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구 칼럼] 3김 전성시대

문경구



1960, 70년대쯤 어린 나는 언덕에 걸터앉은 학교에서 바라보는 건너편 미아리 산동네 사진을 잊지 못한다. 누더기 천으로 덕지덕지 지은 집들이 이테리의 그 아름다운 밀라노 풍경 속 집들과 명작을 비교해 내는 데 만만치 않다. 한 시간 간격으로 다니던 버스를 보고 콩나물시루라고 한 말을 그때 의아하게 느꼈다.

 

땅거미가 지면 땅구멍으로 기어서 들어가는 개미들의 행렬처럼 사람들의 걸음은 바쁘게 이어진다. 곧바로 어둠은 판자촌에 장막을 덮고 그 속으로 하나둘 백열전등이 켜지면 또 다른 행성 속에 자리한 아름다운 달의 동네를 본다. 그 시절에는 귀한 것들이 사람의 숫자만큼 많았다.

 

시장에서 콩나물, 고등어 한 손을 사면 싸주던 봉지도 넉넉지 못했다. 몽당연필도 낭비하여 쓰면 안 되었다. 모두가 비스름한 삶들이었다. 양회포대 종이에 글을 쓰던 그 후, 눈이 휘둥그레지던 멋진 공책을 만나 글씨를 써 댔다. 공책이란 말이 언제부터인가 노트라고 불려지니 고급스러운 대접을 받은 기분이었다. 나의 노트를 열어보니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한 글씨체라고 담임선생님은 안경 아래로 한 번, 다시 안경 너머로 한번 자꾸 나를 보셨다.

 

저 건너편 산동네 판자촌들같이 빼곡히 써 내려간 글씨체를 보면 숨이 막히신다며 애써 또박또박 쓸 필요 없이 마음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쓰라 하시면서 너 같은 글씨체는 학교 졸업하고 동회에서 필요로 하는 주민등록을 떼어주는 서기의 글씨체라며 까만 먹지 위에 긁어 쓴 글씨체에 묶이지 말고 써라, 불후의 명작을 만든 예술가 중에는 자기가 써 놓은 글씨도 몰라보는 사람도 있다고 하시며 어린 나의 영혼이 자유롭게 흘러갈 수 있게 하신 말씀이다.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인 나는 그대로 선생님 말씀이 펼쳐 놓으신 예술가 같은 길을 걸어 나선 지금, "" 아무개 담임선생님의 은혜만큼 살아도 못 갚고 갈 만큼의 세월을 보냈다. 스승의 날에 노래한 번 불러드리면 될 줄 믿었는데 나도 모르게 제 때에 불러드리지 못해 복리로 불어 난 빚을 손도 못 쓴 체 이렇게 후회하는 노인이 되었다.

 

전쟁, 혁명 몇 번의 풍파 속 끝인 나라는 어디를 가나 가난만큼 풍부함이 없었다. 숨 가쁘게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나와 복학을 위해 기다리는 몇 달이라는 마음조차도 너무 빈곤했다. 잠깐이라도 돈을 벌겠다는 의지 하나로는 세상의 턱이 너무도 턱없이 높다는 맛을 보았다. 외국회사에 응시를 하고 달려가니 그곳은 더 다른, 놀랍기만 한 세상인 거다. 그래서 옷이 날개라고 했나 보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응시생들의 차려입은 맵시 속에서 같이 시험을 보아야 하는 초라한 나의 모습에서부터 질려버렸다. 나는 영화배우의 꿈을 꾸는 친구 형에게 사정을 말하고 여름 양복 한 벌과 망사구두 한 켤레를 빌려 신고 응시를 했다.

 

입춘을 막 보냈다는 봄은 말과 많이 달랐다. 현실의 봄은 세상을 만만하고 어설프게 생각하고 달려든 나의 현실 그 자체의 겨울보다 더 추웠다. 허름한 여름 양복 차림보다 더 춥기만 세상이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당인리 화력 발전소를 지은 미국회사에서 두 번째 타이핑 실기 시험을 치렀다. 멋지게 차려입은 응시생들 앞에서 들어버린 주눅은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도저히 잊히질 않는다. 합격의 가능성보다는 내가 만드는 불가능이라는 실의가 더 컸다.

 

뻔한 시험결과일 거라고 점이 자꾸 쳐 쳐지자 마지막 삼차 면접시험은 보기를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그날 시험감독관으로 나오신 한 분이 나의 실의에 찬 얼굴을 읽은 듯이 "포기보다 다음 시험을 위해 좋은 기회로 만들어 보라"고 준 용기 쪽으로 마음을 접으니 불안한 마음이 비워지고 용기가 찾아왔다. 그래 다음 시험을 위해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자고 하니 마음도 쉽게 포근해짐을 느꼈다.

 

외국에서는 한 집 걸러 하나쯤 있을 타자기가 우리나라에서는 관공서에서 조차 흔치 않았던 그 추억이 지금 더없이 멋지고 아름답기까지 한 것은 왜 그럴까. 나는 크고 작은 헌 단추들로 붙여 만든 타자판에 눈을 감고 맹인이 점자를 치듯 익힌 알량한 실력을 진짜 타자기로 시험을 보는 날에는 물찬 제비처럼 손을 날렸다.

 

나중에 알게 된, 내가 쥔 합격의 열쇠는 다른 응시생들에게는 없는 노동청인가의 공병우 한글타자 자격증이었다. 분명 시험은 영어가 필요한 외국회사인데 뜬금없는 한글타자 자격증이 한몫을 하다니 의아해했다. 그렇게 유학파 응시자들을 물리치고 쥔 합격으로 건설회사 관공서에 가려면 회사에서 받은 영문을 한글로 번역해서 갖추어야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외국인들의 체류 기간을 위해 법무부까지 가야 하는 등, 나는 제한된 곳이 없이 갈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정부 기관의 한 업체와 공사계약을 위해 들렀을 때 나는 놀라운 역사 속 인물을 그곳에서 만났다. 포기하지 말고 도전해 보라고 격려해 준 바로 그 시험감독관이었던 사람을 그곳에서 만났다. 나는 그분 목에 걸린 회사 신분증 속 이름이 모처 공무원 행정관 김아무게라는 것도 비로소 알았다.

 

나의 생명 같은 이름이었다. 입사 후 정신을 차려보니 그분은 없었다. 그분에게 감사함의 말도 전하지 못한 나는 결국 은혜를 갚지 못한 검은 머리 짐승밖에 되지 못했다. 정신없이 살다 보면 말대로 정신을 잃는가 보다. 그동안의 세월만큼 숨겨져 있던 또 다른 모습의 내가 하나둘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변해버린 나는 세월이 흐른 뒤 건강이 손 쓸 수 없이 무너지면서 받은 몇 차례 큰 수술 뒤에 찾아온 허무와 우울함으로 겨우 목숨만 지탱하며 살아갔다. 그 순간 속을 비집고 그분은 무슨 의미를 주시려 나를 만나려 하셨던 걸까. 실의에 남겨진 나를 구해주신 문학인 ""

아무개 선생을 만난 일은 아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얻은 수지맞은 장사였다.

 

그분은 당신이 나를 위해 찾아온 멘토라는 것을 당연히 모른다. 그저 내게 희망의 여지가 있을 것 같은 사람이니 글을 써보라고 말을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그 말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은혜로 내게 다가왔던 것이다. 돈이란 내가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 지불한 돈만이 온전한 나만의 돈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였다.

 

은행 속 돈은 허무한 욕심이라는 의미지만 내가 쓰고 있는 수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영혼의 가치였음을 알게 해 주었다. 내가 쓴 글 속에서 만날 수 없는 삶은 내 삶이 아님을 알려 주고 싶어 오신 걸까.

 

어린 시절 나의 영혼대로 살라고 하신 "" 아무개 담임선생님, 군대를 마치고 풋성인이 되어 만난 "" 아무게 계장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연명하던 삶, 남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기적의 손을 지니신 문학인 "" 아무게 선생님, 모두가 3김씨 세습이 차례로 나의 운명 앞에 다가와 다음 행로를 가게 하신 분들이다.

 

그냥 감사하다는 말조차 버거워 당분간은 하루하루 내 모습을 써가며 살고 싶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요행히 법망만 피했을 뿐 갚지 못한 은공의 빚은 무기수의 세월로 남게 했다. 옛 어른 말씀 중에 "칠월에 들어온 더부살이가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은 꼭 나를 두고 한 말 같다.

 

지금 나는 내 앞에 놓인 시간이 얼마나 남은 줄 모르는 더부살이의 살림살이다. 은공을 모르는 나의 더부살이 살림살이지만 어느 상전의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게 살게 한 3김의 은혜는 나를 지금의 나로 남게 했다. 그분들로 인해 나는 지금 온전히 나로 살고 있다.



[문경구]

미주한인크리스찬문학협회공모 수필당선

이메일 kimurgin@hotmail.com

​전명희 기자


전명희 기자
작성 2020.10.20 11:18 수정 2020.10.22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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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