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노을빛 물러간 정암사 수마노탑은 홀로 외롭고 높네

여계봉


자연은 신이 갈아입는 옷이라 한 영국 철학자 칼라일 말대로 강원도 함백산은 이제 가을을 입고 있다. 함백산 자락 고한의 좁은 골짜기에 들어앉은 정갈하고 고요한 산사 정암사는 맑고 고즈넉하다.

 

태백산 정암사를 함백산 정암사라고도 부른다. 함백산(1,573m)은 태백산의 일부로 정암사를 둘러싸고 있다. 첩첩 산이 성벽처럼 둘러 있고 산이 높은 만큼 물은 깊고 맑다. 가을 산은 단풍으로 불이 붙기 시작하여 그야말로 자연의 조화가 부려놓은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지 않을 수 없다. 너른 함백산 품 가슴께에 살포시 안긴 산사의 기운이 싱싱하고 다사롭다.


불타는 단풍 한가운데에 서있는 수마노탑 하늘 기슭에는 부처의 미소가 넘쳐흐른다.


일주문을 지나 절집에 들어서면 오른쪽 계곡 물소리와 왼쪽 산자락 솔바람 소리가 멋진 앙상블을 이룬다. 물소리에서 솔내음이 나고 솔바람에 돌돌돌 맑은 물소리가 섞여 있다. ‘노래하는 새소리로 산이 고요한 것을 안다고 하신 어느 선승의 말씀을 약간은 이해할 것 같다. 수마노탑 연등이 단아하게 내걸린 그윽한 길을 따라 절집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일주문. 뒤돌아보면 티끌 번뇌는 흩어지고 문 안에 들면 맑은 생각이 피어난다.


정암사는 신라의 큰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14(645)에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하여 정암사(淨巖寺)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오대산 상원사, 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과 더불어 석가의 정골사리를 모시고 있는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다.


보물이던 수마노탑이 올 6월 국보로 승격하는 바람에 이 지역은 축제 분위기다.


정암사가 얼마나 정갈하고 청정한 곳인지는 이곳이 열목어 서식지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산 위에서부터 경내로 흘러내리는 계곡에는 열목어가 살고 있는데, 열목어는 물이 맑고 찬 곳에서만 자라는 천연기념물이다. 정암사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계곡물은 남한강 상류로 흘러 들어간다. 온통 검은 물투성이인 고한 일대도 탄광만 개발되지 않았다면 태백산 줄기의 맑은 물이 흐르고 흘러 열목어의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적멸보궁 옆 계곡은 천연기념물인 열목어 서식지다.


오른쪽 다리를 건너면 고색창연한 적멸보궁이 단아하게 서 있다. 적멸보궁의 입구에는 선장단(禪杖壇)이라는 고목이 있다. 자장율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인데 수백 년 동안 푸르렀으나 지금은 고사목으로 남아 있다. 이 나무에 잎이 피면 자장율사가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적멸보궁은 창건 당시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돼 있기 때문에 법당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있다.

 

적멸보궁. 수마노탑은 적멸보궁 뒤쪽 높은 산기슭에 있다.


적멸보궁 뒤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수마노탑으로 오른다. 오늘따라 암자의 솔향기가 유난히 코끝을 스친다. 암자에 은거하며 도를 구하는 선승들. 그들은 저만치 홀로 피어 있는 풀꽃처럼 고독하고 도도하다. 매화는 숨지만 향기는 숨길 수 없는 법, 선승은 깊은 산중에 숨는다 하여도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자신의 향기는 숨길 수 없는 것처럼.


노란 단풍으로 물든 산자락에 난 길이 끝나는 곳에 수마노탑이 있다.


산길을 오르는 중에 맞은편 봉우리들은 산 그림자로 그윽하다. 골짜기는 푸른 연기 같은 이내로 넘쳐 저물녘의 연못 같다. 해질 무렵 산사는 선녀 옷자락 같은 흰 구름에 보일 듯 말 듯 선경이다. 부처님 사리 모신 수마노탑 가는 이곳이 선계의 입구인가. 극락 가는 길이 여기서 한달음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적멸이 멀지 않은 것인가. 적멸이란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진 곳, 본래의 마음가짐인 고요의 상태로 돌아감을 이른다. 그렇다면 내 마음도 새벽처럼 깨어있는가?


수마노탑에서 내려다보는 절집은 이름 그대로 고요하고 정갈하다.


수마노탑은 회녹색 석회석을 잘라서 크고 작은 모전석으로 쌓은 탑이다. 마노석은 불교 7대 보석 중 하나인데, 자장이 당에서 올 때 서해 용왕이 준 마노석(瑪瑙石)을 배로 싣고 와서 탑을 만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물길을 따라온 마노석이라 하여 수마노로 불린다. 자장이 마노석으로 처음 지었다는 탑은 없어지고, 고려시대 때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모전석탑으로 건립되어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보수를 통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상륜부는 청동제의 상륜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모서리마다 풍령(風鈴)이 온전하게 달려있다.



7층 석탑인 수마노탑은 어디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사리탑이다.


저녁 공양을 알리는 소종 소리가 뎅뎅뎅 울린다. 산자락은 이미 산그늘이 접혀 먹물이 번진 듯 수묵호처럼 변해 있다. 탑에서 절집으로 내려서는 구불구불한 산길은 심연의 고독이 산죽의 이파리처럼 살갗을 찌를 듯 다가온다. 산 그림자는 속살같이 애틋하고, 홍옥빛으로 저무는 해를, 주황으로 번지는 노을을, 운해를 감은 산군들이 벌써 으스름하다.

 

노을빛 물러가니 수마노탑은 홀로 외롭고 높다. 독경 소리 대신 들리는 소쩍새 울음소리에 깊어가는 산사의 저녁을 뒤로 하고 절집 문을 나선다.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편집부 기자
작성 2020.10.26 11:59 수정 2020.10.26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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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