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춤을 추어 볼거나, 다 좋으니까

이태상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8.11 10:50 수정 2020.08.11 21:47

 

현재 전 세계 온 인류는 인재(人災)라고 해야할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장마, 홍수 등 자연재해(自然災害)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몸살과 맘살을 앓고 있다. 이 시점(時點/視點)에서 무슨 수를 쓴다 해도 가망이 없는 절망과 체념의 상태를 일컫는 말로 만사휴의(萬事休矣)’란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떠올리리라. 이럴 때 우리는 성철 스님의 어록 중에서 이 한 마디 음미해보자.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걱정할 거면 딱

두 가지만 걱정해라

 

지금 아픈가?

안 아픈가?

 

안 아프면

걱정하지 말고

아프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나을 병인가?

안 나을 병인가?

 

나을 병이면

걱정하지 말고

안 나을 병이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죽을병인가?

안 죽을병인가?

 

안 죽을병이면

걱정하지 말고

죽을병이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천국에 갈 것 같은가?

지옥에 갈 것 같은가?

 

천국에 갈 것 같으면

걱정하지 말고

지옥에 갈 것 같으면

지옥에 갈 사람이

무슨 걱정이냐?

 

그렇지만 천당과 지옥이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경험하는 것이라면 우리 각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으리라. 그리고 우리 모두 우주에서 태어나 별에서 별로 여행하는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으로서 우리의 우주여정(旅程)의 역정(歷程)이 모두 다 좋다고 할 수 있지 않으랴.

 

오는 토요일 2020815일이면 해방 75주년을 맞아 국내적으로는 또 한바탕 친일이다 반일이다 좌파우파다 시끄럽겠지만, 우리 냉철히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조상이 힘이 없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나라를 잃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6.25란 동족상잔까지 겪었으며 아직도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미친상태가 아닌가. 우리 한민족의 비극은 하루빨리 어서 끝내고 남북통일을 평화적으로 이루기 위해 잘사는 남한이 못사는 북한을 끌어안는 통 큰 대북정책이 필요하지 않은가.

 

청소년 시절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너무도 감명 깊게 읽고 분통이 터졌었다. 한국역사의 흐름이 크게 잘못되기 시작한 것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이라 본 것이다.

 

고려 말기 1388(우왕 14)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이 철령(鐵嶺) 이북의 영토는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는 요구에 맞서 최영 장군은 팔도 도통사,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삼은 요동정벌군이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르렀을 때 이성계가 개경(開京)으로 회군한 사건 말이다.

 

몇 년 전 글씨에서 찾은 한국인의 DNA’란 부제가 붙은 책이 나왔다. 2009년 항일운동가와 친일파의 필적을 비교 분석한 책 <필적은 말한다>를 펴냈던 저자 구본진이 비석과 목간-방패-사리함 등 유물에 남아 있는 글씨체에서 우리 민족성의 본질을 찾아내는 <어린아이 한국인>을 출간한 것이다.

 

지금 한국인의 발목에는 격식과 체면과 겉치레라는 쇠사슬이 잘가당거리지만 이는 오랜 중국화의 역사적 산물일 뿐, 원래 한민족은 인류 역사상 가장 네오테닉(neotenic 유아기의 특징이 성년까지 남아 있는 현상을 말함)한 민족이었다며 우리 민족은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치면서 장난기가 가득한 어린이 기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우리 민족의 이런 어린이스러움은 고려시대 이후 중국의 영향으로 경직되었으나 19세기 이후 중국의 위상이 떨어지면서 부드럽고 자유로운 한민족 고유의 품성과 글씨체가 다시 살아 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향후 연구 과제도 제시한다. 중국 만리장성 외곽에서 발견된 홍산문화가 우리 민족과 관련된 문화일지 모른다는 주장인데, 그 근거 역시 글씨체다. 황하문명보다 1,000년 이상 앞선 홍산문화 유물에 남아 있는 글씨체가 고대 한민족의 글씨체와 유사하다면, 이야말로 세계역사를 바꿔놓을 단서임이 틀림없다.

 

어떻든 이 아이스러움이란 우리 한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계 인류 모든 인종과 민족에게 공통된 특성이 아닐까. 이 순수하고 경이롭고 신비로운 동심을 갖고 모두 태어나지만 타락한 어른들의 잘못된 세뇌교육과 악습으로 아동낙원(兒童樂園)’을 잃는 실락원(失樂園)의 비극이 시작되었어라.

 

, 그래서 나의 선친 이원규(李源圭 1890-1942)도 일제 강점기 초기에 손수 지으신 동요, 동시, 아동극본을 엮어 <아동낙원 (兒童樂園)>이란 책을 500부 자비로 출판하셨는데 집에 남아 있던 단 한 권마저 6.25 동란 때 분실되고 말았다.


, 또 그래서 나도 딸 셋의 이름을 해아海兒(첫 아이로 쌍둥이를 보고 한 아이는 태양 그리고 한 아이는 바다 ()’로 작명했으나 조산아들이라 한 아이는 난 지 하루 만에 세상 떠나고), 수아秀兒와 성아星兒라 이름 지었다. 평생토록 젊음과 동심을 갖고 살아주기를 빌고 바라는 뜻에서다. 간절히 빌고 바라건대 바다의 낭만과 하늘의 슬기와 별들의 꿈을 먹고 살라고, 이와 같은 기원과 염원에서 아이 () 돌림으로 한 것이다.

 

정녕코 복()이야 명()이야, 우리 모든 어른들도 어서 잃어버린 동심을 되찾아 복낙원(福樂園)’ 하리라. 그러자면 우선 일본열도의 토착민인 조몬인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야요이인이 혼혈을 반복해 현재의 일본인이 됐다는 혼혈설을 뒷받침하는 DNA 분석 결과가 나왔다는 최근의 일본 언론보도가 아니더라도, 우리 고대 가야와 백제의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서는 지난 과거지사는 과거지사로 돌리고 미래 지향적으로 좀 더 대국적인 견지에서 선린정책을 펼쳐야 하지 않겠는가.

 

2015년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 간 합의에 최종적이며 비가역적인 해결이란 단서에 사용된 이 비가역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변화를 일으킨 물질이 본디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일로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201618일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이 절판 70년 만에 재출간 됐다. 이 책은 192536세의 히틀러가 뮌헨 폭동으로 투옥됐던 당시 나치즘의 사상적 토대를 정리한 자서전이다. 그간의 출간 금지는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과는 달리 뉘우칠 줄 아는 독일 양심의 상징처럼 묘사돼 왔는데, 이 악명 높은 책이 다시 나오게 되자 세계 언론에선 나치즘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한 조치라고 합리화하며 미화했다.

 

일본군이 우리 윤동주 시인을 비롯해 수많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생체실험 했다지만 독일도 1904년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땅을 뺏기 위해 헤레로, 나마족을 무참히 살해하고 생존자 2,000여 명을 강제수용소에 쳐넣고는 생체실험을 한 후 시체는 연구용으로 썼다지 않나.

 

그런데도 독일은 거듭되는 나미비아 정부의 사과 요구에도 100년이 지난 2004년에야 학살 사실을 인정했지만 그것도 총리가 아닌 경제개발 장관이 연설을 통해 한마디 한 게 전부고, 경제적 배상은 계속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독일은 왜 유대인에게만 고개를 숙이나. 말할 것도 없이 미국 내 유대인의 영향력은 크고 강하지만 나미비아인은 미약하고 무시할 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불편한 진실은 국제사회 인간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계에서도 항상 통용되고 있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이 아닌가.

 

우리 인간이 가축을 사육해서 잡아먹고, 의료약품이나 미용에 필요한 화장품 개발을 위해 동물 생체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랴. 어디 그뿐인가.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개발로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면서 기후변화를 초래해 지상 모든 생물의 멸종현상을 재촉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뭣보다 인간이 먼저 멸종돼야만 한단 말인가?

 

그 해답의 열쇠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게 아닐까. 그야말로 반신반수(半神半獸)라 할 수 있는 인간이 불가역적 짐승으로 전락해버릴 것인가 아니면 가역적 신격(神格)으로 우리 인격 (人格)을 높여볼 것인가. 영어로 개를 ‘dog’이라 하지만 이 단어를 거꾸로 보면 신() ‘god’이 되듯이, 실존(實存)과 당위(當爲)를 뜻하는, 독일어로는 자인(sein)’졸렌(sollen), ’영어로는 투 비(to be)’옷트 투 비(ought to be)’란 기본동사가 있는데, 주어진 본능대로만 살아야 하는 짐승의 삶이 전자라면 본능을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인간의 삶은 후자이리라.

 

우리가 가역, 불가역 할 때 ()’이란 한자 거스를 ()’을 바꿀 ()’으로 대치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동물처럼 바꿀 수 없는 불가역(不可易)의 삶을 살지 않고, 창조적 가역(可易)의 자유라는 엄청난 특전을 받은 우리 인간이라면, 이보다 더한 특혜와 축복이 있을 수 있을까. 이야말로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이자 의무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선택받은 인간으로서 우리 실존(What we are)’이 조물주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면, 우리의 당위(What we become)’는 우리가 조물주에게 바치는 우리의 선물이 돼야 하리라.

 

동서고금 인류역사는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을 따라 세계 방방곡곡에서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역사의 제물이 되고 가해자 역시 피해자가 되고 있지만이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우리 동양 고유의 물아일체(物我一體)와 피아일체(彼我一體),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홍익만물(弘益萬物) 그리고 천도교(天道敎)의 인내천(人乃天), 곧 코스미안 사상으로, 우리 한민족이 정신적이고 영적(靈的)인 지도력을 발휘, 지구촌을 지상낙원으로 만드는 코스미안시대를 열어가야 하리라.

 

어느 화창한 날에 바람이 재스민 향기로 내게 말했다.

재스민 향에 대한 보답으로 장미꽃 향을 줄 수 있느냐고.

 

내 정원의 꽃들이 다 시들어 내겐 장미꽃이 없다고 답하자

그럼 시든 꽃잎과 노랑 잎과 샘물이면 된다며 바람은 가고

 

맡겨진 정원을 어찌 가꿨느냐 자신에게 물으며 나는 흐느꼈다.

 

스페인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1875-1939)의 시 한 편이다.

 

이미 너무 늦었다고 할 때는 그 정반대로 아직 시작조차 아니 했다는 뜻이 아닐까. 미국의 시인 로버트 블라이(Robert Bly, 1926 - )내가 사랑하는 보트가 해안에 닿지 않아도 좋아.(It’s all right if the boat I love never reaches the shore.)라고 했는데 내가 탄 배를 사랑한다면 그 배가 목적지에 도착하든 안 하든 상관없다는 뜻이리라.

 

우리 모두 어렸을 때 처음으로 버스나 기차를 타고서는 이 여행이 끝나지 않고 끝없이 달려봤으면 했던 기억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번번이 아픔으로 끝난, 아니 끝나지 않은 짝사랑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블라이는 그의 시에서 또 이 같은 고통을 죽을 때까지 느낀다 해도 좋아(It’s all right if I feel this same pain till I die)”라고 했으리라.

 

"인생은 난파선이다. 우린 구명보트 타고라도 노래를 부르자.(Life is a shipwreck. We must not forget to sing in the lifeboat.)"라고 프랑스의 문필가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말했고, 우리말에 바람은 눕지 않는다했던가.

 

세상은 정말 요지경인 것 같다. 우린 공상과학이 현실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가상현실처럼 느끼게 해주는 헤드셋이나 센서들이 개발되고 있어 조만간 메트릭스 수준의 뇌에 직접 전기 자극을 주는가상현실 속에서 사랑도 하고 살다 죽는 세계가 도래하고 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이랴. 2014년에 개봉된 영화 인터스텔라에서처럼 머지않아 우리가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우주여행도 할 수 있게 되리라고 하지 않는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다 현실(Everything you can imagine is real)’이라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도 말했다지만, 내 삶만 돌아보더라도 내가 상상만 했던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뜻밖에도 요술처럼 기적같이 현실이 된 사실들이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말이 씨가 된다지만 생각이 떠올라야 말도 하고 꿈도 꾸면서 행동하게 되지 않던가. 그럼 생각이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몸에서 아니면 마음에서일까. 몸과 마음이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우리가 머리로는 생각하고 가슴으로는 느낀다고 하는데, 생각과 느낌이란 같은 걸까, 다른 걸까.

 

우리가 머리는 굴린다하고 가슴은 뛴다고 한다. 그럼 우리 머릿속 두뇌의 회전이 멈출 때, 아니면 가슴 속 심장의 박동이 멈출 때, 언제 사망한다고 해야 하나. 정신은 머릿속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가슴 속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정신과 마음은 같은 걸까, 다른 걸까.

 

사람이 죽는다는 뜻으로 숨을 거둔다고 하는데, 영어로는 숨을 내쉰다(expire)고 하고, 숨을 들이쉰다(inspire)고 하면 혼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숨과 생명과 혼이 삼위일체 (三位一體)의 같은 하나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 뿐만 아니라 숨이 생각으로 변해 상상이란 날개를 달고 비상하면 초혼(招魂)하듯 넋을 불러내 천지조화(天地造化)를 일으켜 기적처럼 요술 같이 모든 공상과학과 가상세계를 현실로 만드는 천지창조(天地創造)가 가능해지리라.

 

얼마 전 페이스북이 좋아요를 보완할 버튼을 만들고 있다고 밝히자 그 이름이 안 좋아요가 될지 싫어요가 될지 슬퍼요가 될지 별로에요가 될지 관심을 끌었었다.

 

가수 임재범(당시 53)3년 만의 새 앨범 발표를 앞두고 선공개곡 이름을 2015106일 음원사이트에 올렸는데 바람처럼 들풀처럼 이름 없이 살고 싶었던 남자가 소중한 한 사람에게 만큼은 특별한 이름이고 싶다는 주제라고 했다. 데뷔 30주년을 맞아 보컬리스트로서는 초심으로 회귀, 음악적으로는 발전을 꾀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우주에서 가장 작으며 가장 가벼운 소립자인 중성미자의 존재가 요즘 각광을 받고 있다. ‘작은 중성자라는 뜻의 중성미자가 워낙 작고 전기적으로도 중성인데다 무게도 있는지 없는지가 불분명할 정도로 가벼워 존재 확인이 극히 어렵지만, 현재 확인된 중성미자의 무게는 양성자의 1/1836인 전자의 100만분의 1에 불과하며 1광년 길이의 납을 통과하면서도 다른 소립자와 충돌하지 않을 정도로 작다고 한다.

 

이 중성미자는 태양에서 만들어져 날아온 것인데 관측된 수치가 이론적으로 예측된 수치의 1/3에 불과했던 것을 중성미자가 날아오는 동안 계속 형태(flavor)’를 바꾼다는 사실을 알아 낸 사람이 바로 일본의 가지타 다카아키(Takaaki Kajita, 1959 - )와 캐나다의 아써 맥도널드(Arthur B. McDonald, 1948 - )이다. 이 공로로 두 사람은 201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됐다.

 

이 중성미자의 변형은 우주 탄생의 비밀과 직결돼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138억 년 전 빅뱅과 함께 우주가 태어났을 때 물질과 반물질의 비중은 거의 같아, 이 둘이 서로 만나면 폭발해 없어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단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지금과 같은 우주가 생겼는지는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왔는데, 중성미자의 변환 과정에서 물질이 반물질보다 조금 더 남았다는 설이 최근 발표되었다.

 

천문학자나 과학자도 아닌 문외한인 내가 이를 감히 아주 쉽게 풀이해 보자면 이 물질좋아요이고 안 좋아요반물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 각자의 선택이 아니지만 나머지는 다 우리 각자의 선택사항이 아닌가. 죽는 날까지 어떻게 사느냐가, 일찍 삶을 포기하고 자살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우주 만물, 세계만인, ‘좋아요버튼만 누르고 또 누를 대상만도 부지기수(不知其數), 하늘의 별처럼 많은데, ‘좋아요버튼만 누를 시간만도 너무너무 부족한데, 어찌 안 좋아요싫어요또는 슬퍼요별로에요로 너무도 소중하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있으랴.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구든 무엇이든 좋아하고 사랑할 때 천국을, 싫어하고 미워할 때 지옥을 맛보게 되지 않던가. 그러니 반물질안 좋아요가 카오스(Chaos)를 불러온다면 물질좋아요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 주문(呪文) 외듯 코스모스(Cosmos)를 피우리라.

 

순간의 확대판이 영원이고 영원의 축소판이 순간이라면, 우리는 모두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있지 않나. 내가 태어나기 전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세월 동안 우주는 존재해 왔고, 또 내가 떠난 다음에도 우주는 영원토록 계속 존재하는 것이라면, 찰나 같은 나의 존재란 어떤 것일까? 나의 존재란 언제부터 언제까지일까. 엄마 뱃속에 잉태된 그 순간부터이거나 아빠의 정자로 생긴 때부터이거나, 또는 그 이전부터일까.

 

그리고 내 심장이 뛰기를 멈추거나 내가 마지막 숨을 내쉬거나 의식을 잃는 순간, 그 언제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부모와 조상으로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고 또 자식과 후손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것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어라.

 

뉴론(neurons)이란 정보를 전송하는 두뇌 속 세포들의 작용으로 우리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등 모든 행위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 뉴론들 사이의 연결점들은 시냅시즈(synapses)라고 불리는데 여기에 기억들(memories)이 저장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냅시즈들은 물론 뉴론들도 한없이 복잡 미묘한 영원한 수수께끼들이란다. 그뿐인가. 시냅시즈와 뉴론들 숫자는 하늘의 별처럼 또한 부지기수라 하지 않나. 다시 말해 한 사람의 두뇌 속에만도 광대무변(廣大無邊)의 무한한 우주가 있다는 얘기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내가 나를 관찰할 수는 없었지만 내 손자와 손녀만 보더라도 참으로 경이롭기 이를 데 없다. 외형의 외모만 보더라도 날이면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그 모습이 달라지고 변해 가고 있음을 여실히 목격한다. 어느 한 순간의 모습과 표정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고 영원무궁토록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가슴 시리고 저리도록 아프게 절감한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각자의 순간순간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이 얼마나 한없이 슬프도록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고 모습들인가. 영세무궁토록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만남들이요 장면들이 아닌가. 그러할진대, 아무리 좋아하고 아무리 사랑해도 한없이 끝없이 너무너무 부족하기만 한데, 우리가 어찌 한시인들 그 아무라도 무시하거나 미워하고 해칠 수 있으랴.

 

우리는 다 각자대로 순간에서 영원을 사는 것임에 틀림없어라. 그런데도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을 종종 잊고 사는 것 같다. 누가 되었든 지금 내가 마주 보고 있는 사람과 조만간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생각할 때 슬프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어린 손자와 손녀를 보면서 이 아이들이 다 크는 걸 못 보고 이 세상을 떠날 생각을 하면 너무도 슬퍼진다.

 

, 그래서 시인 윤동주도 그의 서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했으리라. 이 실존적인 슬픔을 극복하고 초월하기 위해 신화와 전설을 포함한 문학과 예술이 생겼으리라. 문학에서는 흔히 이야기(story)’와 이야기 줄거리를 뜻하는 플롯(plot)’을 구별한다. 전자가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일들이라면 후자는 이런 모험들이 결말지어지는 관점에서 바라본 사건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자면 한 소년이 삭발하고 중이 되겠다고 절에 들어간다. 아무도 그 까닭을 모른다. 그가 한 소녀로부터 거절당한 걸 알게 될 때까지.’ 이것이 미스터리가 있는 플롯이란 말이다. 우리가 시간 속에 살듯이 픽션 속의 인물들도 그렇지만,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시간이나 픽션 속 시간이나 둘 다 시계의 초침이 때깍 때깍 하는 대로가 아니고, 길게도 짧게도 주관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픽션에선 이야기와 이야기 속 인물에 따라 시간이 경과 하고 존재할 뿐, 의미가 없거나 이야기에 보탬이 안 되는 시간은 없는 셈이다. 현실과 픽션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현실세계에서는 원인결과를 초래하지만 픽션에선 그 반대란 것이다.

 

독일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인형극장에 관하여(On the Marionette Theater)’란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인형들은 요정들처럼 지상(地上)을 오로지 출발점으로 사용할 뿐이다. 잠시 쉬었다가 그들의 팔다리로 새롭게 비상하기 위해 지상으로 돌아올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구가 필요하다. 지상에서 춤을 추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지만 이 휴식 자체는 춤이 아니다. 휴식하는 이 순간들을 휴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가장하는 것 이상 없다.”


“These marionettes, like fairies, use the earth only as a point of departure; they return to it only to renew the flight of their limbs with a momentary pause. We, on the other hand, need the earth: for rest, for repose from the effort of the dance; but this rest of ours is, in itself, obviously not dance; we can do no better than disguise our moments of rest as much as possible.”

 

인형극에 나오는 인형이나 만화 속의 인물처럼 픽션 속의 인물도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인과관계를 뒤집는다. 픽션에서는 현실과 달리 시간도 사랑도 오직 그 의미만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이 견딜 수 없는 잠시의 슬픔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기쁨이리. 그러니 우리 모두 희랍인 조르바(ZORBA THE GREEK)처럼 춤을 추어볼거나.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전) 코리아타임즈 기자

전) 코리아헤럴드 기자

현)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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