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구 칼럼] 선녀와 나무꾼

문경구

 

예로부터 우리 집안에 이어져 내려온 구전들을 나는 아름다운 가족사로 여겼다.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선녀와 나무꾼의 재미있는 사랑 이야기 등 수 많은 구전이 있었다. 그중 하나로 서울 동대문역에서 기동차를 타고 광나루에서 내려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 뚝섬에 닿아 산길로 반나절쯤 걸어 찾는 봉은사라는 절에서 시작된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오래 누워계신 어머니 영혼의 낡은 집을 이장해 드리려고 한국을 찾았을 때 일이다. 누이 집을 방문하여 나누는 재미있는 어린 시절 옛날이야기는 늙어서도 형제들이 만나면 나눌 수 있는 귀중한 구전이다. 푹 빠져서 이야기를 듣다가 벽을 쳐다보면 시계가 줄행랑을 치고 있다. 어디서나 시간은 이야기 속 전설처럼 흐르고 있다.

 

누이를 위한 화분들이 얌전하게 놓인 뒤뜰 무화과나무 아래서 이야기를 나눌 때 누이는 그곳이 지금의 강남 삼성동쯤이라며 지금도 그 절은 아직 남아 있을 거라고 오늘의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그 절에 남아 있던 나만 모르던 구전이라면서 스스럼없이 하나를 더 꺼내 놓았다.

 

그 구전을 누이는 애초부터 가슴에 품은 비상봉지처럼 평생 지키며 살아야만 했다고 말했다. 서로들 나이만큼의 세월이 간 후에야 누이는 끝난 역사 속 이야기라면서 구전을 편하게 털어 놓았다. 뚝섬 강 건너 자리 잡은 절, 어머니가 찾으셨던 봉은사에서 듣게 되신 말씀은 작은 아들인 나의 짧은 목숨 이야기였다. 나의 명줄을 잇기 위하여 다른 곳에 양자로 보내 당신의 자식임을 포기해야 한다는 기가 막히는 말이 그날 거기서 나왔다. 불가 대면은 독 속에서도 못 면한다는 그 말에 병을 얻어 오셨다는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였다.

 

누이도 나도 지금까지 함께 살아 있으니 그 비논리적이고 상식 없는 구전은 단연코 사실이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도 나는 그 말로 머리카락 끝이 뾰족하게 서는 쪽으로 따라나서고 있었다. 잠시 나누던 말이 뚝 끊기고 굳어진 나의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엷은 파동이 스쳐 갔을 때 옆에서 묵묵히 듣고 섰던 무화과나무도 기가 막혀 혀를 차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들으신 어머니는 무너지는 하늘을 두 손으로 어떻게 떠받치시고 사셨을까. 아무도 원망할 수 없는 아들과 어머니의 운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는가 보다. 그 명백한 전설의 구전을 쉬쉬하고 나만 모르고 사는 나를 보시며 매일 어머니는 얼마나 불행하신 생을 사셨을까. 손 쓸 수 없는 어린 아들의 죽는 날을 아신 죄로 얼마나 애간장을 졸이시며 사셨을까.

 

내가 성장할 때마다 남은 날들은 얼마인가 세어 보셨을 애달픈 가슴은 나로 인해 모두 태워졌다. 그래서 그렇게 일찍 가셨는가 보다. 아마도 나의 명줄을 이어주시기 위하여 선뜻 이 세상을 나 대신 가신 게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명줄을 이어받아 사는데에도 정해놓은 유효기간이 있었는가 보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의 부모는 무릎이 귀에 닿토록 오래 살았다는 소리는 시간제한이 없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까. 나를 위해 가실 곳이 못 되는 그 길을 택하신 풀릴 길 없는 의문은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알 수 없는 구전으로 남겨질 일이다. 그다음은 홀아비 자식으로 사는 조건으로 나의 명줄을 이어댄 것일까. 반세기의 삶을 송죽의 절개로 사셨던 홀아비가 내 곁을 떠나시면서 나의 명줄은 거기서 끝났으니 다시 계약을 재연장을 했던 걸까. 그럼 더 이상의 명분이 없는 목숨을 끝으로 나의 일생도 마쳐지는가 보다.

 

그렇게 내 목숨의 전설은 미궁에 빠졌고 어느 누구도 지켜줄 수 없는 목숨을 내 스스로 지켜야만 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계시지 않는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다시 목숨을 연장하는 일은 죽음과 맞바꾸는 철저한 아픔 그 자체였다. 그 첫 번째 연장을 위한 계약 조건은 왼쪽 다리로부터 그 알림을 받았다. 알 수 없는 통증의 시작으로 한쪽 신장을 떼어내는 고통으로 목숨을 연장했다. 나의 목숨은 내가 내 손으로 연장해야 하는 깨달음이었다.

 

임시변통 된 기한도 끝이 나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불안해졌다. 생로병사의 깨달음을 위해 일찍이 고행의 길을 나선 붓다에게 간절하게 편지를 썼다. 붓다는 대책 없이 보리수 나무 밑에 앉아 있었을 리가 만무다. 그러나 그림 같은 나무 아래 앉은 붓다의 세월이 천년을 흘렀어도 그 물음의 답을 받지 못했다.

 

수 없는 나의 고행 속에서도 연장의 끝과 시작은 계속되었다. 또 다시 하루가 다 가도록 수술대 위에 누워서 더 큰 수술을 받았을 때까지도 나에게 붓다는 답이 없었다. 차라리 세상에는 공짜로 얻는 일은 있을 수 없게끔 못을 박아놓았다는 말이 더 듣기 편했다.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나는 내 몸을 공양하고 또 서약한 대로 생명연장서를 다시 받았으니 말이다.

 

마지막 서약서는 아름다운 깨달음으로 나를 위로했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오묘한 말, 생명이란 그런가 보다. 살아 있기에 아픈가 보다. 모든 비밀을 밝혀낼 수 있는 영상과학으로 들여다보는 지금의 세상에서도 찾아낼 수 없는 구전 이야기의 허망한 꿈속을 사는 거다. 그런 미묘한 나의 생각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래도 나는 보증서의 계약만큼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름다운 서약서에 쓰여진 대로 모두 지불하고 남은 세상에도 봄은 틀림없이 올 테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을 문턱에다 간판을 내어 거는 화랑 속 그림들은 확실하게 그 약속을 지킬 것인가 지켜보고 싶다.

 

구전 속 나무꾼의 지게 위에 올려놓은 나의 생명연장서만큼 살아야 하는 날은 언제가 될까. 3

차원의 세상 속 생명연장도 언젠가 끝이 나야 한다면 나는 그냥 선녀와 나무꾼의 비밀이 있는 구전 속 세상에 그대로 남고 싶다.



[문경구]

화가

미주한인크리스찬문학협회공모 수필당선

문경구 kimurgin@hot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5.18 12:32 수정 2021.05.18 13:15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전명희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2025년 4월 24일
2025년 4월 23일
2025년 4월 22일
나는 지금 '행복하다'
2025년 4월 21일
2025년 4월 20일
2025년 4월 19일
2025년 4월 18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6일
2025년 4월 15일
2025년 4월 14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2일
2025년 4월 12일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