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기행] 소백산 명봉사



소백산 명봉사

 

 

그녀, 차갑다. 저녁노을 속에선 더 차갑다. 혼자 저녁예불을 보는 그녀 뒤에서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을 독경하고 그녀가 일어섰다. 앉았던 자리에 찬바람이 우수수 떨어졌다. 두 손을 모우고 그녀에게 합장을 했다. 눈빛을 주고받을 틈도 없이 그녀, 차갑게 돌아서 나간다. 그녀를 기다리던 대웅전 앞 멍멍이가 힘차게 꼬리를 흔든다. 그녀, 환하게 웃는다. 멍멍이와 그녀 사이에 나는 끼어들 틈이 없다. 그녀의 멍멍이가 부럽다. 그녀와 함께 절집에 사는 멍멍이의 견생이 부럽다. 멍멍이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도 부럽다. 명봉사 대웅전 댓돌에 앉아 나는 내내 그녀와 그녀의 멍멍이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그녀가 사라진 명봉사 경내를 천천히 돌았다. 그녀처럼 차가운 노을이 경내를 덮고 있었다. 나는 노을을 피해 숨을 곳이 없었다. 그녀는 사라졌고 멍멍이도 사라진 저녁, 한기가 밀려온다. 그녀와 나 사이에 있는 명봉사만 아득하고 아득했다. 내 심장을 벌렁벌렁 들쑤셔 놓은 그녀의 차가움은 갠지스 강에 둥둥 떠다니는 타다 남은 재처럼 두려웠다. 그래, 그건 두려움이었다. 나는 두려워하도록 길들여진 두려움에게 침몰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움은 나의 저 깊은 무의식 속에 있는 나약한 이성을 불러내어 얼음같이 차갑게 얼리고 있었다. 다행이다. 나는 막 돋아나고 있는 초승달처럼 되도록 더 날카롭고 차갑게 나의 이성을 얼려주길 바랐다. 그리하여 나의 모든 이성은 그녀처럼 차가움으로 완성되길 바랐다.

 

내가 주체할 수 없는 젊음에 취해 인생을 소비하고 있을 이십대 무렵 그녀는 이미 차가움의 본질을 궁금해 하며 치열한 정신세계를 열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실패하고 넘어지고 깨지고 힘들어하고 있을 때 그녀는 오직 하나의 진리만을 생각하며 진리의 궁극에 도달하고자 자기 자신을 다 내려놓았을 것이다. 내가 사랑에 취하고 욕망에 사로잡히고 물질에 노예가 되어갈 때 그녀는 잿빛 가사적삼을 입고 가지 않은 길을 걸으며 저 너른 지혜의 바다를 건너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순명은 차가움으로 빛나고 삶은 이슬처럼 영롱했을 것인데 지천명을 넘은 지금에야 겨우 발 한 짝을 들여 놓으며 안심하고 있는 나는 그녀가 부럽다. 그녀의 차가움이 부럽다. 명봉사의 저녁예불은 그녀처럼 차갑고 차가웠지만 나는 그런 명봉사의 저녁을 오랫동안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풍경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거처로 사라진 그녀를 생각하다가 나는 목이 탔다. 명봉사 약수를 한바가지 떠서 마셨다. 차가운 물은 타는 목을 지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오장육부를 돌고 돌아 단전에 머무는 듯 했다. 그제야 숨이 고르게 나왔다. 대웅전 부처님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고 나는 공연히 부끄러워 연신 물을 마셔댔다. 돌담아래 수줍게 핀 채송화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았지만 나는 염치를 접으며 꿋꿋하게 물을 마시고 나서 경내를 둘러보러 발걸음을 뗐다.

 

오층석탑 앞에 화운루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뼈대를 세운 화운루는 상량식을 하려는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인근의 스님들이 모여서 상량식을 거행하려는 모양이다. 축하하는 두 개의 화환이 가지런하게 경내를 지키고 있었다. 천년 넘는 시간 속에서 불사는 여러 번 이루어지고 이루어진 불사는 또 여러 번 소멸 되었을 터이지만 지금, 화운루의 불사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일 것이다. 시간은 가끔 우리를 따돌리기도 하지만 결코 우주를 벗어나진 못할 것이므로 명봉사에 와서 나는 대들보 위에 대공을 세우고 마룻대를 올린 화운루를 만난 기쁨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펜은 무디고 문장은 초라해서 마음 둘 바를 찾지 못해 허둥댈 뿐이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와 인연을 두고 있는 명봉사는 봉황이 하늘높이 날아 고요한 소백산 골짝이가 있는 명봉계곡에서 크게 울어 명봉사가 되었다는데 옛날의 명봉사는 백 칸이나 되는 아주 큰 절이었다. 지금은 거의 소실되고 문종대왕 태실비가 명봉사의 유명세를 유지시켜 주는데 진리는 비진리와 손을 잡아야 진리가 발현되는 것이 아니던가.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의 왕실이 태를 묻을 만큼 부처님의 가피가 꽃피는 곳이 명봉사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깊은 산중에 들어와 그녀를 만나고 나니 시간도 길을 잃었나 보다. 나는 멈춘 시간을 재촉하며 그녀에게서 빠져 나오려고 산문을 나셨다. 산문 뒤에 차가운 그녀가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다. 부처가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속세에 살면서 부처를 사랑한 죄밖에 없는 나는 가려운 뒤통수를 긁으며 산을 내려왔다. 어둠속으로 명봉사를 두고 내려오는 길, 속세에 대한 미련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그녀의 말끔한 사랑법이 나는 부러울 뿐이었다.

 

그녀, 경외하는…….

 

 

 




전승선 기자
작성 2019.04.16 09:57 수정 2019.04.1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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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