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을 쓰기에 가장 어울리는 시간은 늦은 밤보다 이른 새벽이 좋다. 그것이 딱 내 취향이라고 마음을 정하니 유독 일찍 눈이 떠지면서 새벽 공기처럼 만사가 차분해지고 또 다른 세상이 하나 더 있는 묘한 기분도 들었다.
세상 사람들 누구나 다하지 못한 말들을 가슴에 묻고 산다. 쌓인 낙엽 같은 모진 세월의 시간을 수필이 대신해 주니 새벽마다 든든한 지원군을 만나는 기분이다. 가난한 동네 커피집 앞에 놓인 외로운 테이블 위에서 든, 새벽을 달려가는 여행길에서 잠시 멈춰선 차 안에서 든 그곳에 있는 내 자유로운 영혼을 만나게 하는 나만의 지원군이다.
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나고 싶은 사람들 중에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도 있을 테고 시를 쓰는 시인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한 여름날의 초록빛처럼 모두의 마음이 어우러지는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늘 함께하고 싶어진다. 내게는 더 이상의 사람 욕심이 없다. 세상을 왔다가 돌아갈 때는 모두가 수필이라는 서정적 유전자를 나눈 이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자리 잡고 사는 그들만의 재산이 있듯이 나도 내가 살아가야 할 나만의 장소에 겸허의 짐을 늘 내려놓는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 북악산 자하문 밖으로 소풍 가기 전날 함께 가슴을 설레던 친구들의 기억도 나를 따라와 내 수필이 재료가 된다.
수필 속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입고 있는 다양한 옷의 인생처럼 나도 내 모습의 옷차림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여행길을 나선다. 밤이 되어 작은 숙소에 머물게 되면 인생의 길에서 만났던 바람과 비와 별과 사람의 향기로 수필을 쓰고 싶다.
끝없는 평야에서 잊혔던 기억 속 사람들을 만났다가 웃으며 이별의 인사를 한다. 인생이 다 그렇지 않던가.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나는 허무의 바다가 아니던가. 내 나이만큼의 돌탑을 쌓아 올리며 욕망도 쌓고 허무도 쌓고 기쁨도 쌓고 절망도 쌓으면서 인생이라는 수필을 완성해 간다.
세상 속 사연들은 언제나 나를 수필의 집으로 인도한다. 내 영혼이 숨 쉬는 작은 오두막이라는 수필의 집은 오랜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마음의 안식 준다. 궁핍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도 어른이 되어 이루었던 꿈도 그리고 우주로 돌아갈 영혼의 거처도 이 수필의 집에서 하나둘 만들어 가고 있다.
언제든지 가슴만 열면 만날 수 있는 나만의 세계 속 사람들을 수필의 집에서 만난다. 어린 시절 땅따먹기할 때 잃었던 금싸라기 땅도 되찾아 올 수 있다. 잃어버린 젊은 날의 친구도 만날 수 있고 늘 먹먹한 어머니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그리운 형제들도 지인들도 수필의 집에서 늘 만나는 사람들이다.
엊그제 연락받은 한 지인의 남편은 매달 내고 머물렀다는 ‘오천 불짜리 요양원’에서 마지막 인생의 점을 찍고 세상 문을 닫고 나설 때 그 어느 한 가지도 지니고 갈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수필이라는 집에서 글이라는 영혼의 문서를 가지고 떠날 수 있다. 한 세상 살다가 떠나는 날이 온다 해도 그동안 지은 영혼의 문서들을 마음에 넣고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내 수필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온다. 천당에 가려면 예수 믿는 도리밖에 없다고 딱 잘라 말하면서 함께 교회에 나가자고 사정하던 한 노년의 부인이 찾아 왔다. 그녀의 고백은 절실했다. 자신은 꿈많던 소녀였다고 말은 하는데 다 듣고 보니 꿈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현실 속 이기심으로 가득찬 여인이었다. 젊은 날 자신이 지닌 원죄의 고독은 자기 것이 아니라며 팽개치고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던 자신이 바로 그 소녀였고 고백한다. 남겨진 사람들의 고독은 자신의 고독보다 더 크고 험난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와 보니 이미 늙어버린 후였다고 한다.
신앙이라는 허깨비를 핑계 삼아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를 찾아와 보니 그곳엔 늙고 힘없는 교회 오빠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사가 된 교회 오빠는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해 주었다. 목자를 잃고 떠돌다가 가시덤불에 갇힌 한 마리의 어리석은 양으로 살았던 그녀는 이제 깨달았다. 기쁨도 슬픔도 욕심도 희망도 다 내 안에서 자라나는 나무라는 것을 깨닫고 참회의 기도를 올렸다.
어린 시절 일요일이면 예배당을 찾아가면 동네 어귀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교회 오빠, 여름성경학교에서 찬송가를 가르쳐주던 교회 오빠를 사모했던 소녀는 늙은 여인이 되어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인생을 참회하며 뜨거운 고백을 쏟아 놓는다.
그녀의 고백은 나의 수필의 집에서 세상이라는 베틀에 앉아 한올 한올 정성을 다해 아름다운 인생의 옷을 짜고 있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