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이슬방울에 비추는 코스모스

이태상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은 70여 년 전 바로 우리가 한반도에서 겪은 일 아닌가.

2022년 3월 8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실린  [따뜻한 편지]  보면서 1950년부터 1953년 휴전협정이 이뤄질 때까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미국과 소련연방 사이에 뜨겁게 달아오른  동서 냉전의 분출구로 터진 우리 동족상잔의 6.25  동란  '한국전'으로 남북한은 물론 중공군과 유엔군으로 참전한 수많은 젊은이들 그리고 남녀노소 민간인들이 '자신들 잘못이 아냐'인데 서로 죽이고 죽고 다치고 하던 일들이 저 먼 기억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요'란  카오스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앞에 언급한 '따뜻한 편지' 기사에서처럼 아름다운 '인정'의 코스모스는 피어나고 있어라.

잠시나마 이슬방울에 비추는 코스모스를 보기 위해 지난 2004년 2월 12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에 실렸던 우생의 졸문 우리 되새겨겨 볼거나.


'이슬방울에 조명을 맞춰보자'


가슴이 사랑으로 충만할 때 세상은 아름다움 천지다(The world is full of beauty when the heart is full of love).


내가 젊었을 때(아직도 그렇지만) 세상은 꼴불견이었다. 나 자신을 비롯해 미운 사람과 싫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신문·라디오·TV 등으로 뉴스를 듣고 볼 때마다 혈압이 오르고 화가 치밀어 씩씩거리며 분통이 터졌었다. 그러다 못해 한때는 울부짖었었다. 내세가,  그것도 천당은 없어도 좋지만 지옥 아니 지옥보다 억만배로 더 끔찍한 곳이 꼭 있어야 한다고.


어질고 착한 사람들을 못살게 하고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천인공노할 못된 짓들을 하는 자들이 현세에서 온갖 부귀영화 다 누리며 떵떵거리고 잘 사는 것 같아 자업자득이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면 다음 세상에서라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앙천축수(仰天祝手) 했었다.


지난 해 뉴욕 등 미국 동북부 8개주와 캐나다 일원을 마비시킨 정전으로 많은 사람이 9·11 사태를 떠올리며 공포감에 사로잡혔다가 나이애가라 폭포 근처에 있는 발전소가 벼락을 맞아 생긴 일이라는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다.


특히 일제 하에서 2차 대전과 6·25 전쟁을 겪은 재미동포 1세들은 등잔불을 밝히던 옛날을 회상하며 벌써 몇 달 몇 년째 물과 전기가 끊겨 고통받고 있을 이라크·아프가니스탄·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수난에 대해서 일말의 동정심을 느꼈으리라.


미국작가 필립 로스가 그의 작품 ‘방송중’에서 말하듯이 “세상이 일종의 쇼라면! 우리 모두 저 하늘 높이 계신 대연출가가 물색 스카웃 해놓은 탤런트로 ‘대(大) 인생쇼’에 출연하는 것이라면! 인생의 목적이 오락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오늘날 우리 현실이 마치 영화같지 않은가 전쟁영화·괴기영화·연애영화·탐정영화·비극영화·희극영화·도색영화·만화영화·공상영화·환상영화 등등.


또 그렇다면 ‘20세기의 단테’로 불린 시인·철인·화가였던 레바논 태생의 칼릴 지브란처럼 우리도 이슬방울에서 삶의 아름다운 빛을 찾아보리라.


이슬방울에 비치는 아침 해의 모습이 해만 못하지 않듯 네 가슴 속에 메아리 치는 삶의 숨소리 삶 못지 않다/ 이슬방울 햇빛 비춰줌은 이슬이 곧 햇빛이고 네가 숨쉼은 네가 곧 숨이기 때문이다/ 낮이 가고 밤이 와서 어둠이 널 덮거든 속으로 이렇게 말해보라/ ‘이 어둠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벽, 비록 한밤의 진통을 겪더라도 저 언덕들처럼 나 또한 새벽을 낳으리라’/ 저녁에 지는 백합꽃잎 속에서 제 몸 동그랗게 굴려모으는 이슬방울 하느님 품속에서 네 혼 찾아모으는 너와 다를 것 없다/ 이슬방울이 한숨짓기를 ‘천년에 한번 난 이슬방울일 뿐’이라 하거든 이렇게 물어보라. ‘무궁한 세월의 영원한 햇빛이 네게서 빛나고 있음을 모르냐고.’ (‘예언자의 뜰’에서)


여기서 우리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젊은이 얘기 좀 들어보자.


실연당한 젊은이에겐 푸른 하늘도 녹색의 숲도 보이지 않았다. 시냇물 소리도 들리지 않고 즐기던 음악조차 즐겁지 않았다. 세상만사 숨쉬고 사는게 다 무의미했다. 부유하고 행복하던 그는 가난하고 비참해졌다.


그럴수록 그의 사랑은 더해갔다. 짝사랑하는 여인을 단념하느니 차라리 그는 파멸과 죽음을 원했다. 그런데 타오르는 정열의 불길이 그의 심신을 다 태우고 그를 숯덩이 자석처럼 만들었다. 그러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이 그의 자력 같은 매력에 끌려 그에게 다가왔다.


두 팔을 벌려 여인이 끌어안는 순간 잃어버린 모든 것을 그는 되찾게 되었다. 여인이 그의 품에 안기자 모든 게 새롭고 찬란하게 되돌아왔다. 한 여인을 얻은 게 아니고 온 천하를 얻은 것이다. 하늘의 모든 별들이 그의 눈 속에서 빛났고 더할 수 없는 기쁨이 그의 몸 속으로부터 샘솟았다. 사랑을 했고, 사랑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자신을 찾았다.


그렇다면


아, 있을 이 이슬 맺혀


이슬이던가


삶과 사랑의 이슬이리


아니


기쁨과 슬픔의 저슬이리


이승의 이슬이


저승의 저슬로


숨넘어가는



Was the grass wet with early morning dew


to pay your dues of life and love?


Were they dewdrops of life-giving


and love-making,


or rather teardrops of joy and sorrow?


Was that for breathing in


this magic world to the full,


and breathing it out to the last,


before transforming back


into the mystical essence of the Cosmos?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작성 2022.03.12 10:36 수정 2022.03.1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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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