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용 (수필가/인문학자)
지난주에도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많은 이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은 대개 같은 곳입니다. ‘운명을 사랑하는 운명애’와 ‘끊임없이 극복하는 인간애’의 충돌 부분입니다. 맞습니다. 니체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충돌을 연출해 냅니다. 그의 철학은 소위 대립의 철학입니다. 이를 두고 나는 음양을 품은 태극의 이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우선, ‘운명애’는 한계에 직면한 정신입니다. 그때는 그 한계를 떠안는 데서 만족하지 말고 사랑까지 해 줘야 한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운명애를 실천해야 할 때는 소위 허무주의가 도래했을 때입니다. 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인식될 때, 바로 그 허무를 사랑해 주는 일이야말로 초인이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을 것입니다. 삶으로 주어진 시간은 어느 순간 끝이 날 것입니다. 생각하는 존재가 생각하기를 멈추는 순간이 기어코 다가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 죽는 순간에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위대한 순간에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증오하는 일이 없도록 눈물겹도록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 두어야 합니다.
힘은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힘이 다하면 누구나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때 스스로 하수구가 되어 모든 것을 오물처럼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 쓰러지는 순간에도 무無를 기다리다가 ‘차라투스트라’라는 영감을 얻어내는 철학자 니체처럼, 또 그때 ‘나의 여인이여’ 하며 멋진 사랑고백이라도 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철저히 해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운명이 아니면 저항해야 합니다. 한계가 아니면 싸워야 합니다. 눈을 뜰 수 있으면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힘이 남아 있다면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허무하지 않다는 인식이 들면 다시 의미를 찾아 멀리 모험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미련을 버리고 돌아서야 합니다. 끝이 아니면 계속해야 합니다. 허무주의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마땅합니다.
사람이라면 살아야 합니다. 살아 있어야 사람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합니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면 삶을 책임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삶을 변호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만물의 생몰, 즉 생성과 몰락, 그 변천 과정에는 전쟁이라는 요소가 개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네카는 ‘산다는 것은 싸운다는 뜻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도 ‘삶은 전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싸우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예레미야애가 5:9) 이런 말이 성경 말씀이기도 합니다. 살려면 죽기를 무릅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인생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살려면 삶을 위한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 죽기를 무릅쓸 때 사즉필생死卽必生이라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도 인식의 소리로 주어질 것입니다. 삶이 중요한 이유는 죽어야 할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죽고 싶다’는 말은 입에 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그 대신에 ‘살고 싶다’는 말만을 기억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죽는 순간에도 이 말을 떠올릴 수 있도록 무의식 속 그 깊은 곳에까지 이르도록 각인해 두어야 합니다.
운명애와 인간애는 어울리며 돌고 돕니다. 허무주의는 도래하고 또 허무주의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운명을 사랑하며 한계를 인정해야 할 때도 있고, 인간을 사랑하며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으로 거듭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둘이 모여줄 때 태극은 완성됩니다. “나를 이해했는가?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이것이 바로 니체의 대립의 철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