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3년 차, 이제 정말 시작이다 (1)
오랫동안 편집자로 살아왔지만, 난 요즘도 가끔 ‘편집자’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편집자의 자질이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어떤 편집자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긴 했지만, 20년 차가 된 지금도 그놈의 ‘편집자’에 대한 자문과 고민은 끝이 나지 않는다. 도대체 왜?
매너리즘과 이직의 유혹
고민은 정확히 편집 3년 차가 되던 해부터 시작되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매너리즘과 이직 유혹, 말 그대로 난 멘붕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편집 3년 차가 되던 그해, 나는 회사에서도 일 잘하는 똘똘한 직원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그것은 내가 당당히 선택한 직업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책 만드는 일이 너무 즐거운 상태였다.
글을 읽고 쓰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여고 시절을 거쳐(친구들과 해방과 자유를 외치며 몰래 글을 쓰는 모임 조직), 연애도 글로 하고(연애편지의 달인) 운동도 글로 하던(전속 대자보 담당) 대학 시절을 보내면서 나의 장래희망은 자연스럽게 ‘책을 쓰거나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한 톨의 고민도 없이 출판사에 이력서를 넣었고, 졸업하기 전에 입사하는 행운을 누렸다(청년들이여, 그때는 이런 일이 꽤 많았다).
딸이 배 쫄쫄 곯는 글쟁이가 될까 봐(아버지 표현) 노심초사 했던 아버지에게 수백 통이 넘는 편지와 글을 분서갱유 당하고도 결국 출판사에 입사했으니 나름대로 지조를 지킨 셈이다.
그런데 편집 3년 차, 그 시간은 다가오고 말았다. 그때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직딩들의 사춘기, 요즘 말로 치면 커리어 사춘기 말이다. 자신감이 자만이 되고, 선배들에게 점점 내 취향을 주장하기 시작하고, 회사에 슬슬 불만을 표현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질곡의 시기.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 항목을 읽고 몇 개 이상 해당된다면 의심하지 말라.
당신은 지금 커리어 사춘기를 겪고 있다.
① 나도 이제 그럴 듯해 보이는 일을 하고 싶다. 가령 기획서를 쓴다거나, 저자를 발굴하는 등.
② 상사의 조언이 잔소리로 느껴진다. 나도 이제 알 건 다 아는데, 왜 신입 취급이야!
③ 회사의 시스템이나 경영에 대한 불만을 자주 토로한다.
④ 일이 패턴화되어 습관처럼 진행된다. 제자리를 빙빙 도는 느낌이랄까.
⑤ 이직의 유혹을 느낀다. 나도 이제 원하는 분야의 책을 만들고 싶다.
나는 위 항목 다섯 가지 모두 해당되었다. 시키는 일 말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마구 내면서 멋진 책을 기획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다. 어렴풋하게 내가 만들고 싶은 책에 대
한 이런 저런 상상도 커져만 갔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상사의 조언은 잔소리로 느껴졌다. 상사가 일을 시키면 내 시간을 뺏는 것만 같았다. 대충 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회사 전
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알고리즘을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었던 것 같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당돌한 3년 차가 된 것이다.
만약 그 시기가, 이제야 간신히 편집자로서 제대로 된 첫 발을 내딛는 시기라는 걸 알았더라면, 열정보다 교만이 커져 버린 시기였다는 걸 누군가 알려주었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그렇다면 난 지금 어떤 편집자가 되어 있을까.
자료제공 : 투데이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