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이 1933년에 펴낸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이란 소설에서 이상향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 샹그릴라(Sangri-La).
소설 속에서 샹그릴라는 인류가 이상으로 그리는 완전하고 평화로운 상상 속의 세계지만 이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실존의 이상 도시처럼 알려져 많은 히말라야 여행자들이 이상향 샹그릴라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지 않을까 하여 히말라야 부근을 기웃거리고 있다. 기자도 그 부류에 속하여 벌써 두 번째 히말라야 자락을 찾고 있다.
“길은 집이고, 집도 길이다. 고로 인생은 길이다.”
역마살이 낀 기자가 평소에 늘 주장하는 해괴한 논리이지만 마음을 열고 길을 나서는 순간, 나를 반겨주는 놀랄 만한 것들이 이 세상에 많다. 그 길에는 풍경뿐 아니라 삶과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차마고도(茶馬古道)는 실크로드보다 오래된 교역로로, 당나라와 티벳 토번 왕국이 서로 차와 말을 교역하면서 유래된 이름이다. 윈난성에서 티벳으로 향하는 이 길은 시솽반나(西雙版納)에서 푸얼스(普耳市)를 지나 따리(大理), 리장(麗江), 샹그릴라(香格里拉)를 거쳐 라싸(拉薩)에 이르는데, 리장에서 샹그릴라로 향하는 길목에 호도협이 자리 잡고 있다. 호랑이가 건너 다닌 협곡이라는 뜻의 호도협(虎渡峽)은 강의 상류와 하류 낙차가 170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 중의 하나이다. 이 호도협 위에 자리한 아름답기 그지없는 차마고도는 2003년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4시간 만에 쓰촨성 청두공항에 도착하여 공항 근처 호텔에서 눈만 잠시 붙인 후 새벽 첫 비행기를 타고 1시간 걸려 리장공항에 도착한다. 공항에서 호도협 트레킹의 출발지인 교두진을 향해 출발한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리장 시내를 지나 2시간 만에 상호도협에 도착한다. 나무 계단을 20여분 내려가서 협곡의 끝에 이르면 거친 물소리에 귀가 먹먹해진다. 인도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의 충돌로 야기된 지각운동은 하나였던 산을 옥룡설산(玉龍雪山)과 합파설산(哈巴雪山)으로 갈라놓았다. 그 갈라진 틈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긴 장강이 금사강(金沙江)으로 이름을 바꾸고 흘러들면서 16km의 길이에 높이 2,000m에 달하는 길고 거대한 협곡을 만든 것이다.
협곡의 물가에 서면 급류에 휘말린 물보라가 거센 포말을 이루며 튀어 오른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와 귓전을 뒤흔드는 물소리에 세상의 온갖 시름이 부서지고, 세상의 온갖 소음은 묻힌다.
호도협트레킹의 시작점은 나시객잔(纳西客栈)이다. 여기서부터 28밴드, 차마객잔, 중도객잔, 티나객잔, 장선생객잔 까지 이어진다. 옥룡설산과 하바설산 사이 협곡에 난 16km 길을 따라 1박 2일 동안 걷게 되는 것이다.
호도협에는 나시족들이 산다. 지금은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숙박업이 더 큰 수입이 되었지만 여전히 옥수수나 곡물을 심고 키우는 일은 나시족의 중요한 일상이기도 하다.
BBC가 선정한 세계 3대 트레킹 중의 하나인 차마고도 호도협트레킹은 수려한 자연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 걸어야 한다. 천천히 움직일수록 아름다운 자연이 잘 보이고, 자연으로부터 받는 감동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 트레킹 코스 중 28밴드 시작점에서부터 2km 이상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이 호도협트레킹 코스 중 가장 힘든 구간인데, 스물여덟 개의 굽이를 1시간 동안 돌아가며 올라야한다. 이 길을 걷다 보면 경사지고 황량한 이런 곳에 밭을 만들어 곡물을 심고 키워온 나시족들의 어려운 일상을 엿볼 수 있어 힘이 든다고 마냥 불평할 수 없는 처지다.
가파른 길만큼이나 급하게 차오르는 숨을 헉헉거리며 28밴드 정상의 전망대(2,670m)에 서면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고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옥룡설산과 금사강이 한눈에 보인다. 호도협 트레킹은 발치에 흐르는 금사강의 옥빛 물결을 즐기며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얼굴을 내민 옥룡설산을 마주 보며 걷는 길이다. 절벽 길 아래로 보이는 상호도협에는 좁은 협곡 사이로 옥빛 물이 흐른다. 지금은 건기라 물이 옥빛처럼 맑지만 우기에는 물이 많이 불어 흙탕물이다.
옥룡설산은 히말라야 동쪽 끝에 위치한 해발 5,596m의 고산으로, 산에 쌓인 눈이 마치 한 마리의 은빛용이 누워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풍경은 생사를 초탈하게 만든다. 용들이 들썩이는 풍경 하나로 일제히 아라한에 이를 듯하다.
나시객잔을 출발한 지 2시간 반 만에 차마객잔(車馬客棧)에 도착한다. 객잔 휴게실에서 옥룡설산을 바라보며 산 기운을 접하면서 칭따오 맥주 한잔으로 갈증을 식힌다.
차마객잔에서 중도객잔으로 이어지는 길은 하얀 몸을 곧추 세운 거대한 산괴가 도열해 있는 장엄하고 경이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천 오백년 전부터 옛 마방들이 걷던 이 길을 따라 걷다보니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삶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은 4월부터 우기가 시작되어 6월에서 8월 사이에 절정에 달한다. 이 시기에는 곳곳에서 길이 끊기거나 산사태가 일어나서 사고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우기가 끝나는 가을부터 3월까지가 트레킹 적기다.
5,000m가 훨씬 넘는 옥룡설산과 합파설산, 그리고 2,000m 높이의 아찔한 호도협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풍광은 트레킹 내내 끝없는 감탄을 자아낸다. 두 눈에 모조리 쓸어 담기에 부족한 함축적인 산경이 파노라마처럼 내내 펼쳐진다. 산을 신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트레킹 시작한 지 5시간 반 만에 첫날 목적지 중도객잔(中途客栈)에 도착한다. 옥상 휴게실에서 중도객잔의 별미 오골계 백숙으로 원기를 복돋우고, 바이주(白酒) 한잔을 나누며 여정의 피로를 날려 보낸다.
휴게실 벽과 천장은 이곳을 다녀간 우리나라와 외국 산악회의 깃발과 리본으로 도배되어 있다. 밤이 찾아와 중도객잔 전망대의 긴 장의자에 누우면 하늘에서 옥룡설산의 13개 봉우리 위로 쏟아지는 별빛을 마주 할 수 있다. 파란 천공 위를 무수히 수놓은 주먹 별들을 보면 이곳이 선경임을 이내 깨닫는다. 객실의 대형 통유리를 통해 낮에는 은빛용의 등을 연상시키는 하얗고 아름다운 만년설을, 밤에는 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있다.
객잔 곳곳에 걸린 리본과 플래카드가 마치 룽따처럼 바람에 펄럭인다. 룽따 깃발 아래에 서면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바람이 깃발을 지나가면서 내는 소리에 마음이 공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의 움직임을 얻으려고 깃발이 생긴 것은 아닐까.
룽따는 소리없는 아우성이 아니다. 사방 하늘을 향해 발복(發福)을 바라는 간절한 외침이다. 결국 색이 바래고 천이 갈기갈기 찢어져 바람과 함께 허공으로 녹아들어 가기까지 복을 부르는 소망이다.
이튿날 중도객잔을 뒤로 하고 중호도협을 향해 출발한다. 아침이 되었건만 깊은 산중의 산자락 마을은 아직도 잠들어 있다. 트레킹 내내 만나게 되는 계단식 논과 집들. 이런 척박한 오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삶을 이어온 나시족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실감할 수 있는 모습들이다.
합파설산 위로 펼쳐지는 드넓은 푸른 하늘, 그 위에 몰려드는 엄청난 구름. 어느 순간 푸른 하늘에 나타나 흐르다가 소멸되는 하얀 구름 같은 우리들의 생(生). 그 길목에서 하루를 보낸 호도협의 여정이 먼 훗날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지.
보들레르 시 ‘이방인’의 마지막 시구가 떠오른다.
나는 저 구름을 사랑한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사랑한다.
보라, 다시 보라. 저 불가사의한 구름을.
절벽 길에서 만나는 관음폭포의 시원한 물줄기는 청량함 그 자체다. 이 물줄기는 절벽의 높이가 2,000m나 되는 깊은 계곡을 따라 산 아래 금사강으로 흘러서 들어간다. 호도협 주민들은 폭포에 파이프를 설치해서 생명수로 사용하고 있다.
차마고도는 겨울에도 영상을 유지하기 때문에 길이 얼지 않아 트레킹이 가능하며, 4월이면 산자락 아래 유채 밭에서는 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노란 물결이 장관이다.
일행들과 떨어져 나 홀로 걷다보면 마치 이름 모를 외계의 행성에 와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절해고도나 다름없는 이곳에서는 어떤 신앙이라도 나시족 삶의 전부가 되었을 터인데 해발 3,000m가 넘는 차마고도 길가에는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작은 사원이 숨어 있다.
걸으면서 보이는 설산의 청정한 봉우리, 해가 들지 않는 깊은 산중의 적막, 실같이 가늘게 이어진 길, 도도하게 흐르는 물은 태고의 정서를 하염없이 자아내게 하면서 나그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아침 햇살 때문에 합파설산(5,396m)의 봉우리들은 맞은 편 옥룡설산(5,596m) 산 그림자로 그윽하다. 골짜기는 푸른 연기같은 이내로 넘쳐 저물녘의 연못 같다. 서로 마주보고 선 두 산은 마치 북한산의 원효봉과 의상봉처럼 친구 같은 사이로 느껴진다. 합파설산 자락의 호두나무숲과 대나무숲을 지나면 티나객잔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오솔길이 나온다.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내려와야 티나객잔에 도착한다.
살다보면 인간 사이를 통하고 묶어주는 다양한 끈들이 있다. 이것이 인간관계로 발전하여 서로 이해하고 아껴주면 자비(慈悲)가 된다. 함께 고통에 감응하고 기쁨에 함께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다.
삶은 금사강처럼 흐르는 물과 같다. 잠시도 머무르지 않은 채, 삶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간다. 그 흐름에 내맡겨진 우리 삶은 순응하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을 선물 받은 존재들이다. 선물은 주는 자 보다 받는 자에게 더 가치가 있어야 한다. 우주로부터 받은 선물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마음껏 누린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길을 걸으며 마냥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다.
천오백년 전부터 집을 떠나 거칠고 황량한 차마고도에서 고단한 삶의 여정을 살아온 마방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평생을 생명을 담보로 힘겹게 걷고 걸었던 길.
한과 눈물과 애환의 길.
그러나 그들이 걸었던 길고 긴 노정의 끝은 결국 가족이 기다리는 집이 아니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차마고도는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길이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