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사면초가

김태식



외국에서 그 나라의 대표적인 대중교통이라 할 수 있는 시내버스를 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생소하기 만한 정류소 이름에다 어느 정류소에서 내려야 할지 가늠하기 힘든 일이라 외국인들은 대부분 택시를 이용한다. 하지만 나는 오랜 외국생활 동안 그 나라의 시내버스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시내버스를 즐겨 타는 이유는 그 나라 사람들의 서민적인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에서 근무할 때도 그랬다.


몇 년 전 중국의 베이징에서 잠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유학중인 딸의 기숙사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 베이징에 같이 살면서도 자주 만나지 못한다. 나를 보고 싶다는 딸의 전화를 받고 그 날은 기숙사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음 날 시내버스를 탔다. 6월이지만 베이징의 초여름 날씨는 제법 더웠다. 시내버스 안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빈자리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1시간이 넘게 차를 타고 가야 하기에 빈자리가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가장 뒷좌석에 갓난 애기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양쪽에 애기의 부모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앉아 있었다.


나는 내심 '저 자리를 양보해 주면' 하는 생각을 했지만 중국어로 충분히 말 할 수 있는 실력이 되지 못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를 지나 그 부부가 나의 뜻을 헤아리기라도 했는지 나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 사람이 보기에도 내가 외국인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양보해 주는 틈새를 이용해 얼른 몸을 옮기는 순간 '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버스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뒷좌석에 앉으려는 나에게로 쏠렸다.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던 나의 발이 애기 엄마의 발등을 밟았던 것이다. 그 애기엄마는 발이 밟히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 앉은 나를 보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에게 쏠리는 승객들의 눈길은 한 여름 장대비가 메마른 땅에 꽂히듯 했다. 나는 몸 둘 바를 몰랐고 더욱이 중국어를 능통하게 하지 못하는 탓에 그 들 부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더욱 난감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첫눈에 보기에 그 여인의 인상은 교양미가 있어 보이지 않았고 옷차림 또한 세련되지 못했다. 발등을 부여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가 하면 아프다고 울부짖으며하는 말의 내용을 눈치로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느낀 생각으로는 발가락이 부려졌으니 병원으로 같이 가자는 뜻으로 여겨졌다. 만약에 같이 가지 못하면 대신에 돈을 달라는 시늉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통상적인 중국어로는 뚜이부치-죄송하다 아니면 젼뿌하오이셔-정말 미안하다 뿐이었으니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나의 목적지까지는 앞으로 1시간은 버스를 더 타고 가야 하는데 중간에 내리자니 도망간다고 할 터이고 계속 타고 가자니 이 여인의 절규에 가까운 울음소리와 버스 안의 시선들로 인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뿐 이었다. 마침내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버스 안내양(중국은 시내버스에 안내양이 있음)이 내게 다가왔다. 안내양 또한 다친 사람을 병원으로 빨리 데리고 가라는 손짓을 하면서 가만히 지켜보니 중국어를 잘 하지 못하는 외국인 같은데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한국인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소리쳤다. “이 안에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조선족이 있느냐혹시 있을법한 조선족은 없었다. 당연히 떠오른 사람은 나의 딸아이 뿐 이었다. 중국인과 다름없이 중국어를 구사하는 딸이지만 그 시간은 수업 중이고 거리도 너무 멀어 연락 할 수도 없었다.


한국어 외에 할 수 있는 다른 말은 없느냐고 묻는 안내양의 물음에 일본어와 영어를 충분히 할 수 있으니 그런 사람이 있으면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다시 중국인 특유의 큰 목소리로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중국인을 찾았다. 모두 묵묵부답이었고 승객들의 시선은 나에게 더욱 더 쏠릴 뿐이었다. 발가락이 부려졌다고 주장하는 아주머니의 계속되는 울음소리에 나의 마음은 콩닥거리고 도리질을 치기만 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하고 끝으로 '영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 하고 안내양이 소리 쳤을 때 중간쯤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수줍은 듯 조용히 손을 들었다. 보기에도 참한 20대 중반의 숙녀였다.


내게 다가온 그녀에게 내가 하는 영어를 다친 아주머니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도록 중국어로 전해 달라고 말하자 알겠다는 그녀의 영어발음은 꽤나 세련되어 있었다. 그 아가씨는 중학교 영어 교사라고 했다. 나의 마음이 조금 놓이기 시작했다.


먼저 내가 조심성 없이 발을 밟아 아주머니에게 고통을 주어 대단히 미안하다. 만약 골절상을 입었다면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하고 그 치료비 전액은 내가 부담하겠다. 병원에 가면 나의 딸이 올 것이고 중국어로 언어 소통은 전혀 문제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했다.

 

10여 분 간의 얘기를 하는 동안 버스 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어 가는 듯이 보였다. 어쩌다 여자의 발을 밟아 괴롭히느냐 라고 하던 무언無言의 시선들이 영어로 말하는 중국인 아가씨와 한국인의 대화에 신기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승객들의 시선이 따뜻하게 변하고 있을 즈음 골절 되었다고 말하던 부부들의 얼굴도 점차 누그러져 가고 있었다. 사나운 모습이 아니라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부려졌다고 구부려 있던 발가락은 어느새 서서히 펴지고 있었고 나를 때릴 듯이 화를 내던 그녀의 남편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두 정류장을 지날 즈음 그 부부는 그들의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영어로 통역하던 중국인아가씨와 나를 힐끗 쳐다본 뒤에 버스에서 내렸다. 처음부터 너무 심한 엄살을 부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여인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아무튼 다행이라는 생각에 한 시름을 덜게 되었다. 한참을 같이 가던 통역아가씨는 간혹 외국인에게 돈을 노리는 저런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내렸다. 이런 사람에게 한 번 말려들면 그 때 밟혀서 다친 부위는 물론이고 평소 아프던 곳까지 치료해 주어야 한다는 얘기를 훗날 듣게 되었다.

 

나의 실수로 빚어진 일이라 남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피해를 당한 사람의지나친 태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이 모두 적으로 둘러싸여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상태를 말하는 사면초가.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 전 이러한 고사성어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 나는 사면초가의 신세가 되어 있었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9.08 10:12 수정 2020.09.0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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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