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라이프] 그 바닷가의 추억

이봉수



오래전 남해안 어느 바닷가에서 있었던 내 젊은 날의 추억이 아련한 기억 속에 살아난다. 그 해 한여름의 태양이 이글거릴 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방랑벽이 도져 목적지도 없이 배낭 속에 텐트와 간단한 취사도구를 챙겨 홀로 발길 닿는 대로 방랑을 시작했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 노래했듯이 가도 가도 황톳길, 숨 막히는 산길을 걸어 산마루에 올라서니 아! 이게 무슨 별천지인가...... 햇빛에 반사되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점점이 떠있는 섬들, 흰 궤적을 늘어뜨리고 지나가는 배들 그리고 꼬불꼬불한 해안선은 감동 그 자체였다.

  

단숨에 바닷가로 내달렸다. 조그만 포구엔 노 젓는 배 몇 척이 정박해 있고 근처엔 게딱지처럼 옹기종기 눌러앉은 집들이 예닐곱 채 있었다. 리아스식 해안 저편엔 긴 모래사장이 보였다. 텐트를 치고 하룻밤 지내기에 좋아 보여 무작정 그쪽으로 걸었다. 이미 해는 서산에 가까웠고 길손의 그림자는 길게 물가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발을 물에 담근 채 어슬렁어슬렁 몇 구비 해안을 돌아 해수욕장처럼 생긴 너무나 깨끗한 그 모래사장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의심했다. 이렇게 외딴 모래사장에 닭이 한 마리 왔다갔다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바다오리나 갈매기가 아닌 닭이......


이건 분명 근처에 누가 산다는 이야기다. 신기해서 닭을 좇고 있는데 이번엔 내 귀를 의심하는 일이 생겼다. 어디선가 실낱같은 목소리로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하는 클라멘타인 노랫소리가 들렸다. 닭이 한 구비 돌아 노랫소리 나는 쪽으로 달아났고 나는 무작정 그쪽으로 향했다.

 

한 구비 돌아서니 아니나 다를까 초막 오두막이 한 채 있고 그 집 앞 모래사장엔 조그만 꼬마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여섯 살쯤 되어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낚싯줄을 물속에 던져놓고 뭔가를 잡고 있었다. 옆엔 찌그러진 주전자가 하나 있는데 들여다보니 바닷물을 반쯤 채워놓은 곳에 꼬시락(문절망둑) 대여섯 마리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네가 낚았니?"

  

물어도 말이 없었다. 남루한 팬티만 하나 걸치고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햇볕에 그을려 온몸이 새까만데 눈은 왜 그리 크고 맑은지....  


 "네가 아까 노래 불렀니?"


다시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마치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이 문명세계에서 온 서양인들을 빠빠라기라 부르며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처럼 그 꼬마는 나를 바라보고 뭔가를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낚시하는 채비를 자세히 보았다. 미끼는 물밑에 기어 다니는 게고동을 잡아 껍질을 살짝 깨어서 알맹이가 기어 나오면 미끼로 쓰고 있었다. 낚싯줄은 나무 막대에 감았는데 길이가 약 10미터쯤 되어 보였고 낡아서 때묻은 줄의 굵기는 족히 10호는 되어 보였다. 바늘은 상당히 큰 것을 하나 달아 놓았고 납 봉돌은 있을 리 없어 잘록하게 장구처럼 생긴 돌멩이 하나를 줄에 묶어 팔매질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도 큰 꼬시락이 올라오는데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것저것 물어보아도 도무지 대답이 없어 벙어리인가 생각도 했으나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배낭을 풀어 먹을 것을 좀 끄집어냈다. 과자와 과일을 내놓고 꼬마에게 먹으라고 건넸다. 무척 배가 고팠는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받아먹는 게 아닌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너무 반가웠다. 알고 보니 이 꼬마는 배가 고파 말을 하기 싫었던 것이다.

 

  "고기는 뭐 하려고 잡니?" 


꼬마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반찬 할라꼬예......"

  "아까 그 노래는 누구한테 배웠어?"
  "엄마한테......"

 

순간 닭이 우리 곁으로 와서 모래를 파며 뭔가를 주워 먹고 있는데 해는 이미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지금 너 혼자 있어?"
  "........."

  "엄마는?"
  "...... 도망갔어요"

  "아빠는?"
  "요 산 너머 광산에 일하러 갔심더. 나중에 올 때 쌀을 사 온다고 해서 반찬 할라꼬 지금 꼬시락 낚심더..."

 

꼬마는 갑자기 꼬시락 한 마리를 무딘 칼로 회를 쳐서 바닷물에 대충 씻어 반듯한 돌 위에 썰어 놓고는 초막으로 달려가 된장 통을 들고 나왔다. 


  "아저씨 먹어!"


새까만 고사리 손으로 꼬시락 회 한 토막을 된장에 꾹 찍어 내 입으로 넣어주었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져 왔으나 노을빛 바다 덕분에 감출 수 있었다. 이제 꼬마는 경계하는 기색이 완전히 없어지고 내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왜 도망갔어?"
  "아빠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엄마 보고 싶지 않아?"


꼬마는 대답 대신 눈물을 흘렸다. 나는 달랬다.

그리고 우리 둘은 같이 노래를 불렀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라멘타인 늙은 애비 혼자 두고...."

  

이미 어둠은 깔리고 꼬마는 오막살이집에 등불을 켰다. 나는 그 옆에 텐트를 쳤다. 그리고 내가 갖고 간 쌀로 밥을 해서 둘은 남폿불 아래서 저녁밥을 먹었다.

 

밤이 이슥하여 꼬마 보고 먼저 자라고 했더니 아빠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밤이 아주 깊어갈 무렵 저쪽 해변에는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걸어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꼬마의 아버지였다. 광산에서 돈을 좀 탔는지 쌀을 두어 되 들고 있었다. 꼬마가 아빠에게 밥을 먹으라며 꼬시락 회와 함께 내놓았으나 아빠는 밀쳐버리고 이내 코를 골며 뻗어버렸다. 나도 텐트로 돌아와 잠에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텐트에서 자고 있는데 바깥이 하도 시끄러워 눈을 뜨고 텐트 밖으로 나갔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빠가 꼬마를 번쩍 들고는 시퍼런 바닷물 속으로 집어던지면서, "야 이놈의 자슥아! 내랑 같이 죽자! 이렇게 살아서 뭐 할래?"하고 외치고 있었다.

  

꼬마는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헤엄을 쳐서 기어 나오는데 아빠는 다시 물속으로 집어던지기를 서너 번 반복하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날렸다. 꼬르륵 가라앉는 꼬마를 뭍으로 건져내고는 아빠를 향해서 돌진했다. 밀고 당기는 멱살잡이를 해서 겨우 모래사장에 주저앉혔다.

 

모두들 정신이 들자 대성통곡을 했다. 에미 년은 도망가고 희망이 없어 애와 함께 죽으려고 했는데 왜 살렸느냐며  아빠는 흐느껴 울었다. 아빠는 꼬마를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죽으면 안 된다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면서 나는 갖고 갔던 먹을 것과 취사도구 등을 몽땅 꼬마에게 주고 작별을 했다. 자꾸만 뒤돌아보며 떠나오는데 꼬마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집 앞 모래사장엔 무심한 닭이 일없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듬해 여름에 나는 하도 궁금하여 그곳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집은 허물어지고 해변엔 아무도 없었다. 닭도 없었다. 백사장은 쓸쓸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지금 그 소년은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을까. 나는 아직도 그 해변을 잊지 못한다. 잊을 수가 없다.


이봉수 기자
작성 2019.04.25 11:11 수정 2019.04.2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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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