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친구여! 구름 걷으려 성인봉에 오르지 않으련가

여계봉 선임기자



성인봉을 품은 6월 하순의 울릉도는 여름으로 달려가고 있다. 산의 모양이 성스럽다 하여 이름 붙여진 울릉도의 진산 성인봉(聖人峰)은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에도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다. 성인봉(986m)은 우리나라 섬 산 가운데 제주도 한라산(1,950m)을 제외하면 가장 높다. 같은 화산섬의 산이지만 해발 1,000m도 되지 않는 산이라고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산기슭이 가파른데다 길이 곧추서 있어 급한 숨을 내쉬어야 하는 곳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산행 내내 함께하는 양치류 원시림은 영화 `주라기공원'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울릉도 최고봉 성인봉을 오를 수 있는 등산로는 단조롭다. 공식적인 성인봉 등산로는 KBS 중계소 코스와 대원사 코스, 나리분지 코스 세 갈래뿐이다. 오늘 산행은 숙소인 저동에서 택시로 KBS 중계소까지 이동한 후 성인봉을 올랐다가 나리분지로 하산하는데, 전체 거리는 8.7이며 5시간 정도 소요된다.

 

새벽에 도착한 KBS 중계소 주차장에서 정상까지는 3.5로 거리가 짧고 비교적 완만해서 선호하는 코스다. 주차장 위 울릉도 특산물 삼나물 밭을 지나 숲으로 들어가면서 성인봉 산행이 시작된다. 새벽이라 숲은 산 공기가 소슬하다. 원시의 숲을 헤치고 한참을 올라가니 동이 트면서 하늘을 가린 너도밤나무와 향나무, 그리고 박달나무들의 차양이 물러나며 산기슭이 훤해지는데 거기 사동항이 내려다보이는 청명한 곳에 쉼터가 있다. 쉼터에 서서 이미 시작된 일출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KBS 중계소 주차장. 해발 266m로 정상까지 거리가 가장 짧은 산행 들머리다.

 

 

쉼터에서 바라본 사동항. 산자락에 대아리조트가 보인다.

 

 

빽빽이 들어서 하늘이 감추어진 아름드리 섬피나무, 섬고로쇠나무가 무성히 자란 숲길을 따라간다. 깊은 협곡 위에 세워진 나무데크와 출렁다리를 건너니 키 큰 너도밤나무 아래에 양치류가 초록색 융단을 깔아서 산객을 맞이한다. 출렁다리 아래 골짜기는 깊고 어둑하다. 골짜기는 빛깔도, 움직임도, 소리도 모두 흡입한 채 적멸에 들어가 있다. 출렁다리를 지나 조금만 가면 도동항 방향인 대원사에서 올라오는 산길과 만난다. 몸을 합친 산길은 하나가 되어 팔각정으로 이어진다. 팔각정에 서니 아침 햇살에 빛나는 도동항이 눈 아래로 펼쳐진다.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바다는 쏟아지는 햇빛을 반짝이는 은빛으로 산 위로 올려 보낸다. 새소리는 맑고, 육산인지라 발끝에 닿는 산길의 포근한 촉감과 가슴까지 스며드는 시원한 해풍 때문에 어깨춤이 절로 난다.


출렁다리에 서면 청신한 해풍이 온몸을 감싼다.

 

 

도동항을 붉게 적시는 태양의 장중한 교향악이 팔각정까지 들려온다.

 

 

비교적 평탄한 능선과 오르막이 반복된다.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보이고 햇살도 나무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 산허리를 감아 도는 길에서는 뭍에서의 산행과는 확연히 다른 이색적인 느낌을 맛볼 수 있다. 울릉도만의 자생식물과 산나물을 구경하며 산행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성인봉은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에 숲이 너무 울창해서 조망이 터지는 곳이 많지 않아 덜 매력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섬 산 특유의 원시림과 가파른 절벽의 지형을 감안한다면 100대 명산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산이다.

 

담백한 신록의 빛깔 사이로 산길 주변에 서있는 초목들이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낸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비경에 취해 결코 가깝지 않은 이 길을 피곤한 줄 모르고 걷는다. 이윽고 바람등대 능선에 올라선다. 이곳은 성인봉에 가장 빨리 올라올 수 있는 안평전(사동) 코스와 만나는 곳이다.


바람등대. 안평전 코스와 만나지만 이 코스는 산사태로 폐쇄되었다.

 

바람등대를 지나면 제법 가파른 산길이 기다리는데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맑아지는 듯하다. 중간의 쉼터에서 오른쪽으로 조망이 터진 말잔등과 천두산을 보면서 잠시 휴식한다. 저 산 너머 멀지 않은 곳에서 넘실대고 있을 울릉도의 파도와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녹음 속의 성인봉에서는 누구라도 마음이 편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키 작은 섬조릿대 군락지와 너도밤나무 숲이 이어지고, 폐쇄된 말잔등에서 오는 산길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나리분지와 정상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쉼터에서 바라본 말잔등과 천두산. 이 방향의 등산로는 입산 통제중이다.

 

 

정상 바로 아래 이정표. 정상에 올랐다가 이곳으로 내려와 나리분지로 하산한다.

 

 

성인봉에 올라 바위 위에 서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한 해안절벽과 울창한 원시림이 펼치는 장관에 잠시 넋을 잃는다. 어른 키보다 높게 자란 을릉도 특산수종 마가목들이 시야를 가려 몇몇 봉우리를 제외하면 잘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서 북으로 10m 내려서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여기서 바라보는 시원한 동해의 수평선과 나리분지 조망은 압권이다. 900를 넘는 말잔등, 형제봉, 미륵산을 비롯해 나리령, 나리봉, 알봉, 송곳산 등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에 에워싸인 평평한 나리분지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다. 흰 색 꼬리를 달고 달리는 배들은 생동감 넘치는 풍경화 속의 작은 소품처럼 보인다. 어디 그 뿐이랴. 해안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성인봉 정상(984m)에 우뚝 선 사람들은 이 순간만은 성인들이다.

 

정상의 마가목 너머로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들과 끝없이 펼쳐지는 동해 바다는 가히 환상적인 앙상블을 이룬다.

 

 

하산 길은 계단의 연속이다. 가파른 계단 길을 300m쯤 내려서면 나오는 성인수 약수터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숲 터널을 10여 분 걸으면 신령수 약수터가 나온다. 태고의 신령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성인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마시니 신선이 된 기분이다. 여기서부터 나리분지까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리분지 원시림이다. 섬단풍, 우산고로쇠, 섬피나무 등 울릉도에서만 나는 나무와 고비·고사리 같은 양치식물과 산나물이 빽빽하고, 연평균 300일 이상 안개에 쌓여있어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신령수길'로도 불리는 숲길을 지나면 몸과 마음은 초록빛으로 물든다. 길옆으로 울릉도에만 있는 자생나무와 식물을 소개하는 입간판이 서 있다. 부지깽이(섬 쑥부쟁이), 명이, 노랑털 머위꽃, 미역취, 삼백리향 등등 하나하나 이름을 읽어가며 걷다 보면 어느새 나리분지다.

 

신령수와 나리분지는 잇는 신령수길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250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해 만들어진 울릉도에서 유일한 평지가 나리분지(羅里盆地). 나리동은 입도한 개척자들이 섬말나리의 뿌리를 캐 먹으며 목숨을 연명해왔다는 눈물겨운 이름이다. 나리동에는 독특한 형태의 투막집과 너와집이 있다. 투막집은 통나무와 나무껍질로 지은 집으로, 옥수숫대나 억새로 지붕을 덮고 둘레도 촘촘하게 막았다. 너와집은 통나무로 집을 짓고 지붕에 돌을 잔뜩 올린 집이다. 억새 투막집 앞 삼거리를 지나 천연기념물인 울릉국화와 섬백리향 군락지를 지나면 버스 종점이 있는 주차장에 닿게 되고 오늘의 산행도 마침표를 찍는다.

 

칼데라가 함몰되어 생긴 분지 주위를 외륜산들이 감싸고 있다.

 

복원된 너와집. 비바람 잦고 척박한 이곳에 정착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나리분지 토속식당으로 들어서니 야외 식당에는 소금기 묻은 바람이 애인의 손길처럼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주위 숲에서 풍겨 나오는 꽃향기는 탁자 위까지 올라온다. 나리분지에서 나는 마가목 씨껍데기 동동주에 삼나물 무침과 부지깽이나물로 산행의 고단함을 덜어낸다. 문득 고개를 드니 건너편으로 보이는 성인봉 봉우리에는 구름이 걸쳐있고, 한가로운 한낮의 식당은 평화와 고요에 젖어있다. 동동주 몇 잔에 취기가 오르자 혼자서 주절거린다.

 

나리동 집터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구름 걸친 성인봉 봉우리는 수심을 머금었네

친구여!

구름 걷으려 성인봉에 오르지 않으련가

 

나리분지에서 버스를 타고 천부항으로 내려가는 길은 꼬부랑길이다. 내리막으로 접어들면서 초록색은 푸른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오늘 지나온 초록 길을 잊지 않으려고 되뇌어본다.

 

성인봉 가는 길은 원시림 숲 우거진 미답(未踏)의 길

나리분지 내려서는 길은 진한 그리움으로 찾아가는 길

이 길들은 삶이 힘들 때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치유의 길





여계봉 선임기자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29 14:08 수정 2020.09.12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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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