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청소년의회 뉴스 / 권효민 사무국 인턴 기자] 한 번 깨어진 유리를 다시 붙일 수 있는가. 우리는 종종 과거에 했던 말이나 행동을 되돌리고 싶어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경우 그 잘못을 시정하고 용서 받기를 원하고, 반대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은 경우 깨어진 관계에 마음 아파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주로 듣는 말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든가, ‘깨진 유리는 다시 붙일 수 없다’ 따위의 말이다. 우리는 훼손된 관계를 회복하려 하기보다는 단념하고 잊고자 노력한다.
혹자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받아 평생을 그 기억 속에서 고통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성폭력이나 학교폭력처럼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훼손하는 중범죄의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용서하기 매우 어렵다. 특히 모르는 사람에게 폭력을 당한 경우 가해자와의 관계를 회복할 이유도 없으므로 용서할 당위를 찾기란 쉽지 않다. 또한 용서는 직접적인 피해자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피해자에게도 요청되지만, 이 또한 난제이다. 예컨대 자식이 살해당했을 경우 간접적 피해자인 부모가 살인범을 용서하는 것은 어쩌면 더욱 힘들 것이다.
생생한 사례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란 크랜즈가 감독한 영화 <매스(MASS)>는 총기 난사로 아들을 잃은 부모가 가해자의 부모와 한 책상에 둘러 앉으며 시작한다. 피해자 에번의 엄마인 게일은 가해자 부모를 만나기 전, 남편 제이에게 “그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그 말’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않지만, 관객은 그것이 정황상 ‘용서의 말’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은 채, 피해자의 부모는 가해자의 부모와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다.
대화의 후반부에서 게일은 에번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가해자 헤이든의 엄마인 린다는 게일에게, 에번이 꼭 세상을 바꿀 필요는 없다며, 그저 그에 대한 기억 하나만 말해달라고 요청한다. 게일은 의아해 하면서도 에번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에번이 할머니와의 저녁 식사를 앞두고 미식축구를 너무 열심히 해서 온몸이 흙범벅이 되어 돌아왔다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게일과 제이는 그 작은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보고싶던 아들을 기억 속에서 만나고, 끝내 애도하게 된다. 6년 동안 보내지 못하고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아들을 애도함으로써 보내줄 준비가 된 것이다. 게일과 제이는 아들을 놓아준 순간 상처를 회복했고, 자동으로 가해자의 부모를 용서할 준비를 마쳤다. 게일은 말한다.
“저는 정말 간절하게 두 사람이 본보기로 벌받기를 바랐어요. 두 사람을 용서하면 애를 진짜 잃을 것 같았죠. 그런데 그냥 대화가 필요했나봐요. 이제 알 것 같아요. 두 사람을 용서했어요. 정말이에요. 이미 당신들을 용서했어요. 그리고 이 말도 해야겠어요. 난 헤이든도 용서할 거예요. 더는 이렇게 못 살겠어요. 잠도 못 자고 숨도 못 쉬잖아. 더는 여기 못 매달리겠어. 이건 에번 문제가 아니야. 바뀌지 않는 과거에 집착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더는 과거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계속 이러면 다시는 에번을 못 볼 거 같아. 난 그 애를 꼭 봐야돼. 우린 다시 만날 거야. 내가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게 되면 그 애를 안을 수 있어. 그러니까 할 거야. 용서할게요.”
피해자의 부모는 용서 후에 평안을 찾는다. 가해자의 부모는 용서받았지만 어쩐지 무거운 마음을 모두 내려놓지 못한 모습이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헤어지며, 있을지 모를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용서 후에 관계를 회복한 것이다. 마지막에 성가대의 합창이 흘러 나온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이나니…”
<매스>를 보고 우리는 그동안 간과했던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용서는 가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위한 것이다. 또한 용서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것이다. 게일과 제이는 가해자의 부모와 헤이든을 용서함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회복하고, 진정으로 아들을 보내줄 수 있었다.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해 곪아왔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에 분노와 억울함 대신에 사랑과 희망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회복을 했기 때문에 용서가 가능했고, 용서를 했기 때문에 회복이 가능해졌다. 이렇듯 용서와 회복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난제에서의 닭과 달걀과 비슷한 관계다. 그 순서를 따지기가 매우 어렵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하다.
<매스>의 대화 장소였던 방 창문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붙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색판 유리조각을 이어 붙여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한 것으로, 주로 종교 건물 창문을 장식한다. 글을 시작하며 했던 질문을 상기해본다. 한 번 깨어진 유리를 다시 붙일 수 있는가. 깨진 유리를 다시 붙여 원래의 형태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 유리 조각들을 재구성하여 더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스테인드글라스로부터 용서와 회복을 배울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닌, 앞으로의 관계의 회복을 이루어 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피해자의 회복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용서를 통해 회복적 정의를 실천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