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마포구 D관에서 남양주 여유당까지

김은정



예전에 시험공부를 할 때나 취업준비를 할 때  동네 도서관에 자주 갔었다. 요즘에는 주로 책을 빌리러 가는 편인데, 도서관에서 동네 주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것을 올해 처음 알게 되었다. 작년에 우연히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김애란 소설가와의 만남을 행사 당일 발견하고 부리나케 달려간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때 딱 한 번이었고, 그 이후로는 사실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던 중 올해 여러 일 들이 겹치면서 내 삶 전반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고, 머릿속이 복잡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중심을 잡으려고 도서관을 자주 가게 되었고 3월에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4회짜리 역사 관련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의 자체도 참 좋았지만, 강사님 복이 컸던 탓에 한 달 만에 수업이 끝나는 것이 정말 아쉬웠다. 이를 계기로 도서관 홈페이지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 뒤부터 시간이 맞으면 적극적으로 강의를 신청했다.  


2019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큰 내가 신청한 강의는 유쾌한 자본주의 생존기였다. 3 차시인데 1 차시는 시간이 안 되어 놓쳤고, 2 차시 강의를 들었는데 '실학'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2번의 수업과 1번의 탐방으로 진행되는 것부터 맘에 드는 강의였다. 나의 경우사람과 공간을 통해서 영감을 크게 받는 편이라 그야말로 취향저격이었다.


강의를 통해 (시험에 나온다니까 뭣도 모르고 외웠던실학자와 그 사상들이 조금씩 연결되면서 그것이 왜 중요한 건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고, 역사 속 사상과 정신을 내가 사는 현실과 어떻게 연결시킬지 고민해 볼 수 있었다. 특히 유배를 가서도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수많은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은 정말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다. 유배지에서조차 마땅히 해야 할 4가지를 정해 말을 삼가고, 생각을 맑게 하고, 옷을 단정히 입고, 행동을 중후하게 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참 '멋이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2회의 수업을 마치고, 드디어 남양주 다산 유적지 일대를 답사했다. 대학 1학년 때 이후 역사유적지를 답사 형식으로 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땐 그저 선배, 동기들과 놀러 가는 게 좋아서 웃긴 사진이나 찍고 돌아다닌 바람에 어딜 갔는지조차 기억이 안 난다.)


 다산 생가 여유당에 들어가기 전, 전문가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대문 앞에서부터 사당에 들어갈 때는 '동입서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들어갈 때는 동쪽의 문, 나올 때는 서쪽의 문을 통과한다. 이 말을 듣고 탐방 참여자 전부가 동쪽 문으로 우르르 향했다. 정약용 본인이 직접 쓴 묘지명인 자찬묘지명을 지나쳐다산 묘소 앞에서 다 같이 묵념으로 예를 표했다.


다산 정약용의 생가이자 그가 유년기를 보냈다는 여유당은 이름부터 남달랐다. ''''라는 말에는 겨울철 살얼음 냇가를 걷듯 조심하고,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듯 조심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집의 이름에서조차 그의 성정이 느껴졌다. 여유당 주위를 둘러보고 바로 그 근처의 실학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에서는 박물관을 소개해주시는 분이 따로 대기하고 계셨다. 실학에 대한 자료를 눈으로 직접 보고 그 정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설명하시는 분의 (박물관과 실학에 대한) 애정과 열정에 감화되어 다음에 갈 때도 가르침을 얻으려고 명함을 받아두었다.


박물관 견학을 마치고 다 같이 그 주변 다산 체험길을 걷기로 했다. 가는 길에 가이드님이 다들 이 꽃이 뭔지 아세요? 하고 질문하셨다. 내 눈에는 영락없이 무궁화로 보였는데, 여기저기서 접시꽃이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정답이었다.


좀 더 걷다가 이번엔 다른 꽃의 이름을 물어오셨다. '저 꽃 정말 많이 봤는데... 그나저나 저게 이름이 있는 꽃이었나?' 생각하는 중에 또 여기저기서 금계꽃이란 말이 들려왔다. 역시 정답이었다. 도서관 강연 수업은 주로 평일 7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나처럼 집이 회사와 가깝고, 집이 도서관과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사실상 참여가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수강생들의 상당수가 어르신들이고 젊은 친구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참 유익하고 알찬 강의가 많은데 내 또래들이 못 듣는 점이  속상하고 안타깝다)


암튼 어르신들이 꽃 이름을 척척 말씀하실 때마다 속으로 우와 하면서 감탄을 했다. 길가에 피어있는 꽃 이름 하나를 모르면서 나는 뭐를 그렇게 안다고 떠들어댔을까, 삭막하고 짧은 내 지식이 새삼 부끄럽게 느껴졌다.


체험길 초입 강가에 이르자, 가이드님이 다산 선생이 한양에 있는 마포에 갈 때마다 여기서 배를 탔다고 알려주셨다. 그 뱃길은 다산이 살고 계신 곳에서 마포에  빨리 갈 수 있는 고속도로와 같은 길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이 머리를 스치었다.


이십 대의 나에게는 오랜 꿈이 있었다. 굶어 죽기 딱 좋으니 그런 건 취미로 하라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접힐 정도로 나약한 꿈이었지만, 그 꿈 앞에서는 여전히 가슴이 뛰고 수줍을 정도로 소중한 꿈이었다.  서울 '마포'구 소재의 대학을 다녔던 나는 굶어 죽지 않으려고 법학을 복수 전공하기에 이른다. 이 사회의 정의를 법을 통해 구현하고 싶기도 했다. 막상 법학 수업을 듣기 시작하니 적성에 맞고 재밌기도 하였다. 법학 수업은 D관이라 불리는 건물에서 진행되었다. 그래서 나는 학창 시절 하루의 대부분을 D관에서 보내었다. D관은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름 붙여진 관으로 다산관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름 실용적(!) 사고의 결과로 선택했던 '마포의 다산관'을 나와 한참을 돌고 돌다가 다산 정약용이 마포로 떠났던 장소에 내가 지금 서 있다. 하필 오늘의 내 문제를 해결하려 고군분투하는 이 시점에 여기 왔다는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자기 시대 문제 해결의 실질적인 길을 찾으려고 했던 조선의 실학이 탐방 내내 내게 말을 걸어왔다어서 너도 너의 오늘에 대한 문제 해결의 실질적인 길을 찾아 떠나라고 말이다. 판타지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판타지로 분류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여태껏 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영화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그 뒤로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회사에 입사하고 막연하지만 분명하게 했던 유일한 다짐은 내가 버는 돈으로 '어디든 떠나자'였다.  그리고 정말 이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여행을 결정하고 계획하는 데까지 일사천리라 놀라는 경우가 많은데, 뭐든지 좋아서 하는 건 (있는지도 몰랐던내 안의 에너지가 밀어붙이는 거라  정작 나는 그 영문을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껏 다녀왔던 여행들을 정리하면서 보니 여행이 나에게는 일종의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꽤 많은 것을 내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어른이 될 거라고 기대했지만, 나이 들수록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직장을 다니기로 한 것은 분명 내 뜻이  맞았지만, 발을 들인 이후에는 매번 남 뜻이 내 뜻보다 우위에 있었다.  


못 먹어도 고, 내 선택에 후회란 없다 제법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씹히고 밟히면서 점점 나다움을 잃어갔다. 노동력 제공하고 월급 받는 것 외에 나까지 잃어야 하는 게 직장생활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대부분을 남 뜻대로 움직이다 번 돈으로 (비교적 긴 시간, A부터 Z까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여행이었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8.30 10:34 수정 2020.08.3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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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