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황성옛터

황성옛터


1928년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
 

황성의 적’(荒城)이던 원래 이름이 황성(荒城)옛터로 바뀐 시기와 이유는 언제쯤 밝혀낼 수 있을까. 이 노래는 1928년에 전수린이 기타로 멜로디를 먼저 튕기고, 그 선율을 오선지에 옮겨 적던 왕평이 노랫말을 엮어서 이애리수가 부른다. SP음반으로 제작된 시기는 1932, 우리나라 최초의 음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5만 여 장이 팔려 나간다.
 

황성 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지어요 // 성은 허물어져 빈 터 인데 방초만 푸르러 / 세상의 허무한 것을 전하여 주노라 /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1~2)


▶ https://youtu.be/7TbZVQG2kNc
 

노래 속 황성(荒城)은 멸망하여 폐기(버려진), 고려의 송악산 만월대(滿月臺)를 지칭한 것. 개성 출생 왕건은 918년에 철원을 거점으로 하고 있던 태봉국 궁예를 제압하고 고려를 건국하고, 919년에 만월대에 도읍을 정했다. 이후 1392년 이성계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 35대 왕으로 즉위식을 한 곳이 만월대 수창궁 도창관이다.
 

당시 풍수가들은 만월대를 청룡과 백호가 좌우를 겹겹이 감싸고, 앞산이 중첩되게 명당을 호위하며, 사방 산신이 혈을 옹위하는 숨겨진 터라고 극찬을 하였었지만, 474년 만에 고려는 망했다. 왕건에서 공민왕까지 34.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 35대 왕으로 즉위했었는데, 역사는 이성계를 조선 태조부터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는 고려왕으로 반 년 정도를 통치하다가 13932월에 비로소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사용한다. 이때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들고 명나라에 허락을 받으러 갔던 예문관학사 주문사(奏聞使)가 칠삭둥이 한명회의 조부 한상질이다.
 

1928년 전수린과 왕평은 당시 순회극단 취성좌 소속으로 황해도 백천(白川)지방 공연 중이었다. 취성좌(聚星座)1918년 설립 대중연극을 주도하다가 1929년 해체한 신파극단. 19182월 김소랑(金小浪) 주도로 결성되었으며, 그의 처 마호정(馬豪政)이 자금지원을 하였고, 단성사(團成社)에서 창립공연을 했었다. 1920년대 단성사를 본거지로 야성·진중설·사람의 원수·불여귀등을 공연 큰 호응을 받았지만, 1923년 창립한 토월회(土月會) 등장으로 지방공연으로 밀려난다. 이 시기 황해도 배천지역을 순회공연을 하고 있었던 던 것. 이 극단 단원들이 이후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 모체요원이 된다.
 

애리수(본명 이음전)는 이 노래를 부른 후 인기 절정에 오르며, 연희전문에 다니던 배동필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남친 부모 반대에 부딪혀 두 번의 자살기도를 한 끝에 조건부 승낙을 받는다. 그 조건이연예계 은퇴 및 가정주부로 잠적’. 1933년 이애리수는 예술을 버리고 사랑을 택한 후 27녀의 어머니가 되었다. 75년이 흐른 2008, ‘황성옛터이애리수가 98세로 생존해 있다는 기사가 난다. 그리고 2009년 일산 백송마을요양원에서 99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녀1910년 개성에서 출생하여, 아홉 살에 희극배우 외삼촌을 따라 김도산의 신극좌에 들어가 무대에 올랐다. 연극 1막과 2막 사이에 노래를 부르는 막간가수. 예명 애리수는 엘리스(애리스·애리쓰)라는 외국 연예인 이름에서 따온 것. 외삼촌은 취성좌·조선연극사 등에서 활동한 희극배우 전경희, 외할머니는 개성에서 숙박업을 했단다. 1932년 그녀를 발탁한 사람은 빅타레코드 문예부장 이기세.
 

전수린은 본명이 전수남이다. 1907년 을사늑약 2년 후, 고종황제가 순종임금에게 강제로 양위를 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강제해산 된 그 해 개성에서 출생했다. 그는황성의 적·알뜰한 당신·나는 열일곱살·외로운 가로등등 대표작을 남기고 1984년 영원으로 나라로 가셨다.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서양음악을 접했으며,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선교사)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단다.‘황성 옛터는 그의 히트곡 시발이었고, 1970년대 한국가요반세기작가동지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작사가 왕평은 본명 이응호, 1908년 영천에서 출생하여 1940년 평안북도 강계(6.25전쟁 당시 북한 임시수도)에서 이승을 등졌다.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조선배우학교(1기생) 수료 후 1932년 포리돌레코드 조선지점 문예부장을 맡았다. 5~7세까지 청송군에서 살았고, 대표작은황성의 적·조선팔경가·항구의 일야이며, 작가로는 본명 이응호, 배우로는 예명 왕평을 사용했다.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그의 묘소에는 ‘황성옛터’노래비가 있다. 그는 필명을 이두희·청해·편월로도 썼는데, 2017년 그의 노래비 주변 소나무 숲(松林)에서 일제강점기에 송진(松津)을 채취한 V자형 상처를 아물고 있는 소나무가 발견됐다. 일본의 침탈 증거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당시 연간 4만여 톤의 송탄유(松炭油)로 비누·종이·도료를 만들어 전쟁물자로 사용했단다.


유차영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8.08.31 12:08 수정 2018.11.1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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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