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봄처럼 나른한 날 만사를 제쳐두고 지리산으로 훌쩍 떠났다. 도솔암에 사는 은둔 수행자가 천일기도를 마치고 토굴에서 나오는 날이다. 벽소령이라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 나그네를 반긴다. 차가 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서 문명의 이기는 외진 숲속에 꽁꽁 묶어 두고 두 발에 의지하여 반달가슴곰 출현지역으로 들어섰다.
해는 이미 저물어 산문으로 접어드는 길이 어둑어둑한데 가야 할 길은 아득하다. 곰이 출몰하는 지역이므로 돌아가라는 말과 함께 맹수의 울부짖는 소리가 녹화 음으로 들려오는 순간 오금이 저렸다. 초저녁 계곡에 메아리치는 고약한 고라니 울음까지 먼 별빛을 불안하게 흔들어댔다. 깊은 산 밤길에 휴대폰은 먹통이 되고 진퇴유곡(進退維谷)이 되어버렸다.
죽기 밖에 더하겠는가. 아니 죽음이 두려운가. 죽음에 대하여 애써 초연한 척했던 내 위선이 어둠 속 오솔길에서 그 실체가 드러났다. 바스락거리는 산새의 미동에도 소름이 돋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가짜 나는 진짜 나와 마주 섰다. 여기서 돌아서면 도로아미타불이 된다는 일념으로 길을 재촉했다.
키 작은 산죽이 사각대는 오솔길을 지나 아름드리 전나무 숲을 지나면서 땀으로 젖은 등줄기가 서늘함을 알아차렸다. 더운 땀이 반이고 식은땀이 반이다. 밤길에서는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한참을 무심코 걷다 보니 점차 간이 커지면서 귀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다. 묘지라도 하나 나오면 좀 쉬었다 갈 텐데 어둠의 터널은 끝간 데 없다.
절박하면 민감해진다. 1시간쯤 걸었을 때 내 오감이 동물적 감각을 발휘했다. 토굴 구들방에 군불을 때는 연기 냄새가 밤바람을 타고 내려와 나그네의 코를 안심시켰다. 그리운 도솔천에 거의 다 왔다는 반가운 신호다. 잠시 후 은둔 수행자는 산신령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반겼다. 알을 깨고 나온 변태(變態)와 함께 새벽까지 박장대소를 하고 놀았다. 내려와 바라보니 그리운 도솔천은 흰 구름 속에 아득하다.