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어느 한 공주의 죽음

이태상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전 세계적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TV 드라마가 있었다. 영국에서 만든 <어느 한 공주의 죽음>이었다.

 

사우디 아라비아 공주와 그녀의 애인이 간통죄로 사형당한 실화를 소재로 만든 이 TV 극영화가1980년 영국에서 처음 방영된 후 일어난 국제적인 논란이 서양 사람들에게는 한낱 ‘찻잔 속의 폭풍(Storm in a Teacup)’ 같이 대수롭지않았을지 몰라도 아랍 사람들에게는 회교도를 심하게 모욕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이 사건이 아랍인들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억울함을 대변해 줄 ‘러셀 법정 (The Russell Tribunal, also known as the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Russell–Sartre Tribunal, or Stockholm Tribunal, was a private People's Tribunal organised in 1966 by Bertrand Russell, British philosopher and Nobel Prize winner, and hosted by French philosopher and writer Jean-Paul Sartre, along with Lelio Basso, Simone de Beauvoir, Vladimir Dedijer, Ralph Schoenman, Isaac Deutscher and several others. The tribunal investigated and evaluated American foreign policy and military intervention in Vietnam.) ‘WIKIPEDIA’를 대신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미샬 공주는 이슬람교라는 보이지 않는 경계 안에서도 밖에서도 살 수 없었다. 이 비극적인 공주의 운명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 충돌하는 그 소용돌이에 말려든 아랍인들의 운명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었다. ‘대자대비한 알라’ 신을 부르면서 회교 사원으로부터 사람들이 밀려나온다. 죄인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다. 이들은 사형당하는 공주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라와 땅을 뺏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죽을 각오 외에는 다른 아무 표정도 없는 공주를 용감무쌍한 한 독립운동가로 상상했을 것이고, 광신적인 이슬람교도들은 ‘죗값을 치르는 나를 보라’고 행동으로 말하는 공주를 한 순교자로 보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증인 진술이 똑 같았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시 아랍인이었던 ‘오셀로Othello’가 말한 것 같이 공주는 갈보였다. 따라서 마땅한 벌을 받는다고 신경질적으로 한 시녀가 궁중생활을 얘기한다.

 

“온 종일 종들 말고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아요. 낮 열두 시 전에 아무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요. 그럼 뭣들 하느냐고요? 아무 것도 안 하지요. 그럼 운동도 안 하느냐고요? 물론 하지요. 성교행위를. TV를 줄곧 켜놓고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 같은 카세트 곡을 열 번 , 스무 번씩 듣고 팝가요 인기곡을 런던서 비행기로 가져오고, 미샬 공주가 즐겨 듣던 노래는 ‘나를 위한 입맞춤 Kisses for Me’ 이었지요. 이 노래는 수도 없이 들었어요.”

 

또 한 시녀가 말한다.

 

“공주에게 어떤 특권과 자유가 있었느냐고요? 섹스였지요."

 

 공주들은 복잡하고 위험한 성생활을 한단다. 이들의 경우 남자가 여자를 고르는 것이 아니고 여자가 남자를 선택한다. 남자가 여자를 고를 수 없는 것은 여자가 얼굴에 쓴 베일 때문이란다. 사막에 길이 나 있고 매력 있는 남자를 발견하면 그 남자의 자동차 번호판 번호를 적어 두었다가 자기 운전기사를 시켜 접촉을 한단다. 가엾은 것. 다른 공주들 몫까지 대신해서 벌 받는 것이란다.

 

미샬 공주는 TV에서 본 기타 치는 남자와 정을 통하다가 들켰단다. 재판도 받지 않고 “나는 간통했습니다. 나는 간통했습니다. 나는 간통했습니다". 세 번의 자백으로 충분했다.

 

TV 화면으로 계속 반복되는 영상이 있었다. 언제나 운전 기사가 모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안락한 뒷좌석에 앉아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인들. 눈부신 불빛 속에 춤추는 남자들을 보면서 상대를 골라 잡는 남자 사냥꾼들이었다. 내가 이 실화 극영화를 본 기억으로 여자는 모래더미 앞에 세워진 채 총살당하고 그 여자의 먹이였던 남자는 공중 주차장에서 참수당한다.

 

‘어느 한 공주의 죽음’이 아랍산 기름의 아이러니였을까? 그렇지 않다면 인생의 허다한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한 방울의 기름을 신기루蜃氣樓mirage가 아니라면 하나의 거울로 삼아 우리 자신을 반성해 봄 직 할 것 같다. 보는 사람의 관점이 어떻든 간에 이 TV 드라마가 빚은 물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 인간 사회에 널리 퍼져 만연漫然한 온갖 위선과 독선에 찬 편견과 선입견을 잘 드러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세속화될 대로 세속화되고 상업화된 기독교와 깊은 환멸에서 부흥을 꿈꾸는 회교 사이에서 말이다. 그 당시 사우디 아라비아가 그토록 강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이 드라마가 사우디 왕실의 치부를 다뤘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좀 더 깊이 관찰해 보면 그 동안 오래도록 쌓여 온 분노가 터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흔히 서양의 신문과 잡지 특히 TV 화면에 조롱조로 우스꽝스럽게 비친 아랍 사람들의 모습이 그들에게 얼마나 모욕적이었을까?

이것은 아랍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모든 유색 인종들이 다 같이 느껴온 수모 일 것이다.

 

오늘날도 우월감에 사로잡힌 많은 백인들이 유색인들을 원숭이나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오만방자한 태도 때문 일 것이다. 다반사로 일어나는 살인, 강도, 강간, 폭력, 마약으로 병들대로 병든 서구사회 백인들이 회교국 아라비아 사회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랍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고 흉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서양의 백인들이 정의를 운운할 때처럼 아랍인들과 다른 유색인들을 분노케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백인들에게 아메리카와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로 혹사당해온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몸부림치다 처참한 죽음을 맞은 공주의 운명과 백인들 농간에 맥없이 희생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운명이 비슷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 비유는 맞지 않다고 많은 아랍인들은 말할 것이다.

 

한 가지 크게 다른 점은 공주는 이슬람교의 율법을 알면서 어겼다는 거다. 간통하다 들키면 그 벌이 사형이란 걸 알면서 그 법을 어긴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운명이 가혹하긴 했지만 이슬람교의 법률상으로는 엄격한 의미에서 사회정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무런 법도 어긴 것이 없는데 결코 자초하지 않은 벌을 받게 된 것이다.

 

공주의 운명은 극히 야만적인 비극으로 느끼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억울함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서구 사람들에 대해 아랍인들이 어떻게 느낄런지 상상하고도 남을 일 아닌가. 그들은 가슴으로 울부짖을 것이다. 공주는 이미 죽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제 나라 제 땅에서 사람답게 살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왜냐하면 세계 이차 대전 이후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유태인들의 돈과 표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서라고.

 

이와 같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간통으로 처형당한 공주의 죄와 벌에 대해 각자 어떻게 느꼈던 간에 모든 아랍인들이 볼 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취한 서구 백인들의 행동이야말로 더할 수 없이 야만적인 만행이라고 밖에 할 수 없으리라. 서양의 백인들 특히 유태인들이 자기네만 옳고 잘났다고 ‘혼자 잘났어, 정말’ 자기네 주의 주장만 진리라고, 자기네가 믿는 종교만 참 종교라고 큰소리 치는 건 온당치 못하고 지혜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제넘고 위험천하다.

 

이렇게 유치무쌍한 정신 상태야말로 서양문명의 천박성과 미숙함을 드러내고 모든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 뿐이다. 하루 속히 백인들도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해서 치졸한 우월감을 졸업할 때 그리고 이들이 더 이상 함부로 못된 짓 못하게 또 버르장머리 없이 굴지 못하도록 유색인종들이 서로 다투자 말고 단결해서 힘을 모아 본때를 보여 줄 때 비로서 모든 사람의 인권이 존중되는 진정한 ‘자유세계’가 되리라.

 

이런 뜻에서 ‘어느 한 공주의 죽음’이 우리 모든 평민들 눈의 가시처럼 존재해온 귀족과 왕족의 종말을 고하고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의 끝장을 보게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3.03.18 09:51 수정 2023.03.1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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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