 이렇게 몇 자 적게 되었습니다.

 

“2010, 2012 지금 2020, 어질 인 아니라 참을 인이다. 나도 자유발언권 헬조선 국민으로서 인권의 권리 이제 누리며 살겠다. 내 삶이니까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IMF보다도 더 힘들어도 그때보다 더 지금 더 뭐든 해서라도 살아서 버티고 이기고 살 거다. 남들이 다 예 할 때 난 양보하고 노했다. 아닌 거 아닌 거야. 제발 소신 있게 사는 삶을 살길. 지금은 뭐라도 할 거다.”

 

이렇게 기사에 인용된 장미인애 님의 글 문구는 평생토록 지켜온 제 인생의 신조이자 제 삶의 생활지침이기도 합니다. ‘골빈당이 판치는 세상 깜깜절벽 밤하늘에 별이 찬란히 빛나는 법이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 도입 방안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고 자신을 향한 비난이 거세지자 돌연 은퇴를 선언하셨다는데 제 생각 같아서는 아주 장미인애(壯美人愛)’다운 용단(勇斷)이십니다.

 

잘 아시겠지만 볼테르(Voltaire)라는 필명의 프랑스 풍자 계몽사상가 프랑쏴-마리 아루에(Francois-Marie Arouet, 1694-1778)는 그의 철학적인 편지들(Philosophical Letters)에서 관용과 자유의 이름을 걸고 기존 질서의 악습과 폐해를 지적, 비판, 공격했지요.

 

철학적인 편지들은 볼테르가 그의 풍자적인 글 때문에 바스티유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고 1726년부터 2년 남짓 영국에 망명해 있으면서 당시 영국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쓰게 된 영문판 영국 국가에 관한 편지들(Letters Concerning the English Nation, 1733)’에다 프랑스의 수학, 물리, 철학자 블래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의 수상록 팡세(Pense’es, 1670)에 대한 평론으로 된 편지를 하나 더 추가해 그 다음 해인 1734년 프랑스어로 발간된 것입니다. 또한 잘 알고 계시겠지만 파스칼의 팡세는 그의 사후에 발표된 것으로 기독교를 신봉하고 변호하는 그의 생각들의 편린을 엿보게 해주는 미완성 수상록이지요.

 

철학적인 편지들에서 볼테르는 어조(語調)는 온건하나 대담한 표현의 자유를 구사, 억압적인 종교의 획일성, 교회의 막대한 재력과 권력, 왕정의 압제와 횡포, 귀족의 특권과 사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같은 국민, 시민으로서 귀족과 평민의 동등한 사회적 지위, 공평한 세제(稅制), 그리고 예술과 과학의 자유스러운 창작과 탐구를 촉구했지요. 그 자신 그 누구 못지않은 신념과 용기와 정열의 사나이였으나 그렇다고 독선, 독단에 빠지지 않고 그는 신념 껏, 용기 껏, 정열 껏, 열정적으로 말하지요.

 

그대가 말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의견을 달리하지만 나는 내 목숨을 걸고 그대가 그대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지키고 옹호하겠노라. (I wholly disapprove of what you say, but I will defend to the death your right to say it.)”

 

이것이 참된 토론 문화이고 더럽지 않고 깨끗한 승부를 가려 이겨도 떳떳하고 져도 떳떳케 하는 페어 플레이(fair play)’ 정신이며 상식과 이성(理性)을 바탕으로 하는 인도주의(人道主義),’ 사랑의 논리와 철학으로 꽃 피우고 열매 맺을 인간문화로서 그 어떤 학문, 예술, 철학, 종교, 도덕, 윤리, 사상, 이념도 이 뿌리와 줄기에서 떨어질 수 없고 또 떨어져서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다 인류의 발전과 향상을 꾀하고 인간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데 그 목적과 의의(意義)가 있다면 말입니다.

 

한국 연예계에서 크게 성공하신 장미인애 님께서 배우로서 은퇴를 선언하신데 대해 많은 팬들이 실망하고 몹시 안타깝게 아쉬워하겠지만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찬성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제가 1955년 서울대 문리대에 진학한 직후 우연히 청소년 영화 남우 주연배우 공모에 응모해 오디션을 받고 선발/발탁되었으나 한두 학기 학교 휴학을 하고 지방 로케 촬영을 해야 한다고 해서 고민 끝에 고사(/苦辭)한 일이 있답니다.

 

그 당시 제 생각은 인생 자체를 무대로 보고 내 인생 삶의 주인공으로 내 스토리는 내가 직접 써가며 그것도 종이에다 펜으로 잉크 찍어 쓰는 게 아니고 인생이란 종이에다 이라는 펜으로 사랑의 피와 땀과 눈물이란 잉크로 써보리란 것이었죠.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를 읽고 보는데 만족할 수 없었고,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아니 그보다는 영화나 소설에도 없는 나만의 탐험담을 실제로 직접 실연(實演)하고 실현(實現)하며 체화(體化) 해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정말 꿈도 못 꾸던 기적 같은 아니 기적 이상의 일들도 일어나더군요. 인생은 생각하는 사람에겐 희극이고 느끼는 사람에겐 비극이란 말이 있지만 제가 직접 경함한 바에 따라 인생은 뭣보다 모험이란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즘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쳐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남의 일로만 생각하던 죽음을 직면하게 된 것이 화()인지 복()인지는 각자 생각하기 나름 아닐까요.

 

제가 아주 어린 청소년 시절부터 뽑아 본 장타령 한 곡 불러보지요. ‘장타령이라기보다 아플 아(), 아릴 리(), 사랑 랑(), ‘아리랑 타령이나 미칠 미(), 아서라 아(), 차라리 리(), ‘미아리 타령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삶의 다른 한 쪽

죽음을 의식하고

사는 것 이상의

종교도

 

죽음을 안고

사는 삶을

더할 수 없이

잘살아보는 것

이상의 예술도

 

사랑으로 숨 쉬고

사는 사랑 이상의

삶도 없으리

 

오늘 아침 뉴욕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발언대 칼럼 코로나 사태의 심리적 생존전략에서 필자 김자성 정신과 전문의는 죽음은 실제로 삶을 파괴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실존주의 정신의학의 교훈을 우리 삶에 실현할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칼럼을 맺습니다.

 

“6,500만 년 전 큰 혜성이 유카탄반도를 강타하며 일어난 천재지변으로 공룡시대가 끝나고 포유류의 시대가 출현하였듯 이번 코로나 사태는 뭔가 새로운 존재 방식이 세계적 규모에서 출현하기 위한 혜성 같은 충격이 아닐지 상상해 본다. 즉 시장경제가 전 세계적으로 강타당하고 자본주의적 소유위주의 삶이 그 다음 단계의 행동위주, 또는 그보다 상위인 존재위주의 삶으로 진화 발전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지. 먹구름 뒤에 빛나는 은빛띠를 그려본다.”

 

이것이 어디 동양만의 시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331일자 서양의 대표적 주요 언론으로 세계에서 가장 진취적인 신문으로 정평이 난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에 실린 장문의 글에서 필자 피터 씨 베이커(Peter C. Baker)도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같은 인류의 큰 위기는 그동안 있어 온 현재 상태로서의 현상(現狀/)을 악화시키던가 아니면 더 좋고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열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Times of upheaval are always times of radical change. Some believe the pandemic is a once-in-a-generation chance to remake society and build a better future. Others fear it may only make existing injustices worse. By Peter C Baker/The Guardian)

 

장미인애 님께서는 배우로서 은퇴 후 어떤 계획을 갖고 게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전화기를 처음 발명한 미국의 과학자 알렉산더 그레이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의 말이 떠오르네요.

 

문이 하나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는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종종 오래도록 닫힌 문만 바라보느라 새로 열린 문을 못 보는 것이다. (When one door closes, another opens; but we often look so long and so regretfully upon the closed door that we do not see the one which has opened for us.)”

 

지난 2천여 년 동안 서양의 인간 중심 인본주의로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한다고 지구생태계를 파괴해 오늘날 심한 기후변화를 초래했고, 비백색 인종들을 개화시킨다고 착취하며 노예로 삼아, 세계를 백인들의 식민지로 지배, 그동안 쌓아온 선민과 남성과 부자 위주의 자본주의 물질문명으로는 전 인류의 자멸(自滅)밖에 없음이 자명(自明)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난국(難局)과 위기(危機)를 우리는 우리 동양 선인들의 피아일체(彼我一體)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지혜와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천도교(天道敎)인내천(人乃天)’ 곧 우주정신(宇宙精神)코스미안사상으로 타개하고 극복해 새로운 코스미안시대를 열고자 코스미안뉴스 가 창간되었고 앞으로 강원도 평창에 글로벌 온라인 코스미안대학설립을 추진 중입니다.

 

장미인애 님께서도 이 우주사적’(宇宙史適)인 과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주시기를 요망하면서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축원(祝願)합니다.

 

20204월 5

이태상(李泰相) 드림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4.05 12:59 수정 2020.04.05 13:11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