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클미’의 ‘삶’이어라

이태상

 



2020430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뉴스의 현장칼럼 흔들리는 서구우월주의를 석인희 LA사회부 기자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저명한 미래학자 유발 하라리 교수는 프랑스 잡지 르 포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중세에서 근대화로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끌어온 미국과 유럽의 서양 우월주의가 쇠퇴하고 세계질서가 재편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에서 창궐했던 전염병 천연두를 아메리카 대륙에 퍼뜨려 원주민들의 문명을 멸망시켰고, 서구우월주의의 시작점이 됐다. 528년이 지난 2020, 서구우월주의는 전염병 코로나19로 인해 역 화살이 되어 수많은 유럽인, 미국인들을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는 이전보다 조금은 더 평등한 시선으로 동서양의 관계를 바라보는 전환점에 서 있게 됐다.

 

이 얼마나 정확한 관찰과 각성의 지적인가! 유발 하라리 교수 이전에 있어 온 선각자 몇 사람의 말들을 우리 되새겨보리라.

식민주의는 달콤한 명분으로 가장한다. 기독교다, 문명이다, 법과 질서를 퍼뜨려 세계를 민주주의로 안전하게 만든다는 허울 좋은 구실로 온 세계를 정복했다.”

 

필리핀 작가 에프 시오닐 호세(Francisco Sionil Jose’ 1924 - )의 말이다.

 

“Colonialism subdues in many dulcet guises. It conquered under the pretext of spreading Christianity, civilization, law and order, to make the world safe for democracy.”

 

식민주의는 그 피해자들의 개성과 인간 정신을 파괴하고 타락시키는 천인공노할 가증스런 죄악(罪惡) 이다.”

 

미국 정치인 에이사 필립 랜돌프(Asa Philip Randolph 1889-1979 )의 말이다.

 

“Colonialism is an abomination; it is a sin; it is an evil. It brings about the degradation and demoralization of the human spirit, of the personality of the people who are the victims of it.”

 

“(식민지) 사람들의 땅을 빼앗는다는 것은 땅뿐만 아니고 그 이상으로 그들의 과거, 곧 정체성과 뿌리를 뽑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일상적으로 늘 보고 또 볼 것으로 기대했던 것들을 탈취해 없애버린다는 건 그들의 눈을 뽑아버리는 것과 같다.”

 

1985년 만들어져 일곱 개의 아카데미상을 포함해 28개의 영화상을 받은 영화가 각색한 자서전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1937년 출간됨)’의 저자인 덴마크 여성 작가 카렌 블릭센(Karen Blixen, 필명은 Isak Dinesen, 1885-1962)의 말이다.

 

“It is more than their land that you take away from the people, whose native land you take. It is their past as well, their roots and their identity. If you take away the things that they have been used to see, and will be expecting to see, you may, in a way, as well take their eyes.”

 

제국을 건설한 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자신들과 자신들의 문화가 자신들이 정복하는 피정복자들과 그들의 문화보다 우수하다는 믿음으로. 로마, 포르투칼, 스페인 처럼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우월성과 힘을 믿고, 자신들이 하는 짓이 신()의 섭리(攝理)와 명령, 곧 신명(神命)을 따라 집행하는 것으로 믿었다. 대영제국하 에서는 ()’이란 명실공히 영국인이었다.”

 

폴란드 태생으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사회학자 아담 얌로직(Adam Jamrozik 1926 - )의 말이다.

 

“The builders of empires always justified their actions by their belief that they and their cultures were superior to the cultures of those they conquered. The English imperialists, like the Romans, the Portuguese, and the Spanish before them, believed in their superiority and strength, and that their actions were instruments of the divine order. In the British Empire God was indeed an Englishman.”

 

식민지 개척이란 정복과 침략의 가장 현대적인 대의명분은 원자재(原資材)’란 슬로건에 축약되어 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지구의 자연자원이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다고 자신들의 계획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자연자원을 못 가진 입장에서 과다하게 가진 나라들로부터 쟁취하려는 것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천부(天賦)의 권리를 행사해 자신들의 자연스럽고 정당한 몫을 챙기는 일인데 그 누가 침략행위라고 낙인찍을 수 있겠는가?”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루드빅 폰 미제스(Ludwig Heinrich Edler von Mises 1881-1973)의 말이다.

 

“The most modern pretense for colonial conquest is condensed in the slogan ‘raw materials.’ Hitler and Mussolini tried to justify their plans by pointing out that the natural resources of the earth were not fairly distributed. As have-nots they were eager to get their fair share from those nations which had more than they should have had. How could they be branded aggressors when they wanted nothing but what was in virtue of natural and divine right their own?”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는 신세계의 산 살바도르섬에 처음 착륙해서 신()을 찬미한 후 황금이 어디 있느냐 다그쳐 물었다.”

 

트리니다드의 언론인, 역사학자 C.L.R. 제임스(Cyril Lionel Robert James 1901-1989)의 말이다.

 

“Christopher Columbus landed first in the New World at the island of San Salvador, and after praising God inquired urgently for gold.”

 

자유의 소용목적은 남을 위한 것이다.”

 

유대계 미국 작가 버나드 말라무드(Bernard Malamud1914-1986)의 말이다.

 

“The purpose of freedom is to create it for others.”

 

변화는 오고 말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어떤 변화를 누가 결정하는가의 문제이다.”

 

미국의 여성 환경운동가 위노나 라듀크(Winona LaDuke, 1959 - )의 말이다.

 

“Change will come. As always, it is just a matter of who determines what that change will be.”

 

미국 정부는 우리(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인디언들)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죽여 없애려 했지만, 일부만이라도 우리가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은 창조주가 우리에게 맡긴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옛날의 생활방식을 되찾아 사람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다. 영혼에 대해서, 삶의 공동체에 대해서, 사회와 정의에 대해서,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를 사랑하는 지구애가 필요한 이 시점(時點)에 말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 라코타 시우족 지도자 윌리암 언더배기지(Lakota Sioux leader William Underbaggage 출생연도 未詳)의 말이다.

 

“The government was supposed to wipe us out, commit a war of genocide and kill every last one of us. But we survived, and we survived because the creator has a plan for us. We’re bringing the old ways back, ways that teach about the spirit, about community, about justice, about love for the Earth. And we’re bringing them to the world in a time when it needs them.”

 

클래식에 미치다의 앞글자를 따서 클미라 불리는 페이스북 동호회가 있다. 클래식 음악을 주제로 한 페이지 중 팔로어가 가장 많다고 한다. 회원 수는 2017년 현재 30여만 명으로 순수 예술 관련 블로그, 웹사이트를 포함해 온라인 커뮤니티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팬을 보유하고 있단다.

 

하지만 다른 장르에 비해 유독 클래식 음악이 다수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장르에 비해 길이가 길다는 것이다. 일단 곡이 길면 사람들은 들으려고 하지조차 않는다는 이야기다.

 

, 그렇다면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들과 같은 핏줄이라는 우리 조상들이 정말로 선견지명이 있었나 보다. 숨을 쉬며 인생을 산다는 뜻으로, 가슴 뛰는 대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단 한 글자로 줄여서 이라고, 다시 말해 사람사랑의 합성어 준말로 이라고 했으니 말이어라. 그런데 이런 삶을 우리는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세 토막 뉴스를 통해 살펴보자.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집단 IS가 프랑스 파리에서 20151118일 연쇄 테러 참사를 저지른 직후인 17일에 20대 청년 이슬람교도가 파리 레뷔블리크 광장에 나는 무슬림이다. 나는 당신을 믿는다. 당신도 나를 믿느냐? 믿는다면 나를 안아 달라.”란 내용의 종이를 바닥에 깔고 눈을 가린 채 서있었다. 그러자 길 가던 파리 시민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그를 안아 주었다.

 

거의 때를 같이 해서 페이스북에 공개된 베트남계 프랑스 부자(父子)의 대화가 조회 수 1,400만 건을 넘었다. “정말 나쁜 사람들. 우리는 이사 가야 할지 몰라요라고 말하는 다섯 살 아들에게 젊은 아빠는 우린 떠나지 않아도 돼. 프랑스는 우리나라니까, 이상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어라고 대답한다. “우리에겐 총 대신 꽃이 있고모든 사람들이 꽃을 갖다 놓으며 총과 맞서 싸운단다.”는 아빠의 말에 꽃은 아무것도 못하잖아요.”라던 아들은 꽃과 촛불이 우리를 지켜주는 거군요라며 그 어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가 하면 같은 날 지구촌 다른 곳 인도네시아에선 신혼부부가 살인혐의로 체포됐다. 인도네시아의 한 남성이 결혼 후, 아내가 처녀가 아니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화가 난 남성은 결혼 전 자신이 결혼한 아내를 성폭행한 남성을 아내를 시켜 유인해 살해한 뒤, 성기를 잘라 아내에게 요리하게 해서 먹어 치우는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과 AFP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전 소련연방 당시 우크라이나의 천재소녀 시인 니카 투루비나(Nika Turbina 1974-2002)의 시집 초고(First Draft)’에 수록된 시 점치기(Telling Fortunes)’가 생각난다.

 

내가 점장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난 꽃만 갖고도 점쳐

세상의 모든 상처를 다

무지개로 낫게 할 텐데

 

What a shame that

I’m not a fortuneteller.

I would tell fortunes

only with flowers

and I would heal

the earth’s wounds

with a rainbow.

 

촛불이나 꽃이나 무지개로 인간의 모든 광기와 상처가 치유될 수 없다 해도 세상에 모성애가 존재하는 한 인류에겐 희망이 있다. 모성애의 한 표본을 들어보리라.

 

1865년 겨울밤 웨일즈 언덕, 한 여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언덕을 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치더니 주변을 새하얀 눈으로 뒤덮었다. 여인은 눈보라에 길을 잃었고, 아무리 외쳐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 눈보라는 그치고 건초를 옮기는 한 남자가 웨일즈 언덕을 넘고 있었다. 언덕을 거의 다 넘어갈 때쯤 남자가 무언가 발견했다. 속옷 차림으로 얼어 죽어있는 여인이었다.

 

놀랍게도 여인은 아이에게 자신의 겉옷을 말아 감싸 안은 채 숨진 상태였다. 그 겉옷을 벗기자 어린아이가 몸을 꿈틀거렸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어 아이를 감싸 추위에도 살아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아이는 훗날 영국의 총리(1916-1922)가 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이다. 이런 엄마의 사랑을 받은 기억이 있다면 누구나 다 하나같이 사람다운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으랴.

 

난 이미 내 인생을 낭비했소. 내 남은 힘을 모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소.”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 2000)에서 푸른 여우의 독침(毒針)을 맞고 죽어가면서 리무바이가 수련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말이다. 그는 스승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먹을 꽉 쥐면 그 안에 아무것도 없지만, 주먹을 놓으면 그 안에 모든 것이 있다고 하셨어.”

 

이를 강신주 대중철학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이 영화는 헛헛한 동양적 허무주의를 짙게 풍긴다. 때를 만나지 못한 호랑이와 용의 이야기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와호장룡의 허무주의는 모든 장면에 공기처럼 편재하지만, 가장 강렬한 주제 는 두 커플 사이의 허무한 사랑, 혹은 어긋나는 사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영원히 자신의 곁을 떠나는 임처럼 허무한 대상이 또 있을까. 함께 있을 것도 아니면서.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날 예정이면서, 리무바이와 옥교룡은 홀로 남겨질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매정함을 넘어 허허롭기만 하다.”

 

그렇다 해도 부모자식이나 형제지간 아니면 친구나 연인 사이에서든 어차피 허허로운 것이 인생 아니던가. 자식사랑이 동물적이라면 남녀 연인간의 사랑은 신적(神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단 한순간만이라도 이런 사랑의 결정체로서 삶을 산다면 더할 수 없이 축복받은 사람이리라.

 

이런 삶이야말로 우리의 고향고곡(故鄕古曲)이 영원무궁토록 길게 이어지는 클미이 아니랴. 유사이래 인류역사를 돌아보든 아니면 한 개인의 개인사를 살펴보든 인간은 이성(理性)의 동물이라기보다는 감성(感性)의 동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점을 언어를 통해 연구한 학자가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화튼 스쿨(The Wharton School of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의 마케팅 부교수 조나 버거((Jonah Berger)와 동료 교수 에지 아크피나(Ege Akpinar Founder & CEO Pointr: The Deep Location Company), 이 두 사람이 (cool)’ 처럼 오랫동안 유행하는 단어들의 인기 비결을 연구 조사한 결과를 최근 개성과 사회심리학 저널(Th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이란 학술지에 발표했다.

 

이 온도와 관계된 (cool)’이란 단어는 이미 16세기 때부터 단지 기온의 온도뿐만 아니라 사람의 내적 정신상태나 냉정한 성정의 정서상태를 묘사하는 단계로 발전하다가, 18세기 말부터는 오늘날 같이 스타일이나 패션 감각의 멋있다는 뜻으로 유행하기 시작해, 지금은 음악이든 옷맵시든 자동차든 식당이든 두루 좋다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언어가 항상 진화하고 변한다지만 어떤 단어와 관용구는 사라지는데 어떻게 어떤 말씨는 계속해서 오래 유행을 타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 두 학자는 수백 년에 걸쳐 셰익스피어의 단시들(sonnets)을 비롯해 시대와 장소를 총망라한 5백만 권의 작품들을 데이타베이스로 삼아 연구 조사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냉정하게 차가운 사람(cold person)’이나 총명하게 빛나는 학생(bright student)처럼 시각적이고 후각적이며 촉감적으로 감성적인 표현이 붙임성 없게 불친절하다거나 약삭빠르게 똑똑하다는 등 어의론적(語義論的)이거나 의미론적인 것보다 사람들이 더 잘 기억하고 오래도록 사용하게 된다는 얘기다.

 

우리 생각 좀 해보자. 최근 이슬람국가(IS)의 알카에다에 의한 테러성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미소냉전, 월남전, 한국전, 1, 2차 세계 대전, 청일전쟁, 노일전쟁, 미국의 남북전쟁, 중세 십자군 전쟁 등등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모든 전쟁들과 서유럽국가들에 의한 식민지 개척, 노예제도, 마녀사냥, 성차별, 인종차별, 사회계층 간 계급차별 등등 모든 반 인륜적인 만행들이 이성적이라는 허깨비 같은 사상이다 이념이다 또는 온갖 독선 독단적이고 위선에 찬 종교적 교리에 의해 자행되어 오지 않았는가.

 

반면에 석가모니와 예수 등 모든 성인성자들이 설파하고 몸소 실천 실행한 것이 대자대비(大慈大悲), 여성의 모성애와 친구 사이의 우정, 남녀 간의 연정과 애정, 이웃 간의 인정, 이 모든 사랑은 다 우리의 따뜻한 감성에 따른 것 아닌가.

 

그러니 인류와 개개인의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이성보다는 감성, 사상보다는 사랑, 교리나 이론보다는 정리(情理)를 따라야 하리라. 그 최소한의 정감은 연민과 긍휼지심(矜恤之心)이어라.

 

이것이 바로 우리 단군의 홍익인간이고 천도교의 인내천이며 우리 동양 출신 아메리칸 원주민 인디언들이 믿어온 피아일체(彼我一體)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코스미안 사상이리라.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5.06 11:10 수정 2020.05.0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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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