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사랑의 실습이고 실험이어라

이태상

 


"뭣 때문에 살 이유가 있는 사람은 뭣이든 다 감당할 수 있다."

 

"He who has a why to live for can bear almost any how."

 

-Friedrich Nietzsche

 

 

202051일자 중앙일보 문화면에 실린 김희애 연기 판타스틱한국 문화 에너지가 굉장하다란 제하의 영국의 BBC에서 방영된 닥터 포스터(Doctor Foster)’를 각색한 인기 드라마 부부의 세계’(JTBC)의 원작자로 영국의 극작가 마이크 바틀렛(Mike Bartlett, 1980- )과 가진 전수진 기자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199391일 출간된 우생의 졸저 우리 가슴 뛰는 대로(): 내 마음은 바다에 실린 공개 서한 김희애 양에게가 떠올랐다.

 

김희애 양에게

 

M-TV 수목극 폭풍의 계절과 영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에서 연기천재김희애가 브라운관과 스크린 동시정복을 선언했다는 기사를 보고 이렇게 펜을 들었다.

 

먼저 말을 놓는 것 용서해주기 바란다. 내 막내딸이 같은 또래로 외모와 성격이 희애 양과 많이 비슷해서이다. 그리고 희애 양의 이름부터가 내 맘에 쏙 들어서인지 모르겠다. 한자로 어떤 글자를 쓰는지 모르지만 기쁠 희(), 좋아할 희(), 바랄 희(), 드믈 희(), 놀 희(), 연극 희(), 다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사랑 애(), 앳된 어린아이가 준 말 애, 또는 애를 쓴다는 뜻의 애() 또한 다 썩 잘 어울려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희애 양 이름 자체가 우리 모두의 존재 아니 그 본질과 본성을 나타낸다고 본다. 우리 모두의 희망과 꿈, 기쁨과 희열, 신바람과 장난기에다 우리 모두의 동심(童心)어린 사랑의 피와 땀과 눈물까지.

 

그러니 희애 양이 하는 연기는 단순한 연기일 수 없고 우리 모두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야 하겠다.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좀 걱정되는 것이 혹시라도 희애 양이 뛰어난 연기자로서 뛰어난 연기를 하겠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면 주제넘은 노파심으로 한두 마디 당부해보고 싶다.

 

물론 희애 양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분들의 감탄성의 발로로 그분들의 객관적이라기보다 주관적인 표현이긴 하겠지만 다음과 같은 기사가 왜곡된 것으로 잘못 본 오해이기를 바랄 뿐이다.

 

절정의 연기력을 바탕으로 팬들을 자신의 포로로 만들어가고 있다.”

 

000단지 그가 김희애와 한 드라마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빛을 잃고 말았다김희애 앞에선 물먹은 솜이 되고만 것이다.”

 

잔매를 맞더라도 상대의 허점을 향해 펀치를 날리는 파이터파이터의 특징은 상대가 강하면 더 강하게 나가는 것

 

경쟁적인 연기자만 만나면 웬 일인지 희애가 펄펄 난다.” 등등

 

이런 기사는 마치 저 잔악무도(殘惡無道)하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야만적인 권투경기나 투우(鬪牛)경기라도 중계하는 보도 같다. 결코 희애 양이 목숨을 걸고 너 죽고 나 살자는 죽기 아니면 살기의 연기 대결이나 경쟁이 아닐 텐데 말이다.

 

자고로 진정으로 감동적인 연기는 배우가 연기하지 않고 맡은 역의 인물이 되어버리는 것임을 그 누구보다 희애 양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맡은 역의 그 인물로 숨 쉬고 꿈꾸며 사랑함으로써 내가 나 이도록 다른 사람들이 나를 돕듯이 너는 너이도록 도와 너의 연기도 최고 고도로 오르고 내 연기도 최절정에 달하게 되는 것임을.

 

그럴 때 비로소 주연 조연 따로 없이 맡은 배역 전원이 저마다 제각기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명연기자로 하나의 훌륭한 인생 드라마를 연출해내는 것임을. 그럴 때 바야흐로 배우마다 신들린 사람 되어 무아도취(無我陶醉)의 입신지경(入神之境)에 도달하는 것임을 희애 양 자신이 너무너무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것이 참된 배우로서 최()진실 아니면 무엇이랴. (김희애 양에게에 앞서 최진실 양에게' 쓴 공개서한도 함께 우리 가슴 뛰는 대로에 실렸음)

 

온몸을 혼()으로 불살라 ()’이 무럭무럭 나도록 열연하는 황홀경(恍惚境)의 김희애이어라. 더할 수 없이 진실(眞實)하고 희망과 기쁨에 가슴이 타오르는 사랑의 숨찬 이 되는 것이리.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에게 김희애가 보여주는 최진실(最眞實)이리라.

 

진실은 진실대로 참되고

희애는 희애대로 우리 희망이고

기쁨이며 사랑이어라.

 

우리가 무엇 때문에 를 쓰랴.

어린애처럼 신나게 놀기 위해서

 

가슴 설레이며 폭풍을 무릅쓰고

단꿈을 꾸듯 사는 것이 아니라면

 

최진실은 최진실대로

김희애는 김희애대로

아름다워라, 영원토록

 

김희애 양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최진실 양이 삶을 너무 일찍 포기한 것이 너무 너무도 안타깝고 애처로워 가슴이 몹시 아프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간절히 빌고 또 빌 뿐이다. 그러면서 억만의 하나 찬스로라도 살아생전 내가 쓴 공개편지를 최 양이 읽을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아직도 그녀가 김희애 양과 우리 모두와 함께 숨쉬고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망상(妄想)을 지워 버릴 수 없어라

 

패배는 결코 치명적일 수 없다. 본인 자신이 자포자기하지 않는 한. 패배를 당할 때 사람은 비로소 제 약점을 파악하고 앞으로 그 어떤 패배에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된다.

 

매사가 순조로울 때는 누구나 제가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역경에 부닥쳐 봐야 갖고 있는지 자기 자신도 모르던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렇게 전 미국대통령 (37)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1994)은 그의 회고록에서 말한다.

 

오래 전 본 영화 장고(Django)가 잊혀지지 않는다. 1966년 개봉된 이탈리아 남배우 프랑코 네로(Franco Nero, 1941 - )주연의 이탈리안 스파게티 서부영화(Italian Spaghetti Western)로 한국에선 () 황야의 무법자로 소개되었었다.

 

이탈리안 마카로니 스타일의 이 변형(變形) ‘서부활극의 끝 장면이 퍽 인상적이었다. 한 패거리 악당들 말발굽에 총잡이 손목이 무참히 짓밟혀 더이상 총을 쏠 수 없게 된 장고는 복수심에 불타 절치부심(切齒腐心) 끝에 어느 공동묘지에서 그 악당들과 재대결, 방아틀을 뗀 총을 못 쓰게 된 손 대신 팔목으로 쏴대며 처절한 복수를 하고 마는 것이었다.

 

우리는 현실에서도 이와 같은 수많은 실례들을 직접 경험 또는 목격하거나 보도를 통헤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어릴 때 자라면서 들은 이야기들 가운데 또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일정시대 학병으로 끌려나간 한 젊은이가 일본군 병사로 어느 동남아 섬에서 전투 중 심한 총상을 입고 패잔병으로 낙오되어 피를 흘리며 밀림 속을 헤매다가 표범이 달려들자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뒹굴면서 싸운 끝에 이 사나운 표범의 아가리를 찢어 죽이고 살아났다는 이야기다.

 

1960년대 한국일보 자매지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스(The Korea Times) 기자로 화재 사건 취재 현장에서 내가 직접 목격 확인한 실화도 있다. 어느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집에 살던 가족 중에 몸 성한 사람들은 다 타죽었는데 폐병(폐결핵) 말기로 각혈을 하며 몸져누워 있던 환자 한 사람만 불길을 뚫고 뛰쳐나와 산 일화이다.

 

사람에게는 정말 이같이 초인적인 힘이 내재하는가 보다. 그래서 우리말에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 하는 것이리.

 

미국의 석학(碩學) 철학자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을 두고 자기의 타고난 잠재능력의 몇십 분, 아니 몇 백 분의 일도 다 써보지 못하고 마는지 모를 일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신체적으로나 지능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자신들의 가능성의 극히 제한된 일부 안에서만 산다. 가능한 의식(意識)과 영적(靈的) 자원(資源)의 아주 작은 분량만 사용할 뿐이다. 마치 온몸을 움직이지 않고 새끼손가락 하나만 겨우 까딱거려 움직이는 버릇을 들인 사람처럼 말이다.”

 

“Most people live, whether physically, intellectually or morally, in a very restricted circle of their potential being. They make very small use of their possible consciousness, and of their soul’s resources in general, much like a man who, out of his whole bodily organism, should get into a habit of using and moving only his little finger. “

 

참으로 큰 역경과 난관에 부닥칠 때 이에 걸맞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면 커다란 불행과 위기일수록 그 더욱 큰 축복과 좋은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깊은 골짜기에 내려가야 다시 높은 산을 오를 수 있고 절망의 밤을 지나야 동트는 희망의 새 아침을 맞을 수 있듯이 말이어라.

 

청소년 시절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1862)’을 읽으면서 사람이 순탄하게 일생을 순풍에 돛달듯 무사안일(無事安逸), 무사무난(無事無難)하게 어영부영 사느니 비록 험난하고 고달프더라도 장발장(Jean Baljean) 같이 기복이 많고, 성쇠 심한 파란곡절(波瀾曲折)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이 훨씬 더 살아볼 만한 인생이 아닐까 하는 아주 강한 선망의 느낌이 들었었다.

 

진실로 삶이란

그림의 떡이 아니고

을 남김없이

시식(試食) 포식(飽食)하고

또 아낌없이 보시(布施)하는

실습(實習)이고 실험(實驗)이어라.

 

단연코 수박 겉핥기로는

삶의 참맛을 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일진대

더도 덜도 말고 어김없이

시험(試驗) 실험(實驗)이고

모험(冒險) 탐험(探險)이어라.

 

신비(神秘) 중에 신비를 발견하고

기적(奇蹟) 중에 기적을 일으키는

인간미(人間味/人間美)

인생혼(人生魂)의 원천(源泉)

사랑의 실습(實習)이고

실험(實驗)이어라.

 

 

살아생전 '최진실 양에게' 쓴 내 공개편지도 옮겨본다.

 

 

최진실 양에게

 

한국에서 최진실 양을 다룬 <인간시대> 비디오를 빌려다 보고 견디다 못해 이렇게 펜을 들었다. 먼저 내 멋대로 말 놓는 것 용서해주기 바란다. 진실 양이 내 친딸 같아 그러는 것이니.

 

진실 양과 같은 나이의 딸이 내게 있을 뿐만 아니라 쌍둥이 딸로 태어나자마자 한 아이를 잃었다. 그래서 늘 잃어버린 이 아이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다 보니 네 또래 애들이 죄다 하나같이 내 딸 같기만 하구나. 게다가 진실이 아빠처럼 집 떠나 사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끼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그리는 사람은 언제나 가슴속에 있으니까.

 

어렵게 자라 지금은 많은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으나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괴로워하는 진실이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조금이라도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대대로 전()세대가 그랬었겠지만 진실이 부모세대 또한 진실이 세대 이상으로 고생하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부러운 것이 너무너무 많았다. '어느 천년에 무엇무엇을 나도 한 번 해보나' 생과자집 앞을 지나면서 언제나 나도 한 번 저런 과자 먹어볼 수 있을까? 언제나 나도 택시 한 번 타보나. 비행기 타고 외국에 나가보나. 내 전화기, 자동차, 집을 가져보나.

 

그러노라니 요즘 세상에선 돼지도 잘 안 먹을 '꿀꿀이 죽(미군부대 식당에서 나오는, 담배꽁초까지 섞인 음식물 쓰레기 끓인 것)'도 못 사 먹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거리에서 신문팔이 하던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신문기자를 거쳐 신문에 칼럼을 쓰게까지 됐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달성 가능한 목적만 추구할 때 사람은 만족을 모르게 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도로아미타불'이 되는가 보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사람의 욕심이란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겠지. 있으면 있는 대로 있는 것 놓칠까 봐 불안하고, 더 가져보려고 초조해지는 것이리라. 그리고 더 얻고 더 가져봤자 그래봤자 '도토리 키재기'가 아니겠니? 남과 비교한다는 것이.

 

흔히 '생존경쟁'이라 한다마는 남과 경쟁한다기보다 우리 각자 자신의 가능성과 경쟁하는 것일 테고, 매사에 성공이냐 실패냐의 결과보다 그 과정이 중요하며 '산다'''을 오르는 기쁨과 즐거움, 그 경험 자체가 전부가 아닐까? 결과가 어떻든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것에 너 스스로 만족할 수 있고 진정으로 너의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후회 없이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실로 진실의 행복 아니겠니?

 

또 진실이면 된다. 진실이 진실로. 다른 사람이 원하고 기대하는 진실이 아니고 진실이 되고 싶은 진실 말이다. 다른 사람 마음에 들기 전에 진실이 마음에 들어 진실이 자신, 진실이 자체부터 기쁘게 할 일이고 진실된 삶을 최고 최대한으로 만끽, 순간순간 유감없도록 즐길 일이다. 진실을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꾸밈없이 아름답게 성장 성숙해가면서 용감하게 열정적으로 진실이 하고 싶은 일 끝까지 힘껏, 신념 껏, 재주 껏 해보라고, 그러면서 너그럽고 여유 있게 삶의 기쁨을 나누면서 맛보라고, 다시 말해 끝없이 열심히 배우고 죽도록 사랑하면서 진실로 이상적으로 살아보라는 것이다.

 

'밑 빠진 독'처럼 욕심이나 야망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것이 사람의 가슴이고, 말라버린 샘터나 가시넝쿨같이 미움이나 시샘으로는 절대로 키울 수 없는 것이 우리 '사랑하는 가슴'이 준 말 '사슴'이다.

 

받고 받아도 더 받고 싶은 수렁같은 마음(魔淫)밭이 욕심이라면 주고 또 줘도 더욱 더 끝없이 한없이 주고 싶은 '사슴의 마음' 곧 사랑 '' () 마음 '' ()를 우물 판 '사음'이 사랑으로 끝없이 한없이 샘솟으리.

 

그래서 앞서 말한 내 쌍둥이 이름 '해아' 뜻 그대로, 태양의 정열과 창공의 희망을 갖고, 순진무구한 동심과 진정한 모성애 넘치는 바다의 낭만을 지닌 태양과 바다의 아이로 진실의 얼굴에서 모든 그늘 사라지고 영원한 젊음이 햇빛처럼 찬란히 아름답게 빛나라.

 

진실이 생부(生父) 양부(養父) 대부(代父) 계부(繼父)는 아니지만

엑스트라(extra) 아빠 여부(餘父) 여부(與父)로서 여부(如父)

되고 싶어 하는 이태상이 이렇게 불청객의 공개편지를 쓴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14 11:13 수정 2020.09.13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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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