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필의 인문학 여행] “만리재 옛길로 마포종점을 가다”

조선의 융성과 몰락을 보다

김용필

 

1. 만리재 옛길은 도성으로 가는 물류 이동의 행로다.

 

만리재 옛길은 서소문에서 만리재를 넘어 마포종점에 이루는 옛길을 말한다. 서울로 2017이 개발되면서 서부 서울역이 새로운 관광명소로 명성을 되찾았다. 만리재 옛길은 도심이면서 가장 낙후한 지역인데 서울로와 서부역사 개발로 공원과 카페촌이 새롭게 생기면서 만리재 옛길은 오피스텔 빌딩 숲을 이루었고 철도 4개 노선이 교차하는 공덕 오거리와 마포가 도심권으로 변신하였다.

 

만리재 옛길은 도성으로 들어가는 물류 이동의 제1번 도로였다. 마포나루에서 삼남의 세곡과 물류가 하역하여 도화. 공덕. 만리재. 중림. 서소문으로 입성하는 길이다. 원래 한양성에서 마포나루로 가는 길은 서소문 (소희문)에서 칠패 시장을 거처 봉래, 애오개(아현)를 넘어 공덕, 마포나루에 이르는 길인데 물동량 이동의 최단 거리는 소희문에서 만리재(대현)를 넘어 공덕, 도화, 마포나루(마포종점)로 가는 길을 새로 만들었다. 지금도 만리재 옛길은 조선 600년 동안 삼남의 물산이 마포나루에서 한양성으로 옮겨가는 산업도로로 중요한 기능을 다 하고 있다. 한양성 백성을 먹여 살렸던 물산이 바로 만리재를 통하여 들어왔다. 따라서 만리재 옛길엔 우마차와 손수레로 짐을 나루는 진풍경을 이루었던 곳이다.

 

2. 만리재 옛길 따라 역사기행을 떠나다

 

서소문에서 만리재를 통해 마포종점으로 가는 행로엔 수많은 역사 유물이 존재하고 있다. 만리재 옛길의 역사기행은 용산과 마포를 아우르는 역사기행이다. 마포종점은 삼개(3=용산. 마포. 서강)포를 말하는데 마포구와 용산구의 경계 끝에 있는 포구가 마포종점이다. 그럼 용산은 어디인가? 바로 마포종점의 청암대 언덕을 말한다.

 

누구나 용산 하면 용산역과 미8군영, 한강로를 따라 넓게 펼쳐진 녹사평전의 땅을 말한다. 이것은 일제가 만든 행정 구역이다. 인왕산에서 안산, 봉작산, 효창원을 이어 도화동 청암동에 이루는 등성이를 따라 양쪽으로 마포구와 용산구로 나누는데 용산은 두 행정구의 합류 끝점인 청암대(용머리)를 말한다. 청암은 용머리가 한강으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절벽이다.

 

여행은 서소문(소희문)에서 시작한다. 남대문은 큰 대문이라 사람의 소통이 없고 서소문으로 사람과 물산이 소통하였다. 조선의 최대 시장은 남대문과 소희문 사이에 있는 칠패 시장이다. 발길은 어느덧 남대문 밖 조선 최대의 시장이 열렸던 칠 패 시장터를 돌아 서소문 공원의 순교자 성지를 돌아본다. 김정오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염천교로의 구둣방을 지나면 명동 성당보다 먼저 선 한국 최초의 낙현성당 언덕을 오른다.

 

이곳에서 잡힌 순교성자들은 서소문 공원에서 처형되었다. 낙현성당(1892)을 돌아보고 남쪽으로 걸으면 서부역이 나온다. 서부역에서 2017 서울로 숲길을 걷는다. 서울로는 폐허가 된 뉴욕의 맨하턴 철도 공원과 같이 무너지려는 서울역 고가도로를 공중 공원으로 만들어 서울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서울로 2017이 공중 정원이 서면서 서부역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서부역이 공항철도 출발점이 되면서 만리재는 획기적인 개벽을 이루었다.

 

만리공원 카페촌을 지나 손기정 공원에서 잠시 땀을 식히며 손기정 옹의 나라 사랑이 야길 듣고 공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 새로 조성된 중림동 아파트 단지와 서계동 사이로 난 만리재 길로 들어선다. 아파트 숲 대로를 걷다 보면 한글 창조에 반대한 최만리 선생의 고택이 명패 없이 서 있어서 누구의 집인가 의아하게 한다. 10여 분 걸으면 중구와 용산구와 마포구 3구가 만나는 3각 점에 이른다. 이곳이 만리재(대현)이다. 이곳에 대현의 소희문이 있었다. 지금의 소희초등학교 자리다.

 

이곳에서 산등성으로 가는 보행길과 만리재길로 가는 우마차 길이 갈라진다. 능선길은 만리시장, 청파초교, 효창공원, 만리창, 도화동, 청암대에서 마포종점의 길이고 다른 길은 우마차가 다녔던 만리재 옛길이다. 비탈길을 내려 서울 서부지청과 공덕초교에서 족발 식당이 늘비한 공덕시장에 이른다. 공덕시장은 옛날 수레꾼과 짐꾼들이 탁주를 마시던 주막촌이었다. 마포 족발은 그때부터 유명하다. 공덕역은 지하철 4개 노선이 지나는 대역사다. (공항철도. 경의선. 5호선. 6호선) 곧 안산선이 들어오면 5개 노선이 교차한다.

 

공덕시장에서 길을 건너 사잇길로 나서면 공덕 오거리가 나오고 용산에서 신촌으로 가는 경의선 숲길(철로 공원)에 만리창이 있었다. 숲길을 건너 마포 삼성아파트로 이어지는 샛길에 음식점이 즐비하다. 이곳이 복숭아 과수원이었던 도화동이다. 도화동은 큰 아파트촌이다. 이 길을 계속 남으로 내려가면 불교방송이 나온다. 바로 마포 종정 전차 역이 있던 곳이다.

 

불교방송국을 지나 한신 오피스텔을 돌아서면 바로 마포나루 용산 나루가 만나는 곳에 마포 타워가 있다. 바로 뒤 언덕이 담담정이 있던 청암대이다. 이곳이 최초 발동선이 오가던 용산 나루터다. 퇴적으로 용산 나루터가 폐쇄되자 항구는 오른쪽 마포 나루터를 옮겨졌다. 이곳이 마포종점이다. 마포대교를 따라 여의도의 빌딩 사이로 석양이 아름답다.

 

3. 만리재 옛길의 유명한 문화 유적들

 

담담정, 읍청루. 별영창, 만리창 새창주전소. 효창원. 새우젓 시장. 소금 창고. 장독제작소. 공덕 주막촌, 애오개 무덤. 칠패 시장이 유명한 명소이다.

 

(1) 淡淡亭(담담정)

- 강호의 풍류객과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한 정자이다.

 

담담정은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다. 마포구와 용산구의 경계점에 청암대 언덕이 있다. 한강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용산(용머리)이다. 이곳에 서거정이 남호 독서당을 짓고 안평대군이 담담정을 지어 조선의 석학들과 집현전 학자들이 학문을 논하였다. 그 옆에 남호독서당의 별관인 읍청루와 별영창이 있었다.

 

담담정은 원래 귀후사()가 있었던 자리에 세종대왕의 3남인 안평대군이 안견과 서화를 그렸고 창의문 밖 무계정사에 있던 1만 여권의 서적을 담담정으로 옮겨 선비와 시인 묵객들을 불러 강호에서 풍류를 즐겼다. 그런데 계유정난으로 세조는 안평대군을 죽이고 이 집을 정란의 공로자인 신숙주에게 하사한다.

 

계유정난은 세조가 단종을 치고 왕이 되자.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반대했고 안평대군, 김종서, 정인지가 단종의 편에 서는데 집현전 학자 신숙주는 배반의 붓을 들고 세조 편에서 사육신 숙청에 앞장을 선다. 세조는 찬탈에 반대한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보내 죽인 후 김종서 정인지와 성산문 등 사육신도 죽이고 안평대군의 담당정을 신숙주에게 내준다. 그는 담담정에서 평생의 영화를 누렸다.

 

학문과 시문 호객이 독서하던 담담정이 피로 얼룩진 불행한 비극의 역사를 연생 하였다. 청나라가 용산강 포구에 병관을 세우고 새로운 항구를 만들어 발동선과 유람선을 띄웠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긴 후 용산 포구를 군사 항구로 만들고 청암대 담담정를 조선 총독부 정무별감의 별장으로 만들어 신용산에 일본군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해방 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 총독부 정무별감의 별장을 자신의 별장으로 만들었다. 그 후 별장은 벽산 고급 빌라로 용산의 명물이 되었다.


(2) 별영창

-병사들의 급료나 군량비를 저장한 군자감 창고이다

 

용산강 포구는 최초로 조선에 발동선이 운항한 군사요충지였다. 청나라가 개항하여 영국 독일 배가 장착해 있었다. 별영창은 용산강 나루에서 하역한 세곡 중에 훈련원 급료(군자감)나 군량미를 저장한 창고이다. 용산강에 퇴적사로 배가 오르지 못하고 강하의 마포나루에 정착하면서 항구로 기능을 잃었고 삼개나루 (마포 나)가 새로운 항구가 등장하였다. 마포나루에 하역된 쌀, 소금 등 삼남의 물류는 신수동의 광흥창(관료봉급). 청암대의 별영창(군자감.군량미) 새창의 만리창(선혜청) 공덕의 대흥창 (도성백성용 곡물)에 저장하였다. 그리고 수산물. 새우를 저장하던 용강창, 소금을 저장하던 염리창, 독을 만들어 저장한 독막창이 있었다.

 

(3) 읍청루(挹淸樓)

- 정조대왕이 수군훈련을 지도하던 누각

 

담당정과 별영청 옆에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읍청루란 누각이 있었다. 훈련도감의 병사들이 수군훈련을 받던 곳이다. 정조대왕이 수군 병사를 직접 교육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정조대왕이 아들을 득남하고 축하연회를 베풀던 곳인데 왕자가 일찍 죽자 효장원에 묻고 오가면서 아들의 죽음을 애도했던 곳이다. 훗날 일제는 별관을 지어 유객으로 사용하였다. 한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4) 만리창

-선혜청 곡물을 저장하던 창고이다

 

삼개 나루에서 분류된 곡물 중에 선혜청 곡물은 만리창에서 보관하였다. 이 곡물은 역병이나 가뭄 때 기근으로 굶주린 백성에게 밥이나 죽을 해 먹였던 선혜청 구휼소의 곡물이었다. 아현동 서부 할인서(병원)에서 역병에 걸린 환자나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을 불러 구휼 하였는데 이 곡물은 만리창에 보관하였다. 만리창은 청암대에서 새로운 길(새창길)을 효장원 앞 고개까지 만들면서 세웠다.

 

(5) 새창(만리창) 주전소

-명성왕후 일가의 사금융 창고이다 (당오전을 만들어 보관)

 

고종 때 민비 일가는 해창길 주전소에서 당오전 이란 새 화폐를 만들어 화폐개혁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원래 통용화폐인 상평통보는 금위영 전환국에서 만들어 관리했는데 고종 때 국고가 바닥이 나자 새창 주전소에서 위조 화폐 당오전을 만들어 화폐개혁을 시도하였다. 당오전 한 잎에 상평통보 5(1:5)로 교환하였다. 만리창 주전소는 민 씨 황후 일가(민태호)가 당오전을 만들어 사금융화 하던 곳이다. 민씨 일족은 당오전을 마음대로 만들어 독점사유 했다. 따라서 국고 손실이라는 망국을 초래하였다. 민씨가는 당오전으로 상평통보를 교환하여 엄청난 재산을 빼돌렸다. 그러나 당오전이 화폐로 가치를 상실 하고 조선의 경제는 패망에 이르렀다. 아무튼 새창 주전소는 당오전을 만들었고 만리창은 혜민곡과 더불어 당오전 관리 창고였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 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

김용필 danmoon@hanmail.net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7.22 10:42 수정 2021.07.2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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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