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골짜기의 요정들’과 ‘반항의 정신’(I): 마르타(Martha)

이태상

 



‘20세기의 단테라고 불리는 시인이자 철인이요 화가이기도 한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1883년 레바논에서 태어나, 1931년 울울창창한 레바논 삼()나무 향기 그윽한 곳에 묻힐 때까지, 지난 한 세기에 걸쳐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계속 베스트셀러가 되어 온 책들을 처음엔 아랍어로, 그가 열두 살이 되던 해 미국 보스턴으로 이주한 후로는 영어로 그것도 고유한 그의 독특한 지브란 영어 (Gibran English)’로 썼다.

 

그의 작품은 수십 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며, 그의 그림들은 세계 각국에서 전시되고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Auguste Rodin 1840-1917)에 의해 영국의 시인이며 화가였든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작품에 비견 되었다.

 

1978년 우리말로는 내가 처음으로 번역, 소개한 지브란의 문제작 <반항(反抗)의 정신(精神) Spirits Rebellious, 1948>은 이보다 앞서 내가 월간지 <思想界> (시인 김지하 씨의 담시譚詩 오적필화 사건으로 1970년 폐간됨)에 연재한 바 있는 <골짜기의 요정(妖精)Nymphs of the Valley, 1948)>의 속편으로 1908년 이 책이 아랍어로 나오자, 당시 레바논을 침략, 지배하고 있던 터키의 오토만 제국(The Ottoman Empire 1299-1923) 정부는 위험하고 혁명적이며, 청소년들에게 해롭다는 이유로, 이 책을 모조리 압수하여 베이루트 광장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지브란은 교회로부터 파문당함과 동시에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 후 30여 년간 그는 뉴욕에 거주하면서 그의 신비스러운 그림과 함께 많은 책들을 영어로 썼다.

 

조국이 그대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그대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으라.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고 한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 35대 미국 대통령의 유명한 말도 실은 지브란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지브란은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통해, 우리에게 참된 용기와 사랑을 일깨워 주고, 위선과 독선을 철저하게 매도하면서, 불의와 부정을 용서 없이 규탄한다.

 

<골짜기의 妖精>에 수록된 세 이야기의 세팅은 다 레바논인데, 그 첫 번째 스토리 마르타(Martha)’는 레바논 산골짜기 외딴 마을에서 젖소를 몰며 자라다 꽃봉오리 채 피어보기도 전에 꺾이듯 짓밟힌 한 가난하고 순진한 시골 소녀가 도시에 버려져 죽어가면서 고향 마을 젊은이로부터 위로와 위안을 받는 이야기다.

 

그 두 번째 스토리 만고의 티끌과 구원의 불길 Dust of the Ages and The Eternal Fire’은 고대 바알(ancient Baal)에서 사별한 두 연인이 2천 년이 지나 환생 재회하는 러브스토리이다.

 

그 세 번째 스토리 광인(狂人) 유한나 Yuhanna the Mad’는 온갖 기득권의 특권을 독점한 수도원에 반기를 든 한 참된 크리스천의 초상화로 진정한 지혜를 가진 자를 세상은 미친 광인으로 낙인찍는 이야기다.

 

<反抗精神>에는 네 개의 이야기가 있다. ‘마담 로즈 하니 (Wardre’ Al-Hani)’는 부유한 남편을 떠나 자기가 사랑하는 가난한 남자를 찾아간 이야기이고, ‘무덤들의 외침(The Cry of the Graves)’은 강자의 횡포에 약자가 무참하게 희생되는 이야기이며, ‘어느 신부의 첫날밤(The Bridal Couch)’은 기쁨으로 시작된 혼인 잔치가 슬픔으로 끝나는 사랑의 비화(悲話) 이다. 이것은 19세기 말엽 북부 레바논 지방에서 있었던 실화라고 한다.

 

지브란의 사상을 <골짜기의 妖精>에서는 광인(狂人) 유한나 Yuhanna the Mad’가 그러듯이, <反抗精神>의 네 번째 스토리 이단자(異端者) 카릴 Khalil the Heretic’에서는 카릴이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유한나와는 달리, 카릴은 그의 생전에 정의가 불의를 끝내 이기고 승리하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이 보게 되는, 더 좀 강건하고 굳센 인물로 등장한다.

 

이 두 작품 <골짜기의 妖精><反抗精神>에서 상징적으로 전해주는 지브란의 철학적이고 신비로운 메시지는 그릇된 풍조와 물질만을 추구하는 현대인 특히 오늘날 코로노바이러스 때문에 암담한 미래에 직면해 절망적인 인류 우리 모두에게 갈 길을 밝혀 주는 등불 아니 별빛이 되고 있다.

 

마르타

 

1.

갓 태어나서 아버지를 여의고 열 살이 되기 전에 어머니마저 잃어 고아가 된 소녀는 가난한 이웃집에 얹혀, 레바논 산골짜기 외딴 마을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소녀에게 남겨 준 것이라고는 마르타란 이름뿐이었고, 어머니에게서는 슬픔의 눈물만 물려받았다.

 

제가 태어난 땅이건만, 마르타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아침이면 마르타는 다 해진 헌옷을 걸치고 맨발로 젖소를 몰고서 들로 나갔다. 한낮이 되면 마르타는 풀이 무성한 골짜기 나무 그늘에 앉아 산새들의 노래에 귀 기울이고, 꽃과 나비에게 눈길을 주다가는 언제고 굶주릴 걱정이 없는 젖소를 마냥 부러워하면서, 흐르는 시냇물에 하염없이 눈물을 띄워 보냈다.

 

지평선 저 너머로 해가 지고,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파 오면, 마르타는 오두막집으로 돌아와 주인집 딸 곁에 앉아서 옥수수빵 조각에 마른 과일 부스러기를 허겁지겁 먹고서는 헛간 땅바닥에 마른 짚을 깔고 누워, 꿈도 꾸지 않고 다시는 깨지도 않는 길고 깊은 잠이 들기를 바라면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 마르타는 어김없이 주인 아저씨의 거친 발길에 차여 단잠을 깨야만 했다. 가엾은 소녀 마르타는 이렇게 어린 시절을 두메산골 눈물의 골짜기에서 보냈다.

 

이처럼 불우한 소녀에게도 봄은 찾아오는 것일까. 마르타의 가슴속엔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풀내음 꽃향기에 가슴이 울렁이고 야릇한 생각에 꿈이 부풀었다. 어느새 소녀가 여인이 되고있는 증거일까. 천진하고 순결한 소녀의 외로운 영혼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따라 산골짜기를 유랑하게 된 것이 그 누구의 섭리에서였을까. 그 어느 미지의 신() 의 그림자처럼, 마르타는 인적이 드믄 외딴곳으로만 떠돌았다.

 

복잡하고 붐비는 도시에서만 살아온 우리는 저 깊은 산골짜기 두메 마을 사람들의 삶을 알지 못한다. 현대문명의 흐름 속에 떠밀려 가고 있는 우리는 정결한 마음의 여유나 단순한 삶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산다. 우리는 소음과 먼지 속에서 보고 듣는 것이 없어도, 저들 시골 사람들은 대자연의 갖가지 조화 속에서 풀잎에 반짝이는 아침 이슬을 보고,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많은 것을 뿌리나 거두는 것이 없되, 저들은 그들이 뿌리는 것을 거두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의 노예로되, 저들은 자족함을 아는 그들 스스로의 주인이 아닌가. 우리는 절망과 두려움으로 탁해진 인생의 괴로움이 엉긴 쓴 잔을 들되, 저들은 맑은 삶의 단물을 마시지 않는가.

 

마르타는 가슴 부풀어 오르는 열여섯 살이 되었다. 소녀의 영혼은 들판에 벌어지는 온갖 아름다움을 비춰 주는 맑게 닦인 거울과 같고, 소녀의 마음은 모든 소리를 메아리쳐 주는 깊은 산골짜기 같았다. 삼라만상이 애조를 띈 어느 가을날,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낙엽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마르타는 샘 곁에 앉아 있었다.

 

이때 갑자기 골짜기의 부서진 돌멩이를 튕기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말 탄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옷차림으로 보아 부유한 도시 사람이라는 걸 이내 알 수 있었다. 말에서 뛰어 내린 그는 마르타가 지금까지 아무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도중에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해변으로 가는 길을 좀 일러주시겠습니까?”

 

샘가의 어린 나뭇가지처럼 마르타는 똑바로 서서 대답했다.

 

저는 모르겠어요. 저의 집 어른에게 가서 물어보고 올게요.”

 

마르타가 길을 물으러 가려 하자,

 

아니, 가지 마십시오.”

 

말하는 사나이 눈빛이 갑자기 불타올랐다. 마르타는 그대로 멈춰 서서 이상하게도 사나이 음성에서 자기를 꼼짝 못하게 하는 힘을 느꼈다. 마르타는 사나이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는 마르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바라보는 뜻을 마르타는 알 수가 없었다. 사나이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마르타는 그 달콤한 미소에 그만 매혹되어 버렸다. 사나이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마르타의 벗은 발과 어여쁜 손목과 매끄러운 목, 부드럽고 숱이 많은 머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사나이는 정염(情炎)이 타오르는 눈으로 마르타의 햇볕에 그을려 아름답게 빛나는 피부를 눈여겨보았다. 마르타는 수줍어하며 잠자코 있었다.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도 않고, 별스럽게도 말을 할 기력조차 없어진듯 싶었다.

 

그날 저녁 마르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젖소들만 우리로 돌아왔다. 주인아저씨가 밭에서 돌아와 마르타가 없어진 것을 알고, 골짜기마다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마르타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 보아도 깊은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메아리와 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 외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잃어버린 마르타를 가엾게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밤에 마르타가 사나운 들짐승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꿈을 꾸었다며 주인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유리창에 서린 어린아이의 숨결처럼 스러져간 애처로운 기억 외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마르타는 이 외딴 산골짜기 조그만 마을로부터 사라졌다.

 

2.

 

북부 레바논에서 대학의 여름 방학을 보낸 후인 1900년 가을, 나는 베이루트로 돌아왔다. 가을 학기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한 주일 동안, 평소 집에서나 강의실에서 학과에 쫓겨 맛보지 못하던 자유를 만끽하면서 시내를 두루 돌아다녔다. 닫혔던 새장의 문이 열려 자유스러워진 새가 탈출의 기쁨에서 여기저기 마구 날아보듯이

 

청춘은 진정 아름다운 꿈. 하지만 그 꿈의 감미로움도 책과 씨름하다 보면 자칫 무의미해지고, 그러다 그 꿈에서 깨어나면 거칠고 삭막한 세계를 만나 환멸(幻滅)의 비애(悲哀)를 맛보게 된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꿈들을 현실과 잘 조화(調和)시켜, 평생토록 우리들 마음속에 쉬임없는 배움의 희열(喜悅)을 누릴 수는 없을까.

 

자연 바로 그것이 인간의 스승이 되고, 휴머니티 그것이 바로 책이 되고, 인생 그 자체가 학교가 되는 시대가 언제나 우리에게 올까. 하늘로 향헤 뻗어나는 나무들처럼, 우리 인간도 늘 위로 향한 정신의 성장(成長)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절실히 느낀다. 창조(創造)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이 또한 성장할 것이고, 진정한 우리의 행복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나는 갖는다.

 

어느 날 저녁 나는 하숙집 문 앞에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면서, 장사꾼들이 저마다 제 물건이 제일 좋다고 외쳐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때 한 어린아이가 내게로 다가왔다. 한 다섯 살쯤 되었을까. 다 해진 옷을 입은 이 아이는 어깨에 저보다도 더 큰 꽃바구니를 메고 있었다.

 

가냘프고 좀 쉰듯한 목소리로, 소년은 나에게 꽃 한 송이만 사 달라고 했다. 그의 핏기 없는 얼굴의 풀이 죽어 어두운 두 눈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측은한 마음에 조금 웃어 주었다. 그것은 마음속 깊은 데서 나오는 눈물이 뒤섞인 조용한 웃음이었다. 나는 그의 꽃을 한 송이 샀다.

 

그러나 내가 정말 사고 싶었던 것은,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고 곱게 자랄 나이에 길거리에 나와서 꽃을 팔아야만 하는 이 어린아이의 슬픈 사연이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가난한 사람들의 비극은 흔한 일이라 좀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웬일인지 이 어린아이의 시무룩한 표정 뒤에 씌어 있을 슬픈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내가 그에게 친절한 말을 건네자, 그는 의아한 듯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항상 들어 온 거칠고 심한 말들에 익숙해 있을 뿐 동정하고 감싸 주는 따뜻한 말에는 익숙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의 이름을 물었다.

 

후아드에요.”라고 소년은 땅을 내려다보면서 대답했다.

 

부모님은?”

 

마르타의 아들이에요.”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아이처럼 조그만 고개를 저었다.

 

후아드, 그러면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집에요. 엄마는 아파요.”

 

소년의 입에서 나온 이 몇 마디 말이 나의 귓전을 때렸다. 마음속 깊은 데서 이상하고 서글픈 감정이 북받쳤다. 그럼 이 아이가 바로 그 언젠가 저 외딴 산골 마을에서 들은 적이 있는 소녀 마르타의 자식인가? 불우했던 소녀 마르타가 지금은 베이루트에서 병고(病苦)에 신음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들이 내 머리를 스치는 동안, 이 어린 소년은 나를 줄곧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순진한 마음의 눈은 내 아파하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너의 어머니를 만나 보고 싶은데 같이 좀 가자.”

 

소년은 좀 이상하다는 듯, 그러나 아무 말 없이 내 앞을 서서 길을 안내했다. 가다가는 때때로 내가 자기 뒤에 오고 있나 확인이라 도 하려는 듯 뒤를 돌아다보곤 했다. 우리는 더러운 거리를 내쳐 걸었다. 공기는 탁했고, 곧 쓰러질 듯한 낡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윽고 우리가 이 음침한 도시 변두리에 이르자, 그는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다 무너지고 한 모퉁이만 앙상히 남은 누추한 집으로 들어갔다.

 

어린 소년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서자, 내 심장은 급히 뛰기 시작했다. 방 안 공기는 음습(陰濕)하고, 가구라곤 약한 불빛으로 어둠 속을 희미하게 비춰 주는 램프와, 가난과 빈곤과 궁핍을 말해 주는 침상뿐이었다. 침상에는 얼굴을 벽 쪽으로 향한 채 잠든 여인이 누워 있었다. 무정하고 모진 세상에서 피난처를 찾듯, 아니면 차디찬 돌벽에서 인간의 마음보다는 한결 더 따사로움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년은 엄마 엄마부르면서 여인 곁으로 갔다.

 

여인은 고개를 돌려 나를 가리키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 여인은 오랜 세월의 수난(受難)에 찌든 목소리로 울부짖듯 말했다.

 

무엇을 원하시는 건가요? 당신의 욕정(慾情) 때문에, 내 생명의 마지막 한 오라기까지 사서 나를 욕되게 하시려는 건가요? 가세요. 거리에는 육체와 영혼을 함께 값싸게 파는 여자들이 수두룩해요. 하지만 나는 이제 팔게 없어요. 죽음이 곧 나를 데려가려 하고 있어요.”

 

나는 여인이 누워 있는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여인의 말은 마음속 깊이 나를 감동시켰다. 슬픔이 압축된 애화(哀話)이기에, 나는 여인에게 내 슬퍼하는 마음이 잘 전달되길 바라면서 말했다.

 

나를 두려워 마십시오. 먹이를 찾아 헤매는 짐승이 아니라, 슬퍼하는 사람으로서 여기 찾아온 것입니다. 나도 산림이 울창한 숲속 산골짜기 마을에서 자란 시골 사람입니다. 마르타 나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인은 내 말에 귀 기울였고, 내 말이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나오는 것인 줄을 알았는지, 그녀는 겨울바람에 앙상히 남은 나뭇가지처럼 몸을 떨었다. 옛날의 두렵고 쓰디쓴 기억에서 자신을 숨기고 싶었는지,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숨이 서린 침묵이 흐른 뒤, 떨리는 두 어깨 사이로 여인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여인의 움푹 팬 두 눈은 방 안의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여인의 마른 두 입술은 절망으로 떨리고 있었다. 다가오는 죽음이 목구멍 속에서 끄르륵거리고, 깊은 신음소리가 단속적(斷續的)으로 흘러나왔다. 여인은 숨차하면서 말을 꺼냈다.

 

당신은 친절과 동정에서 찾아오셨군요. 죄 많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길잃은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것이 훌륭한 일임에 틀림없겠지요. 그렇지만 어서 이곳을 떠나 당신이 온 곳으로 돌아가 주세요. 잠시라도 이곳에 계심으로써 당신은 수치를 당할 것이고, 저에 대한 연민(憐憫)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멸시를 받게 될 뿐이니까요. 이 더럽고 추한 방에 계신 것을 누가 보기 전에 어서 돌아가세요. 어떤 행인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외투로 얼굴을 가리고 발걸음을 빨리하세요. 당신의 가슴을 메우고 있는 연민의 정이 저의 순결(純潔)을 되찾아 줄 수는 없을 거예요. 저의 죄를 씻어주지도 못할 것이며, 죽음의 거센 손길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지도 못할 거에요. 어리석었던 죄로 저는 이 어둡고 깊은 나락(奈落)에 떨어지게 된걸요. 당신의 동정심으로 해서 당신 스스로를 욕되게 하지 마세요. 저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목숨이에요. 저를 가까이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당신을 더럽다고 멀리하려 들 거에요. 어서 돌아가세요.

 

저 맑고 아름다운 신골짜기 마을에 돌아가시더라도, 제 이름은 입밖에도 내지 말아 주세요. 그래도 저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 된다면, 저주받은 마르타는 죽었다고 말씀해 주시고, 다른 말은 아무 말씀도 하지 말아 주세요.”

 

여인은 말을 멈추고, 아들의 조그만 두 손에 입을 맞추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여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내 아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면서 이 아이는 죄의 씨’ ‘창녀 마르타의 아들’ ‘사생아라 하겠지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더 심한 말도 하겠지요. 그들은 결코 이 아이의 엄마가 고뇌 (苦惱)와 눈물로 그의 생애를 정화(淨化)시키고 속죄(贖罪)한 것을 알지 못하겠지요. 나는 이 어린 것을 무정한 세상에 외로운 고아로 버려둔 채 죽을 거예요. 이 아이가 겁쟁이고 약골이면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것이고, 용기 있고 의롭다면 피가 끓어 분노하겠지요. 하나님이 이 아이를 보호하시어 의롭고 용기 있는 남자로 크게 해 주신다면, 그는 맹세코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기와 자기 엄마를 학대하고 불행하게 만든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맞서서 싸우게 될 거에요. 그랬다가 언젠가 이 고뇌에 찬 세상에서 해방되어 죽게 되는 날, 빛과 안식(安息)이 있는 저세상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나를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나는 말했다.

 

마르타, 당신은 스스로 죄인이라 하지만, 결코 죄인이 아닙니다. 비록 인생이 당신을 불결한 자의 수중에 두었다 할지라도 당신은 결코 불결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찌꺼기는 순결한 영혼에 손을 뻗어 미칠 수 없고, 눈더미가 살아 있는 씨앗의 생명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인생이란 우리 영혼의 이삭들이 타작되는 마당입니다. 이 슬픔의 타작마당을 거치지 않는 이삭은 땅의 개미가 물어가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가, 결코 주인의 창고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마르타 당신은 짓밟힌 분입니다. 남을 짓밟는 자가 되느니보다 짓밟힘을 당하는 자가 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세력 있는 자가 되어 남의 청춘과 인생을 짓밟고 망가뜨리느니보다 약한 인간 본능에 희생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영혼은 신의 목걸이에 달린 한 개의 고리, 비록 사나운 불길이 그 모양을 비틀어, 둥글고 아름다운 형상을 찌그러뜨릴지는 몰라도, 그 본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그것은 오히려 전보다 더 빛나게 만듭니다.

 

당신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의 발굽에 짓밟힌 한 송이 꽃입니다. 비록 포악한 발굽이 당신을 짓밟았을지라도, 정의(正義)와 자비(慈悲)의 근원인 하늘로 피어오르는 당신의 슬픔과, 어린 고아의 울음과, 한 젊은이의 한숨이 담긴 향기는 소멸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마르타, 당신은 짓밟힌 꽃이지, 꽃을 짓밟은 발굽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위로를 삼으십시오.”

 

내 말에 여인은 한결같이 귀를 기울였다. 여인의 얼굴엔 석양에 구름이 낙조(落照)를 드리우듯 위안의 빛이 떠올랐다. 여인은 나에게 자기 곁에 앉으라고 몸짓했다. 나는 여인의 곁에 앉았다. 여인의 표정에는 임종이 가까움을 아는 듯 짙은 애조(哀調)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다 부서져 못 쓰게 된 침상 곁에서 죽음이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바로 기진맥진하여 생존의 사슬에서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여인은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모으듯 말을 이었다. 여인의 말에는 눈물이 배어있었고, 숨결마다 여인의 슬픔이 차 있었다.

 

, 저는 남자들 속에 숨어 있는 짐승의 밥이었어요. 네 말씀하신 대로 저는 짓밟힌 꽃이에요. 저는 그가 말을 타고 지나갈 때 샘가에 앉아 있었어요. 그는 친절히 말을 걸어오고는 저보고 아름답다고 했어요. 저를 버리지 않겠다고 했지요. 그리고는 산골짜기는 새나 짐승이 사는 곳이라고 말하면서, 저를 가슴에 안고 입맞춤을 했어요. 저는 고아로 자란 까닭에 그때껏 어느 누구에게서도 입맞춤을 받아 본 일이 없었어요. 그는 자기 말 뒷잔등에 저를 올려 태우고 도시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어느 아담한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제게 값진 옷과 향수와 맛있는 음식을 주었어요. 미소를 지으면서 이 모든 것을 주었지요. 그러나 그의 다정한 말과 자애로움 뒤에는 야수(野獸)와 같은 욕정(慾情)이 숨겨져 있었어요. 저의 몸과 마음을 한껏 즐기고, 제 몸속에 새 생명까지 심어 놓고서, 그는 떠나가 버렸어요.

 

새 생명은 빨리도 자라나 세상의 빛을 보았고, 저는 눈물로 나날을 지냈습니다. 외로운 집에 저와 젖먹이 어린 것을 굶주림과 추위 속에 내버려 두고 떠나가 버린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요. 저는 슬픔과 뉘우침으로 밤낮을 지내는데 그의 친구들이 저 있는 곳을 알게 되고, 저의 궁핍과 약점을 알게 되었어요.

 

그들은 하나둘 번갈아 찾아와서는 돈으로 제 몸을 샀어요. 저를 욕되게 하고는 빵을 주었지요. , 몇 번인가 제 손으로 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그만두고 말았어요. 제 목숨은 저 하나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아기가 제 생명의 일부였기 때문이지요. 이제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어요.”

 

다시 한번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여인은 죽음의 빛이 덮인 눈을 치켜뜨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나님, 육신을 떠나는 제 영혼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옵소서. 비옵고 바라옵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의 오른손으로 저의 자식을 지켜 주시고, 당신의 왼손으로 저의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기운이 다한 듯 여인의 숨소리가 약해졌다. 비통하고 애절하게 아들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눈을 내리뜨고, 여인은 침묵에 가까운 낮은 음성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여인의 음성이 멎었다. 여인의 입술은 잠시 계속 움직였다. 한 번 큰 숨을 몰아 내쉬더니, 곧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인이 숨을 거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응시한 채로

 

새벽녘이 되어 마르타는 나무로 짠 관에 입관(入棺)되었고, 두 가난한 사람의 어깨에 메어져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황폐한 들에 묻혔다. 여인의 죽음에 명복을 빌어 줄 승려(僧侶)도 없었고, 십자가가 세워지는 묘지에 잠들 수도 없었다. 여인의 어린 아들과 삶의 고달픔에서 연민을 배운 또 하나의 소년 이외에는 아무도 장지까지 따라가 슬퍼해 주는 이가 없었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16 10:53 수정 2020.09.13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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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