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대 칼럼] 자랑스러운 친구 아내의 죽음

문용대

 

부산 기장에 오래된 친구가 살고 있다. 그는 중국 어느 대학에서 의학 관련 박사학위를 받고 침구사로 침술, 쑥뜸 등으로 환자를 치료한다. 책을 쓰거나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도 한다.


지난달 중순 일요일 이른 아침 친구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전날 오후 그의 아내가 음식을 잘못 먹고 소천을 했단다. 소천(召天)이라 함은 개신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으로 죽음을 이르는 말이 아닌가? 눈을 의심했고 한참 넋을 잃었다. 얼마 전 그의 남편인 내 친구의 건강에 대해 전해주던 그가 세상을 떠났다니 믿기지 않았다.

친구의 아내는 나보다는 두세 살 아래일 게다. 아내가 갑상선 암으로 고생하고 있던 중 친구가 폐암 진단 결과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다행히 친구는 일 년이 지난 지금 완치에 가깝게 좋아졌다고 했다. 남편의 건강이 그처럼 좋아졌다는 것은 아내의 헌신적인 노력이 얼마나 컸으리라는 것은 듣지 않아도 뻔하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먼저 가다니…….


친구는 농촌 중학교 동창생이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이나 많다. 그 시절 우리는 너무 가난했다. 중학 진학을 포기했다가 삼 년이나 늦게 입학을 했다 하니 친구의 집안은 나보다 훨씬 힘들었던 모양이다.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해 점심때면 학교 뒤 바위에 누워 오후 수업시간을 기다렸다는 그는 어렵게 육군3사관학교를 나와 오랜 동안 전방에서 장교 생활을 했다. 나와는 경남 창원에서 약 15년을 가까이에서 살았다. 내가 직장생활하는 동안 친구는 향토 39사단에서 복무했다.


친구는 대중을 상대로 강의를 잘했다. 육군 대위로 사단 예하 부대 행정과장으로 있으면서 나와 같이 군용 지프차를 타고 주말이나 밤이면 창원, 마산지역을 누비며 반공강연을 했다. 심지어 고향인 전남 여수에까지 가서 강연을 했다. 그는 진실한 생각으로 나라사랑하는 일을 실천했다. 강연 중 멀쩡히 살아 계시는 그의 아버지를 6.25 때 전사하셨다고 재치 있는 웅변으로 많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내가 강연할 때 동행한 것은 영사기와 스크린과 앰프장치를 차에 싣고 다니며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기록영화 비디오를 상영해 주기 위해서였다. 박보희라는 분이 미의회에서 증언하는 내용으로 당시 나라사랑하는 사람치고 그 영화에 감명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마 일백 회는 넘게 상영을 했을 것이다.


그 후 멀리 떨어져 산 지가 30년도 더 지났지만 유달리 소중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나, 창원에서 15년간 가까이에서 지냈다는 것 말고도 그들 부부는 참 좋은 사람들이다. 항상 약자의 편에 선다. 교통사고나 법적인 사건에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하게 되는 등 불의를 보면 만사를 제치고 뛰어다니며 바로잡는다. 지금은 의술을 익혀 돈 없이 병든 이의 병을 고치기도 한다.


군인 현역 복무 때나 직장 예비군 중대장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고향 사람이나 사돈네 팔촌이라도 일자리를 못 구해 애태우는 사람을 보면 집으로 불러들인다. 취직을 시키기 위해서 백방으로 힘도 쓴다. 취직될 때까지, 때로는 몇 달간을 먹여 살린다. 내가 어느 회사 인사부에서 일할 때다. 자주 이력서를 들고 찾아올 때 귀찮기도 했지만 진실한 그의 맘씨에 늘 감탄했다.


그의 아내는 더 위대한 사람이다. 취직 대기자 합숙소에서 늘 빨래해주고 밥 해먹이면서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는다. 그를 아는 사람으로부터들은 바로는 강원도 전방 군대 생활 때도 그랬다 한다. 그들 부부는 사람이 찾아오거나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뭐든지 남에게 주기를 좋아한다. 2년 전 부산 기장 친구 집에 갔을 때도 올망졸망 싸서 차에 실어 주며 더 주지 못해 아쉬워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 천사가 세상을 떠났다.


친구의 서재 겸 집무실에는 태극기와 옛날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육군 대위 계급장이 달린 정복을 입고 찍은 사진과 가훈도 걸려있다. 가훈이 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한자로 된 사자성어가 아니다. 거창한 문구도 아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이라도 남을 위해 일하자이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한을 남을 위해 사는 것으로 푸는 것 같다.

그런 삶을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음을 세삼 알게 되었다. 친구가 얼마나 초 교파적이며, 섬세한 성격을 가졌는지도 새로 알았다. 우편으로 받은 책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이 대문 밖에 비바람에 버려져 있는 것을 흙을 씻고 일일이 한 장 한 장 헤어드라이기로 말려 끝까지 읽었다고 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은 그가 믿는 종교에서 이단시하는 분이 쓴 자서전이.


친구는 경남 창원에 국민복지매장이라는 대형 슈퍼마켓을 개업해 한때 호황을 누렸다. 허나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 빚보증으로 사업이 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도망을 다니며 오랜 아픔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군인으로 착하게만 살아 왔을 뿐 세상 물정 모르는 사회 초년생으로 가혹할 정도의 수험료를 지불했다. 지금은 어엿한 집에 살면서 아이들 셋도 결혼시켰고, 의사 사위도 뒀다. 건강 강의도 하고, 병도 고쳐주며 나름 행복한 생활을 하던 중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보내고 홀로 자신의 건강을 지켜야 하는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순기 친구, 나는 자네와 같은 자랑스러운 친구가 있어 참 행복하다네. 그렇게 고생하며 서로 사랑하던 천사 박 여사를 먼저 보낸 친구의 마음이 어떠할지, 자네 아닌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며칠 새에 부산 기장에서 춘천 동산공원묘원까지 먼길을 또 다녀갔겠는가.


허나 죽음은 누구나가 겪는 일 아닌가!” “자네나 내가 신앙하는 바와 같이 이승의 삶이 전부가 아니지 않은가, 영원한 이별이 아닌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이승에서의 죽음이 저승 삶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졸업이 새로운 시작이듯 말일세! 우리보다 먼저 영적(靈的) 세계에 입문했으니 지상에서 살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어 아쉽더라도 이제 슬픔을 거두게. 훗날 우리 거기 가서 함께 만나 영원한 삶 누리세!”


그의 아내가 운명 며칠 전 여보, 사랑해요!” 하더란다. 그런 말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친구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잠이나 자!”라고 답했단다. “여보, 나도 당신을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친구가 내 가슴을 더 아리게 한다.  [칼럼=문용대]


전명희 기자



정명 기자
작성 2020.09.24 10:51 수정 2020.09.2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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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