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마의태자

박재홍 <마의태자>

1956년 작사 손로원 작곡 이재호 노래 박재홍

 

 

노래는 세상과 통한다. 공자 말씀이다. 치세락(治世樂난세분(亂世憤망국탄(亡國嘆). 평화로운 시대에는 즐거운, 어지러운 시대에는 분통 터지는, 나라가 망한 때는 한탄의 노래가 불려진다. BC 551~479년 시기를 72세로 살아 낸 공자는 행인(行人)이라고 명명한 민중노래 수집가들을 방방곡곡에 보내서 시가 3천여 수를 수집한다. 다시 이를 풍·····흥 육의(六義)를 기준으로 305편을 분류하여 시경을 묶는다. 이때 노래는 세상과 통함을 설파한다. 그래서 대중가요를 통속적인 시대이념과 대중적인 감성을 아우른 역사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의태자> 노래가 탄생한 1956년은 6.25전쟁 총포성이 멎은 지 3년 째,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 펼치던 부활의 몸부림을 치던 시절이다. 그 황망한 시대를 작사가 손로원은 1천여 년 전, 금강산으로 들어간 비운의 마의태자를 음유하며 대중 속으로 불러낸다. 그리고 공자가 말한 난세(亂世)를 전쟁 상흔의 아픈 독을 품은 시절과 비유한다. 가락은 이재호가 엮었고 노래는 박재홍의 목소리에 태워졌다.

 

 

달빛만 고요하게 태자성에 슬픈 추억을

바람 따라 구름 따라 길손을 못 가게 하네

~ 피눈물에 무덤이 된 마의태자 우리 님아

풀벌레 울적마다 눈물이 젖는 구나

태자성 우리 님아

 

 

은은히 들려오는 장안사의 목탁소리만

산을 거쳐 물을 거쳐 길손을 울려만 주네

~ 베옷자락 원한이 된 마의태자 우리 님아

장삼에 삭발하신 스님도 우는 구나

태자성 우리 님아(1,2절 전문)


https://youtu.be/NuqF5b2QnxI  

 

노랫말 속 태자성(太子城)은 금강산 내금강 명경대구역 백천동에 위치해 있는 마의태자성(麻衣太子城)을 말한다. 태자가 풀 옷을 걸치고 머물던 자리. 장안사(長安寺)는 금강산 내금강에 있는 사찰. 유점사·신계사·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 6세기에 고구려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며 창건했다고 하며, 이은상 작사 홍난파 작곡 장안사가곡의 소재지다.

 

 

마의태자는 신라56대 경순왕의 아들.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 세력에 눌려, 935년에 고려에 투항귀부(投降歸附)하였다. 이에 태자는 반대를 하며 삼베옷을 걸치고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이때 그가 마지막으로 상투머리를 자른 곳이 단발령(斷髮嶺)이다. 그는 912년 경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생멸(生滅)연도가 분명치 않다. 경순왕과 죽방부인(竹方夫人) 사이의 첫째 소생이지만 이름은 전하지 않고, 마의태자 또는 태자라는 말은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는 아버지가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고려에 항복을 논하는 자리에서 불가함을 극간(極諫)하였었단다.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다른 나라에 넘겨주겠습니까.’라고 하면서.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었고, 경순왕이 눈물을 흘리며, 항복을 청하는 글을 지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편으로 고려 왕건에게 보냈단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에 태자는 통곡을 하며 부왕(父王)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 처자(妻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단다.

 

 

경순왕은 927년부터 935년 까지 재위했다. 본명은 김부(金傅),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능()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부대왕으로 기록되었다. 투항한 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맏딸 안정숙의공주와 아홉째 딸 왕씨 부인을 차례로 아내로 맞이했었다.

 

 

93511월 경순왕은 신라 신하들을 대동하고 금성(慶州)을 떠나 송악(開城)으로 향했다. 당시 행렬이 30리가 넘게 이어졌으며, 구경꾼들이 울타리를 두른 듯했단다. 송악에서 왕건은 그를 직접 맞이했으며, 유화궁(柳花宮)에 머무르게 하면서 사위로 삼았다. 12월에는 정승공(正承公)에 봉했다. 신라 왕()이 고려 공()이 된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파주시 장단면 사천강이 흐르는 벌판 가운데 도라산(都羅山)이 있다. 도라산전망대와 도라산역이 있는 곳, 높이 156m. 낭랑공주는 고려의 공()으로 침몰한 남편을 위해 산 중턱에 암자를 지었다. 영수암(永守菴). 정승공은 날마다 이곳에 앉아서 신라 방향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단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 성도 도() 신라 라(). 흔히 <도라OP>라고 한다. Observation Post의 줄임말.

 

 

마의태자 노래는 1934년 미스코리아 김추월(1896~1933)이 먼저 불렀다. ‘풀 옷을 몸에 감고 금강에 해 지우니 / 망군대 바위 돌에 새긴 뜻 한숨지네’. 모란봉이라는 예명의 그녀는 이 노래로 금강산에 숨어 있다가 봉화를 들고 나온 천사라는 칭송을 받았다. 1931년에는 안기영이 가곡으로, 1957년 손인호, 1982년 송창식, 1999년 조영남이 각각의 가사와 멜로디로 불렀다


유차영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8.10.12 12:21 수정 2018.11.1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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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