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내게 20년이란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면, 그 시간을 신께서 내게 쾌히 승낙하신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단 일분도 숨을 쉬는 데조차 쓸 수가 없다. 단 한숨도 낭비 없는 시간을 들고 당장 입양기관으로 달려가 아기를 입양할 것이다.
태곳적부터 지닌 나의 굳은 의지는 이 세상을 떠날 때도 가져갈 것이다. 나를 위해 살았던 지난 시간 속에서 듣고 배운 내 인생이란 양심으로 아기를 훌륭히 키우는데 나의 정열을 다 하고 싶다.
그럼 낳아 키운 자식과 무엇이 다를까. 나의 성을 갖고 살아가는 자식의 몸에서 흐르는 피를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가슴으로 낳은 자식에게 쏟아붓는 부모의 사명과 사랑은 더 강한 인연의 긴 고리를 맺어가게끔 신은 정해 주셨다.
내 지인 중의 백인 여성은 자신이 낳은 첫아들의 긴 인생이 훗날 외로울 수 있을 것 같아 두 번째로 동양 아들 하나를 더 입양한 것이 부모로서 제일 잘한 일이라는 멋진 말을 하곤 한다. 그녀는 이제 늙어 긴 여행을 하는데 힘이 들다 보니 작은아들 사는 캐나다를 자주 찾아간다고 한다.
작은아들은 형이 지금 막 떠났다는 말을 전할 때 전화기로 들려오는 작은아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설레임이고 바로 살아야 할 이유였다고 했다. 반면에 한국 사람들의 쉬쉬하는 입양 자식의 억눌림에 대한 의미는 본디 자신의 자식을 시인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처럼 느껴졌다.
내가 살았던 세상도 만만치 않은데 자신의 자식을 두고 또 다른 남의 아이를 입양하는 일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없으면 없는 데로 사는 게 팔자 편하다는 말에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런 한국 사람들의 말은 내가 산 시간과는 의미가 너무도 다르다. 그러니까 내 삶의 밑천을 담보로 입양기관에서는 선뜻 아기를 내어 줄 것이다.
내 형제들의 아기도 아니고 누구의 아기인지, 어떤 부모 속에서 나온 아기인 줄도 모르고 어떻게 아무나 입양할 수 있냐고 묻는 사람이 한국 사람, 바로 당신이라면 나는 당신조차도 아기를 위해 버릴 수 있다. 그런 인간성 자체를 인간의 삶이라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기의 인생은 내게 입양된 그때부터이다. 나와 함께 만들어 갈 아기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다. 내 가까운 백인 친구도 훌륭하게 성장하여 그 입양 부모의 인격을 이어받았다. 누가 물으면 스스럼없이 자신은 태어난 지 2주 때 버려져 입양된 까닭을 8살이 되면서 양부모가 말해주었다고 한다.
입양 부모와 자식에 대하여 언급하는 일은 자제해야 한다는 나의 한국적 고정관념을 빨리 지워 버리게 한 미국 친구의 문화가 존경스러웠다. 서로의 문화적 다름에 대하여 나는 벌써 한국 문화를 벗어 던지고 미국문화에 정착하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모른다.
그 미국 친구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최고의 조건으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 근무할 수 있는 회사의 제의를 일부러 거절했다고 했다. 그의 대답은 지금 연로하신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멀리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나처럼 부모와 자식으로 살기 좋은 세상에서 산다.
누구나 공부할 수 있게 학비를 융자받고 졸업 후 사회인이 되어 그 빚을 갚아나가는 일은 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다. 요양원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집을 팔아 자식의 남은 학자금 빚을 말끔히 갚아준 부모의 그 자식이 바로 입양된 자식이다.
본디 세상을 거칠게 살기 위해 태어날 사람은 없다. 인생이란 길을 가면서 만나는 사람들로 인하여 원치 않았던 다른 길을 선택되어 태어난 사람이 있곤 하는데 그때마다 바른길로 인도해 줄 사람, 바로 내가 그런 부모가 되어주면 된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부모의 희생은 동서양에 존재하는 자식들이 있는 곳이다.
그 대가는 자식이 훌쩍 컸을 때 내가 말하지 않아도 부모의 마음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부모에게 해 드리지 못해 안타까운 후회의 삶이 있듯이 나의 자식으로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도 동서양의 같은 모습이다.
그렇게 나머지 시간을 모두 쓰고 싶다. 그럼 신에게 이십 년이란 시간을 공증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 안에는 내가 왜 아기를 원하는지 깨알같이 쓰인 완벽한 서류를 내보이며 왜 내가 이날을 위해 살아왔는지 빽빽이 쓰인 서류를 들이대면 신도 꼼짝없이 자궁이라는 입양기관에서 아기를 내어 줄지 모른다.
내가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아왔던 것처럼 자식도 그렇게 키우면 신이 원하는 세상의 이치가 아닐까 싶다. 한국에 폭염이 시작되었다는 뉴스를 듣다가 나는 나 자신을 폭염보다 더 푹푹 찌게 만들어 버렸다. 왜 한국가정의 입양아 사고방식은 사회적으로 늘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다루기 힘든 남의 자식 이야기라면 언급을 삼가면 된다. 자신은 입양할 일이 없다고 권력을 이용한 정권의 한 여자정치인이 뱉어 놓은 말은 참으로 악의적이다. 어느 법조인이 입양하여 이미 성인이 된 아들 이야기는 세상에 조롱거리를 만들었다.
어제는 입양 부모를 헌신의 제조기라고 세상에 나발을 불어 놓고는 오늘은 정치적인 속셈으로 입양한 자식을 내 세워 선한 행세를 한다고 막말을 한다. 입양으로 자식을 키운 부모의 가슴과 입양된 자식의 가슴을 말 한마디로 처참하게 폭파하게 시켜버렸다. 악마들 세상에서 악마들이 내뱉는 악의적인 말은 폭염보다 더 악하게 들려다.
입양한 자식들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서로 바꾸어 키워보는 것도 괜찮다는 어리석은 제안을 내놓았던 지도자의 말은 아프리카 밀림 속에 사는 미개인도 하지 않는다. 그런 악의적인 말의 상처는 더위가 물러가고 선선한 가을이 찾아온다 해도 치유될 수 없는 고통으로 남겨질 것이다.
그런 고의로 조작된 악의적인 세상법을 정치인들이 풀지 못하면 누가 풀어낼 수 있을까.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은 악을 모르는 세상에 태어났으면 좋겠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
문경구 kimurg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