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칼럼] 지구촌 날라리

소유가 좋은가 자유가 좋은가

 

 




욕망은 태생적 신앙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도록 설정되어 있다. 스스로에게 속아 넘어가는 모드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끝을 모르고 달려가는 것이다. 이천오백 년 전 지구촌 사람들의 욕망에 제동을 건 석가모니가 있었다면 이천오백 년 후 지구촌 70억 인구의 욕망에 불을 지핀 스티브 잡스가 있다. 스티브 잡스가 만든 문명진화의 욕망으로 인해 지구촌을 하나의 망으로 연결하는 지구촌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다.

 

지구촌은 지금 욕망이라는 괴물에게 사로잡혀 있다. 아시아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공룡이 지구를 꿍꿍 눌러대고 유럽에서는 유럽연합이 협력을 위해 뭉쳤으나 갈등으로 반목하고 있다. 중동지역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유혈사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구 일등 국가인 미국은 자신들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지구경찰을 자처하고 있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은 지구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욕망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보다 욕망에 취약하다. 인간이 욕망에 더 잘 속기 때문이다. 행복해야 한다는 욕망에 속고 출세해야 한다는 욕망에 속고 사랑해야 한다는 욕망에 속는다. 행복이나 출세, 사랑, 만족, 성공 등 수 많은 욕망은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다. 욕망은 욕망을 이길 수 없다. 욕망은 이기는 대상이 아니라 놓아버리거나 다스리는 대상이다. 욕망은 태생적으로 만들어져서 사회라는 환경으로 자라난다. 사회라는 환경이 놓은 덫에 매번 걸리고 마는 것이 욕망이다. 그 덫 속에 놓인 짭조름한 치즈 한 조각은 그 얼마나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욕망 덩어리던가.

 

조금 벌어도 굶어죽지 않는 시절이 되었다. 아등바등 미친 듯이 일하지 않아도 살면 살 수 있다. 맛집을 가야하고 고급브랜드를 입어야 하고 영화를 보며 남들이 하는 욕망을 따라서 소비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덜 벌고 더 살면 최상이 아니던가. 튼튼한 두 다리로 걷는 것의 즐거움을 모르고 차 없는 것을 탓한다면 욕망에게 지는 것이다. 십여 평짜리 내 집이 초라하다고 오십 평짜리 아파트를 부러워하면 욕망에게 지는 것이다. 명문대 들어간 자식이 없다고 한탄하면 욕망에게 지는 것이다. 우리는 다 알면서도 매번 지고 만다. 지는 것에 익숙해 있어서 또 다시 욕망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지구가 제아무리 커봤자 손바닥 안에 다 들어온다. 스마트폰 하나면 지구를 평정할 수 있다. 24시간 초단위로 정보를 공유하며 지구를 들었다 놨다 한다. 생각이 트이면 사는 게 한결 수월해진다. 자발적 가난을 요즘 말로 풀면 소확행, 욜로, 웰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빵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에 올인하는 것이다. 지구촌 날라리로 살면서 마음은 우주로 여행을 떠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면 그게 행복이다. 늘어난 추리닝에 라면을 먹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덕후가 세상 부러울 게 뭐가 있을까.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 자발적 왕따들이 지구를 진보시켰다. 기존 힌두교 세력에 대들었던 석가모니도 자발적 왕따였고 자신이 메시아라고 외치며 기독교를 창시한 예수도 유대교의 자발적 왕따였다. 공자도 니체도 칸트도 이순신도 다산도 자발적 왕따였다. 진정한 자유는 고독에서 오는 법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하지 않던가.

 

대놓고 묻는다. 그대는 소유가 좋은가 자유가 좋은가.




전승선 기자
작성 2018.10.01 11:02 수정 2018.10.0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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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