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7월 8일(음력 5월 30일)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함대는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후 모자랑포(사천군 용현면 주문리)에서 1박 하고 사량(통영시 사량면 진촌리)으로 향하였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은 왼쪽 어깨에 적탄을 맞고 큰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7월 10일(이하 양력) 오전 8시 경 사량 해상에서 휴식 중이던 이순신 함대는 척후선으로부터 적선이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바로 출발하여 10시 경 당포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당시 당포에 머물고 있던 왜군들은 당포성 안에서 노략질을 하며 민가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당포 선창에는 21척의 적선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이순신함대가 접근하자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철환을 쏘아댔다. 적 대선 위의 높은 누각에는 붉은 비단을 두르고 있었으며 붉은 일산을 쓴 적장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久)가 두려워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이순신은 탐망선을 바깥 바다에 배치하여 후방으로부터의 기습에 대비하고 거북선을 선두로 공격해 들어갔다. 거북선은 적장이 탄 누각이 있는 대선 밑으로 접근하여 용머리에서 현자철환을 쏘고 이어서 지자철환과 대장군전도 쏘면서 누각 대선을 깨트려 버렸다. 뒤따르던 전선들은 철환과 편전, 승자총통 등을 계속 발사하면서 거북선을 엄호하였다.
왜군들은 조총으로 맹열히 반격하였으나 거북선은 총탄을 맞으면서도 끄떡없이 돌격을 계속했다. 누각 대선이 깨지면서 왜병들은 점차 사기를 잃기 시작했다. 이때 중위장 권준이 활로 적장을 명중시켰으며, 사도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적 대장선으로 뛰어 올라 화살을 맞고 떨어지는 적장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를 본 왜병들은 겁을 먹고 배에서 내려 육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순신함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선 21척을 불태우거나 격파해버렸다.
이날 전투에서 소비포 권관 이영남은 침몰하는 적선 안에서 울산 출신 여자 종인 억대(億代)와 거제도 출신 소녀 모리(毛里)를 찾아 구해 내었다. 전투중 노획한 물품 중에는 좌별도장 이몽구가 적장이 탄 대선에서 찾아낸 금부채가 하나 있었다. 부채 중앙에는 ‘6월 8일 수길(六月八日秀吉)’, 오른쪽에는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 왼편에는 ‘구정유구수전(龜井琉求守殿)’ 이라고 씌어져 있었는데 이 부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메이 코레노리(龜井玆矩)를 유구(琉求, 오키니와)의 영주로 봉하면서 선사한 것이다.
가메이 코레노리는 이날 부채를 버리고 도망쳐서 구사일생으로 살았으며, 후에 일본으로 가서 도쿠카와 이에야스를 주군으로 섬기게 된다. 금부채에 씌어진 글의 해석을 잘못하여 당포해전에서 전사한 적장을 가메이 코레노리라고 서술한 기록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전사한 적장 구루시마 미치유키는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형이다.
창신도에서 하룻밤 휴식을 취한 이순신함대는 7월 11일 새벽부터 전날 놓친 왜선을 찾기 위해 개도(통영시 산양읍 추도) 일대를 수색했으나 적의 종적을 찾을 수 없어 근처의 고둔포(통영시 산양읍 수월리 고등개)로 가서 1박했다. 다음 날인 7월 12일 아침 다시 당포 앞바다를 수색했는데 오전 10시경 토병 강탁이 와서 도망간 적은 거제도 쪽으로 갔다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적이 간 쪽으로 출발하려는데 멀리서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다가오자 원군을 만난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순신, 원균, 이억기의 연합함대 51척은 그날 밤 착량(경남 통영시 미수동)에서 1박 하고 적을 계속 추적하였다.
2020년 9월 15일 필자는 다시 당포해전지를 찾았다. 이전보다는 당포성 일대가 잘 정비되어 있고, 당포항에는 '당포대첩지'라는 표지판과 함께 표지석이 있어 이곳이 당포해전지임을 누구나 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