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기록을 갱신하는 코로나 확진자수 뉴스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코로나19 때문에 하루하루 힘겹고 짜증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4단계로 격상되면서 입은 마스크로 틀어막은 채 저녁 6시 이후에는 3인 이상 만날 수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을 맞이한 것이다.
맷돌은 곡식을 가는 우리의 전통 도구다. 맷돌은 위와 아래의 두 돌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위쪽에 난 구멍으로 곡식을 넣으면 맞물린 두 돌의 틈으로 곡식이 빠져나오면서 갈리게 된다. 여기서 '맷돌의 위쪽 돌에 달린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부른다. 맷돌을 돌리려면 반드시 있어야 할 부속품이다. 아무리 좋은 돌로 잘 만든 맷돌이라도 어처구니가 없다면 정말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인 셈이다.
어떤 일을 겪고 나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처구니가 없다' 또는 '어이가 없다'는 말을 한다. 어처구니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맷돌로 곡식을 갈 수가 없다. 따라서 어처구니는 어떤 물건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다.
어릴 때 기자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맷돌이 있었다. 주로 녹두전과 콩국수를 해 먹기 위해 녹두와 콩을 맷돌로 갈았는데, 그때마다 맷돌로 곡식을 가는 일은 남자인 내가 해야 했다. 여름철 별미인 콩국수는 겉으로 보기엔 그냥 뚝딱 말아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콩국수 한 그릇에는 어머니의 세심한 정성이 담겨 있었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지만 대충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가장 좋은 강원도 콩을 시장의 단골 가게에서 사 온다. 콩을 깨끗이 씻고 불려서 삶은 다음 맷돌에 직접 갈아서 고운 면포로 걸러내 콩물을 만드는데, 콩을 삶을 때도 시간을 철저히 지킨다. 끓기 시작한 후 10분 지난 후 불을 끈다. 너무 오래 삶으면 메주 냄새가 나고, 짧게 삶으면 콩 비린내가 나기 때문이다. 먹는 사람이야 단숨에 들이키지만, 만드는 사람은 그만큼 땀을 흘려야 한다. 콩의 훌륭한 영양가에 어머니와 기자의 정성까지 더 했으니 뜨거운 여름 한 철나기에 부족함이 없는 보양식품이었다.
한여름에 우리 집은 콩국수를 해 먹으려고 콩을 갈기 위해 찾아오는 동네 사람들로 늘 문전성시였다. 이럴 때는 자칭 맷돌 장인(匠人)인 기자가 마을 사람 앞에서 맷돌 돌리는 시범을 먼저 보인다. 그냥 개념 없이 어처구니를 돌리면 두 돌이 균형을 잃어 윗돌이 쉽게 분리되는데, 어처구니를 잡고 일정한 방향으로 고르게 힘을 가해야 두 돌이 균형을 이루면서 콩이 고르게 잘 갈리게 된다.
맷돌은 주로 제주의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든다. 우선, 맷돌은 곡식 가루에 열변성을 크게 입히지 않는다. 맷돌이 회전할 때 속도는 초속 0.5~1m 정도다. 이에 비해 가정용 전기 믹서는 이보다 10~100배 빠르다. 결국 맷돌은 믹서기에 비해 엄청나게 낮은 열에너지를 내는 셈이다. 믹서로 곡물을 분쇄하면 상당한 고열의 발생과 함께 곡물가루의 조직도 크게 손상시킨다. 콩을 믹서에 갈면 콩물이 고열에 의해 산화되어 비린내가 심하고 고소한 향과 맛이 덜하다. 그에 비해 우리 맷돌은 식품의 자연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과학적 분쇄 기능을 지닌다.
가족이 20년 가까이 살던 오래된 한옥에서 새로 지은 양옥으로 이사할 때 우리 가족의 가장 큰 고민이 바로 맷돌이었다. 두고 가자니 아직은 쓸모가 있을뿐더러 정이 많이 들었고, 가지고 가지니 너무 무겁고 부피가 컸으며 새집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었다. 며칠 고민 끝에 결국 부모님은 동네 사람들이 맷돌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두고 가기로 결정하셨다. 이사 가는 날, 내 손때가 묻은 어처구니가 달린 맷돌이 마당 한구석에 헹하게 남아있는 모습이 어찌 그렇게 서글퍼 보이던지 어머니께 그냥 가지고 가자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맛있고 영양 만점인 콩국수를 여름에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여름철 단골 메뉴인 냉면이나 삼계탕은 사철 음식이 된 지 이미 오래인데, 유독 콩국수만 1년 내내 하는 전문점이 거의 없다. 대개 칼국수 집이나 분식점 등에서 여름 한정 메뉴로 콩국수를 내기 때문이다.
지금 염천(炎天) 땡볕의 여름이 한창이다. 속절없이 이 여름이 가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콩국수는 기다림의 음식이다. 그리움의 맛이다. 영양 덩어리 콩에 메밀과 부추까지 더한 그 귀한 음식을 여름 한 철에만 먹을 수 있다는 건 비극이다.
어릴 때 어처구니를 손에 잡고 맷돌을 돌리던 추억에 잠겨본다. 코로나가 잡아 먹어버린 오늘의 우리 삶이야말로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세상이다. 우리 삶의 어처구니를 한방에 빼앗아 간 코로나 바이러스가 하루빨리 사라지고, 우리 일상에 필요한 모든 어처구니가 속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여계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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