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처제 안영순 씨로부터 카톡으로 전달받은 ‘행복 날개’를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옮겨 보리라.
장자莊子편에 풍연심風憐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바람은 마음을 부러워한다는 뜻을 지닌 내용입니다.
옛날 전설의 동물 중에 발이 하나밖에 없는 기夔라는 동물이 있었습니다. 이 기夔라는 동물은 발이 하나밖에 없기에 발이 100여 개나 되는 지네를 몹시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 지네 에게도 가장 부러워하는 동물이 있었는데, 바로 발이 없는 뱀(蛇) 이었습니다. 발이 없어도 잘 가는 뱀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이런 뱀도 움직이지 않고도 멀리 갈 수 있는 바람(風)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냥 가고 싶은 대로 어디든지 씽씽 불어 가는 바람이기에 말입니다. 바람에게도 부러워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어디든 가는 눈(目)을 부러워했습니다. 눈에게도 부러워하는 것이 있었는데, 보지 않고도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마음(心)을 부러워했습니다. 그 마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습니까?”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전설 속 동물인 외발 달린 기夔 입니다.”
마음은 의외意外의 답答을 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쩌면 서로를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상대적으로 가진 상대를 부러워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진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것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세상이 힘든 것은 부러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지위와 부, 권력을 부러워하면서 늘 자신을 자책하기에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부러워하고, 부자는 권력을 부러워하고, 권력자는 가난하지만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결국 자기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일 테니까요.
이런 말이 서양에 있다.
“행복이란 나비와 같아 네가 좇아가면 날아가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네게 내려앉는다. Happiness is as a butterfly which, when pursued, is always beyond our grasp, but which, if you will sit down quietly, may alight upon you.”
지난 50여 년간 연구 조사해온 사회과학자들은 유전인자, 성춰감 그리고 가치관 이 세 가지 요소를 행복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심리학자와 경제학자들이 연구 조사해본 결과 행복감의 50% 정도가 유전인자에 기인하고, 40%는 노력해서 목적을 달성한 성취감에서 오나 이 성취감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오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10%에 해당하는 가치관에 행복이 좌우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갖는가, 다시 말해 어떤 신앙이나 신념, 어떤 가족관계, 어떤 사람들과 친교를 맺는가, 그리고 얼마만큼의 열정을 갖고 어떤 직업을 갖느냐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거다.
영국의 자연파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가 그의 시 ‘내 가슴 뛰놀다 My Heart Leaps Up’ also known as ‘무지개 The Rainbow’ (1807)에서 “어린애는 어른의 아버지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이라고 했듯이 이런 어린애가 우리가 어른 된 다음에도 계속 우리 각자 속에 살아 있는 것일까?
1990년에 나온 ‘귀향Homecoming: Reclaiming and Championing Your Inner Child’ 등 몇 권의 책이 1988년 이후 미국에서만 수백만 권 이상 팔렸고 책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녹음한 녹음테이프도 베스트셀러로 현대판 ‘복음 福音Gospel’을 전파해온 존 브래드쇼 John Bradshaw (1933-2016)는 미국 각지로 다니면서 여는 강습회 워크숍에 모여드는 청중에게 말한다.
“어른들이 느끼는 고립감, 고독감, 절망감 등 모든 불행감이 다 우리가 어린 시절 겪은 애정결핍에서 비롯한 것으로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우리 각자 속에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그 한 예로 든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공개하지 않은 비밀을 갖고 있는 만큼 병들 어 있는 것이라고. 그의 나이 열 살 때 알코올 중독자인 아빠는 부인과 어린 세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갔는데 친할아버지는 엄마를 강간 능욕했고, 외할머니도 근친상간 당한 후유증에서 50년 동안이나 자리에 몸져누워 있었다고 한다. 남자를 몹시 혐오하게 된 이 외할머니가 “남자들이란 그들의 자지로 생각한다. Men think with their penises/penes.”라고 하는 소리를 여섯 살 때 들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와 같은 만성 고질병을 낫게 하려면 우리 모두 각자 자신 속에서 아직도 신음하고 있는 ‘어린애’ 보고 “자, 이제 내가 너를 잘 보살 펴 주마”라고 각자 지신 속의 어린애를 가슴에 안고 이 어린애를 그 옛날에 학대한 부모형제로부터 떠나라고, 그들에게 “잘 가” 작별을 고하라고, 그는 청중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면 걸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타이른다.
우리 동양에서는 예부터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이 있어 온 것처럼 서양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성 천성천품天性天稟과 태어난 후로 얻게 되는 환경과 교육으로 빚어지는 후천적인 변이성變異性 인격교양人格敎養 두 가지 가운데 어느 쪽 비중이 더 큰가 의론議論이 계속 끝없이 진행되고 의견意見이 분분紛紛해온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그동안 여러 해를 두고 많은 심리교육학자들이 합동으로 연구 조사해 본 끝에 거의 결정적인 공론公論에 도달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특히 이번의 연구조사방법과 그 대상이 종전의 것과 다른 특이特異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론異論의 여지가 적었다고 한다.
그 대상으로 여러 쌍의 동성 쌍태아를 아주 어려서부터 각기 분리시켜 전혀 다른 환경에서 키워 본 결과 주어진 여건과 받은 교육에 상관없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70~80%가 선천적인 요소라면 그 나머지 20~30%가 후천적인 가능성이란 것이다.
이와 같은 발표에 나는 회심會心의 미소微笑 짓고 감탄感歎의 탄성歎聲을 발하게 된다. 과학적이고 유식有識 박식博識하다는 서양의 학자들이 부산떨며 공연空然히 ‘말로서 말 많을까 하노라’ 하는 대신 우리나라에서는 저 아득히 먼 옛날 옛적부터 그 어느 촌부村夫/村婦 아무나 다 알고 말거리가 못 되는 상식 중의 상식 같은 슬기와 지혜를 배우고 익히러 우리나라로 유학들 올 일이지.
쯧! 쯧! 우리나라 사람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입만 뻥긋하면 진리 중의 진리 같은 말만 내뱉지 않는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는가 하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하고, ‘클 나무는 떡잎 때부터 알아볼 수 있다’며,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 하지 않았나.
인생살이 85년 해오면서 내가 더욱더 절실히 깨닫고 확인 또 확인해 온 한 가지 불변의 진실과 진리는 사람이고 일이고 간에 ‘추일사가지推一事可知’라고 한 가지 일로 미루어 모든 일을 알 수 있다는 것이고, 또 ‘시작이 반半’이라기보다 ‘시작이 전부全部’라는 것이다.
시켜서 할 사람이면 누가 시키기 전에 본인 스스로 알아서 잘할 사람이고, 남이 시켜야 할 때는 이미 너무 늦고 가망 없다는 뜻이다. 노예나 종같이 말이다. ‘덕德은 그 자체로서 보답이고 보람이며 보상 Virtue is its own reward’이라 하듯이 일도 삶도 그렇고 사랑하는 만큼 그만큼 행복할 수 있지 않으랴.
‘부조리의 연극’이라 불리는 극작품들이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 유럽과 미국 극작가들의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 그대로 인생의 부조리성不條理性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연극의 기능이고 작업이란 뜻이다.
이 ‘부조리’라는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용어로서 사용되는 단어는 프랑스 작가 알배러 카뮈 Albert Camus (1913-1960)의 부조리 철학에 의해 알려진 것으로 인생에서 삶의 의의意義를 찾을 희망이 전혀 없는 한계상황적 절망상태를 가리키는 데 쓰인다. 산다는 것이 부조리하다는 생각은 1942년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 The Myth of Sisyphus’가 발표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에세이에서 카뮈는 말한다.
“신神들은 시지프에게 쉴 사이 없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형벌을 가하였다. 산꼭대기에 이르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로 말미암아 또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무익하고도 끝날 가망이 없는 노동이란 무섭고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 것이 신들을 경시輕視한 그의 태도와 행위 때문”이란 것이다.
그는 신들의 비밀을 누설한 것이다. 시지프가 부조리의 영웅임을 이만하면 알 수 있으리라. 그의 고뇌苦惱뿐만 아니라 그의 정열 情熱로 인해 그는 부조리의 영웅이 된 것이다. 신들에 대한 그의 도전, 죽음에 대한 그의 반발, 생명에 대한 그의 애착愛着과 열정 熱情이 결단코 성취될 수 없는 일에 그의 온 힘과 전 존재를 다 바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이 절망적絶望的인 형벌을 그는 초래招來, 자초自招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정의하는 것은 인생이 본질적으로 신비하고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인식은 삶의 방향과 목적과 의욕을 상실하는 데서 오는 당혹감當惑感에서 출발한다.
이 같은 인간실존의 부조리성을 다룬 작품으로 아일랜드 출신이면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한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가 있다. ‘고도Godot’란 누구일까.
1952년 발표되어 그 다음해 1953년 파리에서 프랑스어로 무대에 오른 이후 세계 각국에서 여러 나라말로 거듭 상연되어온 이 극작품에는 에스트라곤Estragon과 블라디미르Vladimir라는 두 부랑자浮浪者가 등장한다.
고도라는 이름의 신비스런 인물을 끝없이 기다리면서 이렇다 저렇다 다투고 있다. 그가 올 예정된 시간과 장소가 어느 때 어느 곳 언제 어디라고 서로 질세라 우겨대면서 이들은 재치문답의 말장난을 하며 놀고 있다.
2막으로 된 이 연극의 각 막이 끝나갈 무렵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의 왕림枉臨이 임박臨迫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고 제1막, 제2막 다 두 부랑자의 다음과 같은 대사로 막이 내린다.
“자, 이제 우리 갈까?”
“그러지, 이제 우리 가세.”
그러나 둘 다 움직이지 않는다. 동정同情과 연민憐愍/憐憫, 희망 希望과 기지機智가 가미加味된 인간의 무지 無知/無智와 착각 錯覺 때문에 생기는 무기력無氣力한 마비상태痲痺狀態가 상징적 象徵的으로 설득력 있게 잘 묘사되고 있다.
‘고도’란 신神의 지소사指小辭인 ‘Godot’임이 분명하지만 어쩌면 ‘신神’이라는 ‘God’와 ‘바보’라는 ‘idiot’란 두 단어를 복합複合한 합성어合成語 ‘고도Godot’를 통해 어리석은 인간의 허망허탄虛妄虛誕한 허탕을 꼬집고 인간의 참된 구원救援과 행복의 조건은 외재外在하는 것이 아니고 내재內在하는 것임을 암시暗示하는 것이리라. 시지프 신화에서와 같이, 행복이란 그 누가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 누리는 것임을.
그리스 신화에서 아소포스Asopos의 딸 아이기나는 제우스 Zeus신에게 유인을 당하였다. 아소포스는 딸이 없어진 것을 알고 놀라 시지프에게 호소했다. 이 유인사건을 알고 있던 시지프는 코린트 성城에 물을 공급받는다는 조건으로 이 사실을 아소포스에게 말해준다. 하늘의 진노震怒인 벼락보다 물의 은총 恩寵을 택한 것이다. 이때문에 그는 지옥에서 형벌을 받게 되었 다.
서력 기원전 13세기경의 그리스 일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 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Iliad-Odyssei’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 중에 있었던 일을, ‘오데세이’는 그 후의 사건들을 다룸)의 작가로 알려진 서력 기원전 8세기경의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 Homeros는 시지프가 사신死神을 쇠사슬에 얽어맸다는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저승의 신 하데스(로마신 풀루토)는 제 세상인 저승이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고요해진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전쟁의 신을 급히 파견, 사신을 시지프의 손에서 해방시켰다. 게다가 임종이 가까운 때에 시지프는 처의 사랑을 시험해보려고 자기 시체를 땅에 묻지 말고 광장 한복판에 팽개쳐 두라고 그는 처에게 일렀다.
시지프는 지옥에 떨어진다. 인간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먼 처의 복종에 화가 난 시지프는 처를 골려주기 위해 다시 한번 지상으로 돌아올 허가를 하데스(풀루토)에게서 얻는다. 그러나 재차 이 세상 풍경을 보고 햇볕에 탄 돌과 바다의 맛을 보자 그는 저승의 어둠 속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진다. 소환도 경고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을 그는 하구의 만경과 찬란한 바다, 대지의 미소를 즐기며 살아간다. 신들은 그를 체포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옥에는 벌써 그를 위한 바위가 준비되어 있었다. 지옥에서의 시지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본래 신화란 인간의 상상력이 그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리라.
우리들에게는 다만 시지프가 저 거대한 돌을 밀어 올려 굴리는 그의 혼신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긴장한 그의 얼굴. 돌에 밀착된 그의 뺨, 진흙에 뒤덮인 바윗덩어리를 지탱하는 그의 어깨, 돌과 한 덩어리가 된 몸을 받치고 선 그의 두 다리, 흙투성이가 된 그의 두 손으로 굳게 움켜잡아 쥔 너무도 인간적인 정확성과 집착력이 우리에게 여실히 보일 뿐이다.
도달할 하늘이 없는 공간과 끝나는 날이 없는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 이 길고 한없는 노력 끝에 일견一見 목적이 달성된다. 그러자 어느새 돌은 순식간에 하계下界/下溪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시지프는 보고 있다. 하계로부터 다시 기백 번, 기천 번째 그 돌을 그는 산꼭대기로 올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다시 들로 내려간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 주말이면 월말이면 또 연말이면 반복되는) 이 하산下山, 이 휴식休息,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시지프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기진역진氣盡力盡하여 돌 가까이 가는 그의 얼굴은 돌 그 자체다. 무거우나 틀림없는 발걸음으로, 끝을 알 수 없는 고뇌의 발걸음으로 그는 산을 내려간다. 이를테면 호흡작용처럼 그의 불행이 반복되는 이 순간, 이것은 의식을 되찾는 순간이다.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거처로 내려가는 이때 시지프는 순간마다 그의 운명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운명의 바위보다 굳세다.
시지프의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그 주인공의 의식이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성공한다는 희망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를 떠밀고 있다면 그는 어떠한 어려움도 감수,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의 노동자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또는 감성적이든 매일 같은 일에 종사하고 그의 운명은 시지프의 것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가 비참해지는 것은 그의 의식이 눈을 뜨는 희귀稀貴한 순간뿐이다. 신들의 무산자無産者 프롤레타리아(독일어 Proletalier)요, 무력無力하면서도 반항하는 시지프는 자기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全貌를 알고 있다. 산을 내려오면서 줄곧 그가 생각하는 것은 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의식하는 그의 인식認識이 그의 승리를 완벽하게 한다. 모멸侮蔑함으로써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날마다 시지프의 하산은 고통스러운 자학 自虐의 행로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기쁨에 찬 자존자대自尊自大 곧 자애自愛의 행로일 수가 있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시지프가 그의 바위로 돌아온 장면을 상상해보자. 고통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다. 이 대지大地의 아름다운 광경이 너무나 기억에 생생할 때, 행복을 갈망하는 부르짖음이 너무나 격렬할 때, 너무도 비통悲痛한 비애悲哀가 인간의 가슴을 채운다. 이것이 바위의 승리요, 바위 그 자체다. 끝없는 고통과 한없는 비애란 인간으로서 감당 못할 일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겟세마네의 밤이다.
그러나 사람을 짓눌러버리는 사실은 이 사실을 인식認識할 때 소멸消滅된다. 에디푸스Oedipus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에디푸스는 그가 그의 운명을 알게 되는 때부터 그의 비극이 시작 된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눈이 멀고 절망한 에디푸스는 이 세상에 자기를 붙들어 매는 유일한 끈은 생기 넘치는 딸의 팔이란 것을 그는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이때 경이로운 말이 들린다.
“이와 같은 많은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령老齡과 내 영혼의 위대함은 나로 하여금 단단케 한다. 모든 것은 다 좋다고 나는 판단한다.
이렇게 에디푸스는 말한다. 이 말은 숭고崇高하다. 이 말은 인간 의 잔인하고 무정무한無情無限한 우주 속에 쩡쩡 울린다. 이 말은 모든 것이 과거에 다한 일 없고, 현재도 다하지 않으며, 미래에도 다하지 않을 것임을 알려준다.
이 말은 온갖 불행과 고통을 갖고 이 세계에 들어온 신들을 이 세계로부터 쫓아낸다. 이 말은 인간의 운명은 인간이 풀어야 할, 인간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에 시지프의 남모를 기쁨이 있다. 시지프의 운명은 시지프의 것이다. 시지프의 바위는 시지프의 것이다.
그렇지만 본래本來 원래原來 애당초當初 우리는 모두 우주 나그네 우주인이요, 행복의 날개를 단 코스미안으로 사랑의 무지개배를 타고 코스모스바다로 항해, 아니 코스모스하늘로 비상할 수 있는 까닭에서이리.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