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잘 있거라 단발령

장세정의 <잘 있거라 단발령>

1940년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장세정 노래

 

 

이 노래는 탄생연세(誕生年歲)로 치면 올해로 일흔여덟 살, 1940년 오케레코드에서 출반했다. 우리 역사로 반추해보면, 일제강점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다. 1938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조선인 육군징집령을 내린 때.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 총성을 울리고, 일본은 진주만기습공격을 준비하던 때다. 일설(一說)하여 일본 군국주의 망령불꽃이 훨훨 타오를 때. 식민치하에 있던 우리 국민들의 삶은 피폐의 극한 시기다.  

 

이러한 시대상황을 작사가 조명암이 신라 패망의 애환을 담은 단발령(斷髮嶺)을 소재로 노랫말을 엮는다. 이 가사에 멜로디를 입힌 사람은 KPK악극단장 김해송. 노래는 당시 열아홉 살이던 평양출신 장세정의 목청에 태워진다. 이 노래는 목마른 시대의 불씨에 대중예술의 휘발유를 뿌린 격이었다. 천년 신라(BC57~AD935)가 폐망하던 시기를 일본제국주의 식민시대, 민족문화말살 상황을 대중가요로 서사한 감성불꽃.  

 

한 많은 단발령에 검은 머리 풀어 쥐고 / 한없이 울고 간다 한없이 울고 간다 / 아 정든 님아 잘 있거라 // 두 눈에 피가 흘러 시들어진 진달래는 / 한 많게 붉었구나 한 많게 붉었구나 / 아 정든 님아 잘 있거라 // 단발령 참나무에 붉은 댕기 풀어 걸고 / 마지막 울고 간다 마지막 울고 간다 / 아 정든 님아 잘 있거라(전문)


https://youtu.be/01YI61taNzA  

 

노래 속의 핵심어휘는 붉은댕기다. 댕기는 남·여성들의 머리를 장식하기 위하여 사용한 자줏빛 또는 검은 빛 헝겊을 이은 띠인데, 노래 속 붉은댕기는 시집을 안 간 처녀들이 주로 사용했다. 여성들이 댕기를 푼 때는 뭔가 결연한 상황이었을 때이다.  

 

댕기머리 습속(習俗)은 당서(唐書) 동이전(東夷傳) 신라조에, ‘여자는 머리에 아름다운 띠를 둘러 구슬과 빛깔 좋은 비단(緋緞)으로 장식한다.’라고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쪽댕기·큰댕기·앞댕기·도투락댕기·말뚝댕기·제비부리댕기로 구분했었다. 이 중 제비부리댕기는 미혼자가 사용하던 댕기. 처녀들은 빨강, 총각은 검정을 사용하였다. 처녀들의 댕기는 화려하게 금박을 박았다. 노래 속에는 붉은댕기를 풀어서 단발령 나뭇가지에 걸었으니, 아마도 그 뒤의 행동은 막다름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단발령(斷髮嶺)은 해발 833미터. 북한 강원도 금강군 신원리와 창도군 장현리의 경계. 서기 935년 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을 결정했을 때 마의태자(麻衣太子)는 아버지를 하직하고, 이 능선에서 머리를 자르고 개골산으로 입산하였다. 이후 붙여진 고개이름이다. 이곳 남쪽에 있는 구단발령(1,241m)은 단풍절경으로 유명하다. 남서쪽은 오량동(五兩洞), 북동쪽은 피목정(皮木亭)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오량은 옛날 고개를 지날 때 산적을 막기 위하여 안내인에게 다섯 냥(五兩)의 돈을 주면서부터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금강산(金剛山)4계절 이름이 다르다. 금강산·봉래산·풍악산·개골산. 북한 강원도 회양·통천·고성군에 걸쳐있으며, 1952년 행정구역개편 전에는 회양·통천·고성·인제 4개군에 걸쳐 있었다. 최고봉 비로봉은 1,638m. 금강(金剛)은 불교경전 화엄경에 나오는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에서 유래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개골·열반·풍악·기달>이라는 다섯 이름으로 나온다.  

 

이 노래는 1895(고종32) 내려진 단발령(斷髮令)을 빗대어 부른 노래라는 설도 있다. 당시 김홍집 내각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조선개국 5041115일 건양원년(建陽元年) 11일을 기하여 태양력을 사용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일본의 강요로 고종임금이 먼저 서양식으로 머리를 깎았으며,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자르게 하였다. 우리 근대역사의 빛바래어 가는 서글픈 기억이다. 민족굴욕의 상처다.  

 

작사가 조명암은 본명이 조영출이다. 그는 별칭이 많다. 조명암·김다인·김운탄·김호·남려성·부평초·산호암·양훈·이가실·함경진 등. 이중 김다인은 극작가 겸 작사가인 박영호와 공동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분명치 않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한 후 3년째이던 1913년 아산에서 출생하여 해방광복 후 월북하였다가 1993년 북한에서 사망했다. ‘서울노래·알뜰한 당신·논개·울어라 은방울·추억의 소야곡·진주라 천리 길등 노래를 남겼고, 북한 문화예술동맹 부위원장·교육문화성 부상·평양가무단장을 지냈다. 1941년부터 1944년 초까지 지원병을 선전선동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며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노래가사를 다수 지어서 친일행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김해송은 1911년 평안도 개천 출생, 작곡가 김송규로도 활동했다. 1935KPK악단장으로 활동하면서 목포가요제에 출전하여 목포의 눈물을 열창한 이난영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그는 193911월 아내를 위해 조명암 작사 다방의 푸른 꿈을 작곡했다. 1939년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이 조직한 우리나라 최초의 악극단인 조선악극단 일본공연 때 총지휘자로 활약하였고, 이 시기 김해송·이난영·남인수의 삼각연인관계 사연은 우리 근대사의 비련정(非戀情)의 대표적인 풍설담(風說談)이다.  

 

장세정은 1921년에 평양에서 출생하여 2003년 미국 LA에서 타계한 불세출의 여가수다.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에 참가한 아버지와 생이별하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라다가, 평양 화신백화점 악기점직원으로 있다가 콜럼비아음반에 스카우트됐다. 1936년 평양가요콩쿠르를 계기로 가수의 길에 들어선 뒤 1946년부터 KPK악극단 전속배우로 뮤지컬 <샤로매·카르멘·춘희> 등에도 출연했다.


유차영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8.09.20 07:24 수정 2018.11.1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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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